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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73화 (73/170)

사막의 쟁탈전 (5)

남은 중간보스 둘을 피해 곧장 보스방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개방하는 열쇠.

그것이 주홍빛 육각패의 정체였다.

불의 정령 클리어 이후 아직 인원 손실은 없다지만 길드원들은 제법 지친 상태였다.

다른 던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전투를 연이어 펼쳤으니 당연했다.

만약 비밀통로를 이용하지 않으면 보스 얼굴도 못 볼 확률이 높았기에 나는 조심스레 육각패를 쥐었다.

“오빠?”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뜨끔한 나머지 손이 멈추고 말았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 채린이는 계속 내 곁을 맴돌았는데 안전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응?”

“괜찮으세요?”

“괜찮아. 몸이 좀 뻐근해서 그래.”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아냐.”

내가 괜찮다며 도리질했음에도 그녀는 싱긋 웃을 뿐,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럼 안 되는데···.

패를 구멍에 맞춰야 하는데 날 빤히 바라보는 상황에선 곤란했다.

육각패를 끼우자마자 비밀 통로가 열리면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는 녀석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난 최후 수단을 썼다.

“앗!”

“응?”

눈을 부릅뜨며 얼굴을 돌리자 채린이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를 따라왔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뒤로 뻗어 육각패를 끼웠다.

안전지대에 존재하는 수백 개의 구멍 중 유일하게 통로로 향하는 길을 여는 홈이었다.

쿠구구궁-

돌벽이 움직이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통로가 개방됐다.

갑작스러운 벽의 움직임에 길드원들은 깜짝 놀라 무기를 쥐었다.

안전지대가 갑작스레 변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고 십중팔구는 안 좋은 쪽이었다.

“씨팔.”

“누가 뭐 건드렸어!”

“다들 일어서! 전투 준비!”

나는 채린이의 팔을 잡아 일으켜 준 뒤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잠깐만. 무슨 소리 안 들려?”

“저 소리 혹시···.”

“으으!”

벽을 타고 사각사각 울리는 불길한 소리가 지나쳐 왔던 통로 쪽에서 들렸고 제리를 비롯한 팀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었는데 보나 마나 벌레가 틀림없었다.

“한솔아. 어느 쪽으로 갈 거야!”

뒤에서 쫓아오는 적을 피해 달아나려면 기존 통로로 가든지 새 통로로 가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 길드원들은 리더의 판단을 요구했고 나는 고민하는 척하다 비밀 통로 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

통로는 커다란 원을 그리듯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져 아래로 향했다.

통로가 어찌나 긴지 아무리 달려도 도통 끝날 기미가 없었다.

“우리 길 잘못 든 거 아냐?”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벌써 삼십 분째인데.”

북방 전선을 개척하며 나름 경험치가 쌓였지만 이렇게 달리기만 한 적은 처음인지라 다들 이게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얼굴이었다.

“여덟 시간 전부 마라톤으로 채우는 건 아니겠지.”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빌며 통로를 달린 지 십 분이 더 지났을 때 밝은 빛이 보였다.

“출구다!”

“급히 나가지 말고 천천히.”

통로 안쪽에서 본 바깥은 틀림없는 모래사막이었다.

분명 지하로 한참을 달렸는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사막이라니?

기이한 일이었다.

일행은 당황하지 않고 버프를 돌리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 풍경이 바뀌면 격전이 벌어질 확률이 높았다.

물약 도핑을 마치고 통로 바깥으로 나서자 찌는듯한 열기가 일행을 덮쳤다.

일반 길드원들은 괜찮지만 감각에 영향을 받는 선수들은 대번에 인상을 썼다.

열풍 한가운데를 걷는 느낌이었다.

“저기 뭔가 있어.”

팀원중 시야가 가장 넓은 애덤이 무언갈 찾아냈다.

난 보지 않고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색궁전의 주인, 사막의 지배자 스카라였다.

모래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거대한 창을 휘두르는 인간형 보스.

만약 놈에게도 불의 정령처럼 숨겨진 패턴이 있다면 어려운 승부가 될지도 모른단 예감이 들었다.

“사람이···?”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씩 스카라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리고 놈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다.

구릿빛 피부, 이름 모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머리와 어깨 위에 걸친 황제가 우릴 쳐다보는 순간 S.솔리드 선수 전원이 몸을 흠칫 떨었다.

전신접속기를 사용하지 않는 일반 길드원들은 갑자기 우리가 몸을 떨자 왜 그러냐는 눈빛이었다.

“이거 오늘 여럿 눕겠는데.”

“게, 게임으로 이런 게 가능해?”

가공할 압박감.

어찌나 살벌했는지 제레미는 말도 더듬었다.

호랑이 앞에 맨몸으로 서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리고 숨을 집어삼키며 놀란 팀원들보다 더 놀란 건 나였다.

‘스카라가 이 정돈 아니었을 텐데.’

뭐가 어떻게 변했는진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한가진 확실했다.

지금 저 녀석은 내가 알던 것보다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사막의 지배자였다.

*

S.솔리드가 스카라를 향해 달려들던 그때,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가이아 운영진, 그리고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전직원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색궁전의 혈투를 예의주시했다.

“설마 깨는 건 아니겠지?”

유니크의 신형이 부드럽게 움직여 창을 피해내더니 벼락처럼 주먹을 뻗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직원들은 신음을 흘렸다.

가이아 첫시즌이었던 작년의 개척도는 처음 기획했던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밸런스 조율과 더불어 게임사가 가장 신경 쓰는 요소 중 하나가 컨텐츠 고갈이다.

수 년간 이를 악물고 개발해 몇 개월 만에 탈탈 털렸던 게임이 어디 한둘인가?

몇 개월은 그래도 양반이다.

블록버스터급 게임이 보름 만에 컨텐츠가 다 뚫려서 바닥을 드러내는 경우도 심심찮았다.

물론 유저가 잘 즐겨서 만족스러워하면 개발자도 보람차겠지만 어디 유저들이 그런 존재인가.

아 개노잼. 컨텐츠가 없네.

망게임이 다 그렇죠 뭐.

24시간 게임만 하면서 게임이 영원히 재밌기만 바라는 미친놈들, 좋게 표현하면 하드 게이머가 이 바닥엔 너무 많았다.

지난 일 년간 가이아 개발진은 쉴새 없이 달려왔다.

새로운 지역 배치, 전신접속기와의 동기화, AI의 업그레이드까지.

신경써야 할 게 한둘이 아녔다.

다행스럽게도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제대로 된 VR게임, 진정한 가상현실을 이룩한 게임이 전세계에 가이아 하나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운영측은 작년 유저들의 분발을 교훈 삼아 더 진화한 AI, 강력한 패턴의 몬스터들이 포진된 던전을 새롭게 배치했다.

30퍼센트 미만 개척도로 컨텐츠를 지켜보자는 목표도 세웠다.

하지만 시즌 절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이미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동서남북, 각 방면에서 프로팀을 주축으로 한 개척대가 엄청난 속도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 결과, 유저들의 개척 속도는 애초 운영 측에서 예상했던 수치를 까마득하게 넘어서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일조한 팀이 바로 S.솔리드였다.

북미 최고의 엘리트 선수가 모인 전년도 우승팀.

월드 알림창에 S.솔리드의 공략 메시지가 올라올 때마다 유저들은 환호했고 개발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나마 요즘은 리그가 진행중이라 속도가 좀 주춤했는데 리그 일정이 마무리되면 다시 속도를 올릴 게 분명했다.

작년 유저의 성장폭을 참작해 더욱 고도화된 패턴과 전술을 주입했는데도 그들 앞에선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가장 큰 원인은 길드를 이끄는 무도가 때문이었다.

유니크.

전 세계 최강의 프로 플레이어.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고급 던전의 트랩이며 몬스터를 게 살 바르듯 처리하는데 그 실력이 아주 기가 막혔다.

가이아의 인지도를 끌어올리는데 기여한 유니크는 홍보팀에선 행운의 아이콘, 밸런스를 담당하는 모니터링 부서엔 얄밉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대체로 운영팀은 유니크에 대한 심기가 불편한 쪽이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 눈치를 살피는 한 남자가 있었다.

니콜라이였다.

제프 해프닝때만 해도 내가 유니크와 친하다며 떠벌리고 다녔던 니콜라이다.

덕분에 홍보가 아주 제대로였다며 부장님 칭찬도 받고 자리 좀 마련해 줄 수 없냐며 각종 업계로부터 선물을 챙기기도 했다.

S.솔리드 숙소에 줄만 대주면 알아서 수입이 생기니 니콜라이로선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옛말, 엊그젠 복도에서 팀장에게 쓴소릴 한 바가지 들었다.

“자네. 입 조심해!”

“예, 예?”

“가 봐!”

눈을 부라리며 팀장은 대뜸 그리 경고했다.

니콜라이는 영문도 모르고 당했다. 그러나 차마 당당하게 대꾸하진 못했다.

찔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실제로 S.솔리드와 한솔에게 정보를 넘긴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향후 패치 방안등을 미리 알려주고 그 댓가로 상부상조 하는 건 흔한 관례였다.

중요 기밀을 누설하는 것도 아니고 패치 내역을 미리 알려주는 것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조금 전 한솔이 육각패를 이용해 비밀통로를 여는 모습은 운영팀 전체를 경악케했다.

“와, 지금 뭘 한 거야?”

“처음 가는 던전에서 비밀통로를 열었다고?”

“헉!”

니콜라이는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운영팀이라고 던전의 주요 기믹을 전부 꿰고 있진 않다.

자신도 모르는 걸 대체 어떻게 가르쳐준단 말인가.

문제는 이런 상황에 자신이 또 한 번 의심받게 될 거란 점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알을 굴리니 팀장이 살벌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이번 자색궁전은 개척 진도를 늦추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정한 던전이며 다각도로 분석해 배치를 정했다.

유저들이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통곡의 벽 역할을 할 수문장인 셈이다.

띠링.

팀장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왔다.

-몬스터도 소용없고, 트랩도 안 되고, 이 안에 배신자가 있다는 게 내 결론이다.

메시지를 확인한 니콜라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팀장을 바라봤다.

‘저 아닙니다!’

*

누군가 간절히 던전 클리어 실패를 바라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체 사막의 전투는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스카라는 보기 드문 인간형 보스.

모래를 갑옷처럼 두르고 질주하는 황제의 몸놀림은 호랑이처럼 날랬다.

바위처럼 단단한 창을 휘두르자 탱커들이 비명을 지르며 공중을 날았다.

외형은 인간인데 힘은 거대한 괴수 뺨쳤다.

그나마 탱커는 방패를 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는데 딜러진은 사정이 훨씬 안 좋았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잡으라고?’

존은 대검을 들고 스카라의 뒤를 잡으려다 솟아오르는 모래기둥에 맞고 풀썩 쓰러졌다.

순간 턱을 가격당해 몸이 굳고 만 것이다.

존이 비록 엔트리에 자주 나오진 못하지만 엄연히 S.솔리드 선수, 이런 존이 미처 반응도 못하고 쓰러질 정도의 공격을 일반 길드원들이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스물두 명이던 전투 인원이 순식간에 열 명으로 줄었다.

채린이와 힐러 둘을 제외하면 전원 S.솔리드 선수들이었다.

“미친놈이야.”

“이 와중에 우릴 가지고 놀아?”

제리는 이런 괴물은 처음 본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표정들이 볼만하군. 이제 재롱은 다 끝났나?”

왕국을 지배하는 황제의 얼굴엔 오만함이 가득했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동료들 중 아직 던전에서 이탈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지금 녀석은 우릴 가지고 놀고 있었다.

딱 죽진 않을 만큼 괴롭히면서 말이다.

던전 보스가 유저 상대로 농락을 하다니,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길드원들은 충격에 빠졌고 한솔은 다른 이유로 충격을 받았다.

‘이걸 깨라고 만들었어?’

자색궁전에 A급 던전중 상위 난이도를 가진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이렇게나 격차가 날 줄 알았다면 아무리 팔찌가 탐나도 도전하지 않았을 거다.

애초에 시간낭비를 하는 셈이니까.

심지어 중간보스 둘을 건너뛰고 돌입하지 않았던가.

대체 누가 밸런스를 맞췄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다.

“무릎을 꿇어라. 재롱이 제법 흥겨웠으니 자비를 구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노라.”

황제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던전보스에게 도발 당할줄은 상상도 못했던 길드원들은 착잡한 심정으로 한솔을 바라봤다.

보스의 남은 체력은 60퍼센트, 남은 인원은 열 명.

한솔은 가이아를 시작한 이래 이만큼 두뇌를 풀가동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집중해 승패를 계산했다.

‘많이 잡아줘야 3할이다.’

가망이 전혀 없으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을 것이다.

까짓거 AI한테 고개 한 번 숙이는 게 뭐 어려울까. 패널티를 피할 수 있다는데.

하지만 3할이면 해볼 만한 승부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도전할 때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를 잡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이미 스탯은 성장 한계치에다 이번 공략은 블랙이글스의 희생을 발판삼아 올라왔다.

이 정도면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좋아. 한 번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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