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쟁탈전 (1)
세상에.
남자가 건넨 스킬의 정체는 운룡비형(雲龍飛形)이었다.
구름을 노니는 용처럼 부드러운 무도가 전용의 전설급 보법이다.
그간 쭉 사용해온 부동보도 충분히 좋은 이동기지만 운룡비형하고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컸다.
무도가 전용 보법을 성능으로 줄 세우면 운룡비형은 최소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스킬이었다.
간단한 대화만으로 이런 물건을 받았단 사실에 나는 어느 정도 놀란 기색을 비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나의 반응에 상대도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저희 선물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런 선물을 싫어할 게이머가 있을까요. 귀한 물건을 받았으니 저도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신경 써 보겠습니다.”
헤르메스와의 만남을 마친 뒤, 곧바로 니콜라이에게 연락을 넣었다.
“어쩐 일로 먼저 전활 다 주시고···?”
평소엔 내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기에 용건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궁금한 게 생겨서요. 혹시 운영 관련해서 대규모 기사 준비하는 게 있나요?”
“기사요?”
“예를 들면 접속기 교체라든지···?”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말에 니콜라이가 꼴깍 숨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그, 그걸 어디서 들으셨죠?”
“글세요. 꿈에 가이아 산신령이 나와서 알려줬는데요. 아무튼 대답은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람에겐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윗선에서도 이번 일을 두고 거듭 고민중인 사안입니다. 시끄러워지면 여럿 목이 날아갈 겁니다.”
접속기 교체.
내가 실시간으로 겪었던 일인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일 중 하나다.
8월, 가이아는 전세계 서버를 대상으로 헤드기어형 접속기를 차단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공지 이후 고작 보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라 당시 유저들의 불만은 아주 무서울 정도였다.
유저 입장에서 운영진은 잘하고 있던 게임을 손에서 빼앗은 악마나 마찬가지였다.
가이아를 계속 하려면 전신접속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전신접속기의 가격은 보급형도 천만원을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비싸도 5~60만원 선이었던 헤드기어형 VR기기와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였다.
학생은 물론이고 직장인들도 선뜻 낼 수 없는 거금 아닌가.
그래도 한국은 상황이 좀 나은 편이었다.
기회라고 생각한 일부 PC방 사장님들이 부랴부랴 캡슐형 PC방으로 업그레이드에 나섰다.
덕분에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몇 되지도 않는 캡슐 PC방에 사람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떠들고 다닐만한 곳에 알릴 생각은 없거든요. 그보다 접속기를 좀 구할 수 있을까요?”
“각 팀에 기기가 열다섯 대나 있지 않습니까? 어디에 쓰시려고요?”
“아 숙소에서 쓸 게 아니라 따로 쓸까 해서요. 물론 값은 치르겠습니다.”
접속 패치를 단행한 이후 한동안 지오는 접속기 물량이 달려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렇게 비싼 접속기로 접속할 수 있는 게임을 누가 하겠냐고 욕하기 바빴던 유저들 의견과는 정반대로 세계 각지에서 구매 주문이 폭주한 것이다.
물량을 기한에 맞춰 받은 사람들은 공지가 뜨자마자 결단을 내린 큰손 사장님들 뿐이란 얘길 들었다.
지금 말해두면 물건을 받는 덴 문제없지 않을까 싶었다.
공짜로 달란 것도 아니고 돈을 내고 받겠다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 부탁도 아니고 유니크 선수 부탁인데 들어드려야죠. 그런데 몇 대나 필요하신지···? 이게 좀 고가라서요. 한 대당 1만 달러는 될 겁니다.”
“100대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예? 몇 대요?”
니콜라이는 깜짝 놀라 100대가 맞느냐고 재차 물었다.
100만 달러, 니콜라이에겐 엄청난 거액이었다.
물론 나한테도 큰돈인 건 맞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그 돈을 당장 마련할 수 있었다.
100만 달러에 건물 임대료, 인건비를 생각하면 제법 들어가겠는걸.
적잖은 액수지만 작년 시즌 우승 보너스로도 얼추 커버할 수 있는 범위였다.
수중에 있는 유동 자산을 현금화하면 더 큰 사업장을 갖추는 것도 가능하지만 한국 복귀 이후의 일이 어떻게 풀릴지 알 수 없어 일부는 꼭 쥐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난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업종 변경을 고민하는 다른 사장님들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되니까.
적어도 캡슐 PC방은 앞으로 5년 이상, 돈을 긁어모을 대박 아이템이었다.
*
헤르메스와의 미팅을 마치고 곧장 니콜라이에게 연락한 건 PC방 차릴 접속기를 구하기 위해서가 본론이 아니었다.
본 목적은 내가 알던 패치가 그대로 진행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번에 받은 헤르메스의 선물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스킬을 받을까 하는데 거짓 정보, 찌꺼기 정보를 알려줄 순 없지 않은가.
니콜라이의 대답으로 조만간 접속기 변경 패치가 있을 거란 사실은 확인했다.
이제 이 사실을 다시 헤르메스에게 알려줄 참이었다.
그들이 이걸 값진 정보로 여겨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프로 선수가 아니고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만 있다면 이걸로 돈을 벌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경매소에 아무렇게나 퍼져 있는 방한, 방열 장비 재료를 쓸어담기만 해도 얼마든지 돈을 불릴 수 있었다.
물론 서버의 물량을 의미 있는 정도로 확보하려면 많은 준비를 해야 하지만.
굳이 말이 나올 수 있는 작업을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
이익을 취하는 건 미리 사둔 작년에 사둔 스킬로도 충분하니 이 정보를 헤르메스에게 넘겨주고 뭔가 받으면 그걸로도 충분히 좋은 거래였다.
일단은 새 스킬을 받았으니 시험을 해봐야 했다.
선수들은 새로운 스킬을 얻으면 실전을 대비해 미리 연습하고 준비하는 작업을 거친다.
운룡비형은 나도 선수 시절에 상대를 해봤을 뿐, 무도가 스킬이라 당연히 써본 적은 없었다.
숙달되려면 어느 정도 연습은 필요했다.
“그래서 어떤 거 같아?”
“알면서 물어봐? 안 그래도 무서운 놈이 더 무서워졌지.”
내 질문에 제리는 내심 부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스킬을 쓰자 흰 구름이 퍼지며 운룡이 된 듯 지면 위를 미끄러져 나간다.
분명 부드러운 움직임이지만 그 속도가 무척 빨라 제리의 마법은 몇 번이나 코앞에서 빗나가고 말았다.
“이거 완전 미친 스킬이네!”
전설급 보법 중 최고 속도는 이보다 빠른 게 있긴 하나 발동 속도, 마력 소모비로 볼 때 운룡비형도 만만찮았다.
밸런스가 아주 탁월하면서도 강력한 스킬이었다.
“내일부터 써도 문제 없겠는데? 아마 넋이 나갈걸?”
“아니. 당분간은 봉인할 거야.”
“아껴두려고?”
한 시간쯤 연습했더니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은 잡혔다.
하지만 내 눈에 차는 완성도는 전혀 아니었다.
프로라면 대충 익힌 기술을 쓰는 건 금물, 실전에서 쓸 기술이라면 최소한 손에 익을 정도는 돼야 했다.
운룡비형을 완전히 익힌 뒤 적절한 순간에 펼친다면 눈에 익지 않은 상대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비장의 무기가 되는 셈이다.
“교대합시다. 교대!”
연습을 구경하고 있던 제레미가 냉큼 올라와 제리와 바톤을 터치했다.
내 주먹이 제법 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둘은 틈만 나면 나를 붙잡고 대련을 요청했다.
대련 과정에서 느끼는 격통이 살벌한 건 사실이지만 팬들 앞에서 지는 것보단 낫다는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물론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연습이 아무리 힘들어도 수만 관중 앞에서 패배를 하는 것보단 덜 아픈 법이다.
연습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은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게 내 철학이었다.
재능있는 친구들 틈새에서 나 역시 그렇게 1군 자리를 지켜내지 않았던가.
지친 제리를 대신해 제레미와 한바탕 연습을 한 뒤엔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연습을 했다.
아무리 내가 날고 기어도 상위급 선수 둘을 상대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다른 선수도 아니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선수들이었으니까.
둘의 합격에 난 바닥을 대차게 굴러야 했다.
“독한 놈들.”
하루 종일 연습하는 우릴 보며 데니스가 중얼거릴 때 코치가 다가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낮고 스산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너.도.가.서.해.”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이번 시즌 체감 속도는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느껴졌다.
노력하면 반드시 돌려받는다고 우리 팀 승률은 미묘한 상승을 이뤘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승률은 미묘한 상승이라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여기엔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바로 나의 참여 여부였다.
시즌 초반과 달리 최근 엔트리는 내가 빠지는 날이 있어 그 점을 고려해야 했다.
1승 카드, 그 이상의 필승카드인 내가 빠졌음에도 승률을 끌어올렸다는 게 중요했다.
S.솔리드가 다양한 선수를 기용하며 좋은 성적을 내는데 성공하자 관중들도 우리의 노력을 알아줬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팀원들은 이런 흐름에 대해 내 눈치를 보기도 했지만 난 진심으로 이번 변화를 환영했다.
팀이 계속 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올해 일정이 모두 끝났을 때, 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였다.
다행스럽게도 팀의 분위기는 작년 결승 때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상태였다.
7월에 접어들자 지오에선 내가 알던 과거보다 좀 더 빠르게, 헤드기어형 간이 접속기가 차단될 것임을 공지로 알렸다.
유저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현재 가이아의 성장 속도는 전생과 비교해 거의 2배에 가까운 수준.
그만큼 유저도 훨씬 많이 늘었기에 접속 차단의 반동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새기들 돈독 올라가지고!
-ㅁㅊ 짓거리만 하네.
-전용 접속기 팔아먹으려는 개수작 아냐.
-싸면 말도 안하지. 접속기 하나에 만 달러? 심지어 접속기로 할 수 있는 게임이 가이아 말고 또 있나?
-부자만 할 수 있는 게임으로 노선 갈아타겠단거네 ㅋㅋㅋㅋ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이렇게 죽이나?
-접속 끊기는 날까지 내가 어떻게 하나 두고 봐!
운영측은 각 대륙에 캡슐룸을 설치하겠다고 나섰지만 성난 분위기가 쉽게 가라앉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유료 매출이 토막난 건 물론이고 환불을 요구하는 문의로 고객센터는 연일 몸살을 앓았다.
반응이 심상찮자 운영측도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나는 이 싸움의 승자가 결국 지오가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기에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형. 이제 우린 어떻게 해요?
내년을 위해 담금질에 여념이 없는 민준이에게서 걱정이 담긴 문자가 날아왔다.
프로를 제외하면 가이아 그 어느 누구도 접속 차단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국은 캡슐룸이 많이 들어선다곤 하나 초기엔 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그 어떤 소식도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은 시기였다.
-한국은 인프라가 좋아서 캡슐PC방 많이 생길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물론 너랑 형을 PC방 보낼 건 아니고.
-그럼요?
-체육관 근처에 연습실 하나 마련해서 접속기 들여놓을 거야.
-진짜요? 그거 엄청 비싸다던데.
민준이에겐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세계 최고의 팀을 만들겠다는데 이 정도 투자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확실하게 준비해서 내년에 게임 시작해야지. 근데 너 부모님에게 확실히 허락은 받은 거야?
-아직은요. 계속 반대를 하시네요.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부모님 세대에게 프로게이머의 인식은 썩 탐탁찮은 존재였다.
특히나 그게 자식 직업이 된다면 더더욱.
게다가 민준이는 이미 체육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중이었으니 반대를 하실 만 했다.
다만 전생에도 민준이는 프로게이머였다.
그것도 한국 최고의 마도사라 불리는 초일류 프로게이머.
겨울에 찾아뵙고 자세한 계획을 말씀드리면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그거 말고도 문제가 또 있거든.
-뭔데요?
-너랑 나, 그리고 정수 형까지. 내년에 1군 리그에서 못 뛸 수도 있어.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아직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이미 내 머릿속엔 최고의 선수로 성장할 유망주 리스트가 있었다.
내가 북미에서 올린 성적을 생각하면 전 세계 어느 팀이건 S.솔리드와 같은 조건으로 입단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할 선수를 모두 데리고 같은 조건으로 입단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가령 원라이프 같은 팀은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주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형만 믿고 따라가는 건데 1군 무대를 못 뛰면 우린 어떻게 해요? 라는 말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민준인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그럼 내년엔 경기를 아예 안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열심히 연습했는데 게임은 해야지. 내년엔 아마 우리 모두 한 팀에서 할 수 있는 2부 리그에서 시작할 확률이 높아.
-저는 상관없어요.
-정말로?
-형이랑 함께 경기하다 보면 금방 승격하겠죠. 복싱도 실력 있으면 금방 치고 올라가거든요.
민준이 실력이면 당장 국내의 어느 팀을 가서 테스트를 보든 충분히 자리를 따낼 인재였다.
좋은 실력을 놔두고 1년을 허비하는 셈인데 대수롭지 않게 따르겠다고 해서 참 고마운 맘이 들었다.
-정수 형은 이래서 내년에 데뷔할 수 있겠냐고 마음 졸이던데 잘됐네요 ㅋㅋㅋㅋ
한국 리그의 수준이 높은 나머지 최근 자신감이 좀 부족해진 모양이었다.
상위 팀을 제외하면 오히려 한국이 북미보다 수준이 높을 정도였다.
-형한텐 말하지 마. 괜히 1년 더 준비시간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늘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올해 겨울부턴 나도 같이 연습할 수 있으니까. 금방 더 좋아질 거야.
-겨울이라고 하니까 얼마 안 남았네요.
11월에 치러질 월드챔피언십까지 고려해도 남은 일정은 고작 다섯 달.
그야말로 눈 깜짝하면 지날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