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67화 (67/170)

사람이면 당연합니다 (1)

경기 잘 봤다며 승리 축하한다는 해링턴 대표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에 더불어 팀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시즌 중엔 거의 매일 경기가 있어 밤에 과식은 자제하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다들 배를 채울 기세로 열심히 야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근데 왜 아무 기사가 안 올라오지?”

“설마 한입 가지고 두말하진 않겠지?”

주방장이 만든 피자를 물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던 제리와 케빈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타우러스 소식이었다.

오늘 매치는 가이아 커뮤니티 온갖 곳에서 관심을 가진 빅매치 아니던가.

은퇴의사를 밝혔다면 바로 기사가 올라올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이 프로를 관둔단 이야긴 보이지 않았다.

“내일 올라오려나 보다.”

그리 말하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제레미가 타우러스의 새로운 기사를 찾아냈다.

기사엔 대문짝만하게 ‘타우러스 은퇴 생각 없어.’ 라고 박혀 있었기에 기사를 본 팀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험한 소릴 입에 담았다.

“뭐 이딴 녀석이 다있냐?”

우리보다 은퇴 소식을 더 기다렸던 기자 한 명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직접 블랙이글스 숙소까지 찾아갔던 모양이다.

기사를 통해 타우러스는 이번에 진 건 순전히 장비 탓일 뿐, 실력으론 제리를 압도했단 소릴 늘어놨다.

이게 뭔 개소리야?

아니나다를까 기사 댓글란은 이미 수류탄을 까기라도 한 듯 엉망이었고 커뮤니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 이게 사람이야. x새끼야?

-실력도 없는 게 졸렬하기까지?

-장비 구할 실력이 없어서 파밍 못한 거 아님? 누가 들으면 장비도 랜덤박스로 까는 줄 알겠네.

-진짜 독보적인 쓰레기 캐릭터 ㅋㅋㅋ

-참신해서 웃겨버리자너 ㅋㅋㅋ

어지간하면 블랙이글스 팬층이 나서 실드를 쳤을 텐데 이번엔 무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타우러스를 패기 시작한 유저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가루가 되도록 게시판을 불태웠다.

만약 녀석이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면 아마 멘탈이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

모두가 잠든 시각.

정확히 말하면 팀원들만 잠든 시간이다.

아직 숙소 1층엔 깨어 있는 인원이 많았고 대부분은 전력분석팀 인원이었다.

대표가 비싼 돈을 들여가며 구축한 분석 팀은 이제 완전히 일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프로게이머나 스포츠 선수나 분석 대상으론 비슷한 편이었다.

“왜 내려왔어?”

선수라면 다들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자는 걸 알고 있으니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 체력은 하루 네 시간만 자도 아무 지장이 없음을 이미 일 년간의 경험으로 습득했다.

그보다 덜자는 건 코치 눈치가 보여서 해보질 못했지만.

아마 상관없지 않을까?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오늘 작업 다 끝나면 따로 해외 리그도 분석해 주시나요?”

현재 리그가 돌아가고 있는 곳은 북미, 유럽, 중국, 한국까지 총 네 곳.

당연히 분석팀 입장에선 팀이 속한 리그 분석에 가장 중점을 둔다.

해외 팀의 선도 메타를 분석하고 세계대회에 대비하는 건 중요한 작업 중 하나지만 일단은 시즌 우승부터 챙겨야 하니 말이다.

“물론이지. 한국 경기가 궁금해서 왔구나? 우리도 일단 보긴 했는데···네가 직접 보는 게 설명하는 것보다 낫겠다.”

시차 관계상 한국은 같은 일정이라고 해도 이쪽 개막전이 끝나기 전에 경기를 마친 상태.

대체 어떤 경기를 펼쳤을지 매우 궁금했기에 난 태블릿에 담긴 자료를 재생했다.

열 개 팀 중 가장 먼저 찾아본 건 원라이프의 경기였다.

전생보다 일찍 백은하가 코치로 합류하고 더원을 비롯한 실력파 선수로 구성된 막강한 팀, 아마 월드 챔피언십을 시작하면 S.솔리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상대였다.

멤버 구성도 굉장히 좋았다.

더원을 시작으로 루나틱, 조커, 카이사르까지.

내 기억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한국 상위 레벨 선수들이 원라이프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런 원라이프의 개막전 상대는 VT스타즈.

VT스타즈도 강팀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개막전에선 백은하가 지휘하는 원라이프가 이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결과는 정반대였다.

내 기억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선수 한 명이 더원을 박살 낸 결과였다.

이세준.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무도가.

나이가 들어 피지컬의 자연스러운 하락을 겪기 전까지 그는 한국 최상위 톱플레이어였다.

더원 역시 최상위 선수인 건 분명하지만 이번 경기에선 상성의 힘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거 생각보다 위험한 거 아냐?

올해 내 목표는 북미 리그 우승을 넘어선 월드 챔피언십 우승, 하지만 월드 챔피언십은 나만 잘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팀원이 받쳐주고 5라운드에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어야 우승에 도전할 자격이 생긴다.

이세준의 실력은 이미 제레미와 대등한 수준으로 보였다.

그가 북미 서버부터 게임을 즐겼는진 모르겠으나 한국 서버 가동 이후 게임을 시작했다면 엄청난 성장력이었다.

월드 챔피언십 개최까진 아직도 반년 정도가 남았다.

이세준을 비롯한 한국 상위 레벨 선수의 실력은 더 오를 게 예정된 상황, 나 빼고 세 명이 꺾이는 그림이 슬그머니 그려졌다.

그렇겐 안 되지.

이미 자는 애들을 다시 깨워 훈련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홀로 게임에 접속해 플레이를 가다듬었다.

*

한국 경기를 보고 경각심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로부터 한국 유저들은 프로리그가 존재하는 대형 게임 상당수에서 강세를 보여왔다.

인구수를 생각하면 기이할 정도의 전투력인 셈이다.

최근엔 그 격차가 많이 좁혀지긴 했어도 여전히 게이머라면 관심을 두는 나라.

북미 수백만 가이아 유저 중 골수층이라 불릴만한 유저들은 자국리그 뿐만 아니라 해외리그도 두루 섭렵하는 친구들이다.

그런 친구들은 어제 경기를 평가하며 게시판에 해외 팀의 강력함을 전파하고 나섰다.

-세계대회가 열리면 북미가 우승 못할 수도 있음 ㄹㅇ루

-아침부터 약 먹었어?

-아니 진짜라니까. 한국 경기 보고 왔는데 실력이 대단해!

한국이란 소리에 지나가던 유저들이 관심을 보였다.

지금은 가이아의 전성시대가 열렸지만 그 전까진 AOS류 게임이 시장을 꽉 잡고 있었다.

거기서 한국은 세계대회 우승을 수 차례나 차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한국 최강설에 동조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을 텐데 이번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그래도 이번엔 안 되지. 북미엔 S.솔리드가 있으니까!

-고럼고럼.

어우솔.

어차피 우승은 솔리드의 줄임말.

e스포츠 역사를 통틀어봐도 우리처럼 압도적인 승률을 보인 팀은 거의 없었다.

전승 우승? 90경기 해보면 얘기가 달라질걸?

그만큼 S.솔리드의 전투력은 현재 압도적이었다.

오죽하면 타 팀을 응원하는 팬들도 결국 올해 우승은 S.솔리드가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다.

-솔직히 유니크는 독보적인 괴물이라 빼두자. 근데 다른 선수도 승을 챙길 수 있을까?

그리고 뒤를 이어 한국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들.

이제 막 개막한 리그 수준이 북미보다 높겠어? 하고 영상을 지켜본 유저들은 생각보다 높은 경기력에 깜짝 놀랐다.

게임을 보는 눈엔 큰 차이가 없다.

마스터나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고 해도 이 사람이 잘하는 지 못하는 지는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두 캐릭터가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싸우는데 어느 쪽은 더 빠르고 강하게 데미지를 넣는다.

가이아의 인기가 빠르게 치솟는 이유.

게임을 모르는 어르신들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인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세준 경기 봤음? 더원을 상대로 상당한 우위를 가져가는 실력자임. 이제 더 이상 북미는 최고의 리그가 아닐지도 몰라.

-가이아도 세계대회 곧 열겠지?

-빠르면 올해 말 아닐까.

-오호라. 생각보다 잘하네?

-저게 고작 생각보다 잘한다고 말할 수준인 거 같음? 그러니까 님이 실버인 거임.

-갑자기?

-그래서 님들 티어가?

-다이아.

-입만 열면···!

오전, 두 시간 만에 한국 팀이 강하다는 소문이 바닥에 쫙 깔렸다.

같은 시간에 중국에서도 리그가 있었는데 유독 한국 경기의 주목도가 컸다.

정수형의 훈련을 돕고 있는 민준이도 뭔가 느끼는 게 있었는지 게임을 더 잘하는 방법이 없냐고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게임을 잘하는 방법? 타고난 재능. 그리고 노력이지.

-아···.

-진짜야.

뻔한 얘기지만 사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이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있고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노력하지 않으면 밟히는 게 프로의 세계다.

메시지로 답장을 하던 중 나는 격동하는 흐름을 어렴풋이 느꼈다.

가이아를 둘러싼 거대한 흐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 복이 될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내가 모르는 흐름이 일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

개막전 이후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변화의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오기 시작했다.

가이아에서 오랜만에 밸런스 패치를 감행했다.

백색 > 청색 > 적색 > 백색의 상성 관계를 원하는 운영진의 입김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간 무대에서 소외받던 직업군인 백색계열을 위한 버프로 클래스 방어값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올라갔다.

방어력이 더 튼튼해진 관계로 암살계의 공격에 좀 더 잘 버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내가 봐도 상당히 합리적인 패치였다.

프로 무대에서도 암살계의 독주가 심한 편이라 견제할 수단이 필요했던 찰나다.

문제는 이 패치로 우리 팀이 물을 먹었다는 점이다.

스코어 1:3 패.

나를 엔트리에 포함시키고도 S.솔리드가 처음으로 패배를 했다.

상대는 레드불스, 경기 내용은 전부 한끗 차 승부였지만 결과가 패배라는 게 중요했다.

-비프로스트 미친 재능충;;

-갓드불스!!

우리 팀이 경기에서 지던 날, 포털 e스포츠 게시판엔 환하게 웃는 레드불스 선수들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렸고 실시간 검색어에 S.솔리드 패배가 오르락거렸다.

선수와 관중 모두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번 승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선수는 비프로스트였다.

그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클래스 체인지를 했다.

5라운드 전용 취급을 받던 실드나이트에서 아크나이트로 갈아탄 선택이 이번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거기에 이번 패치까지 맞물려 제레미가 침몰, 제리까지 웨폰마스터에게 덜미를 잡히니 당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 되고 말았다.

-아. 그냥 유니크 4목숨 주면 안됨?

-그랬으면 S.솔리드가 무적이지 ㅋㅋ

-지니까 빡쳐서 그래.

-우린 그런 기분을 매일 맛봤다!

-이제 니들도 한 번 당해봐! ㅋㅋㅋ

이 와중에 브라이언 코치는 예고했던 대로 새로 들어온 팀원들, 그리고 그간 기회를 받지 못했던 선수를 대거 엔트리에 올려 로테이션을 돌렸다.

기존의 멤버 구성을 바꾼다고 해서 게임을 꼭 지는건 아니지만 확실히 풀라운드 접전을 치르는 횟수가 늘어났다.

S.솔리드 팀 게시판에 상주하는 팬들은 관계진이 정신 나간거 아니냔 소리가 연일 올라왔다.

-대체 왜 저러는 건데?

-새 선수들 기회주려고 그러나 봐.

-프로는 성적으로 말하는 거지. 경험치 키워주는 곳인 줄아나. 아~놔.

-워워 다들 진정해. 그동안 S.솔리드가 너무 정점이라 그렇지. 슬슬 내리막길 한 번 탈 때 됐지. ㅎㅎ

-어딜 첩자 새끼가 겨들어왔어!

-불난집에 부채질 하냐? 꺼져.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타 팀 팬들은 우르르 들고 일어나 S.솔리드의 패배를 연신 씹어댔다.

그렇게 딱 두 바퀴, 18게임을 돌렸을 때 우리 팀 성적은 15승 3패가 됐다.

승률 83퍼센트.

간혹 무패 우승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고 8할 승률만 해도 문제없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호성적이다.

근데 왜 분위기가 초상집이냐고.

유쾌함 빼면 시체인 제리마저 말수가 줄어들었다.

분위기가 축축 늘어지자 코치도 차마 로테이션에 여유를 두잔 얘길 꺼내지 못했다.

경험치를 먹고 경기력이 오르는 게 눈에 보였던 존 같은 친구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찾으셨어요?”

테라스에 썬베드 하나 놓고 일광욕과 동시에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내게 코치가 다가와 하소연을 시작했다.

애들 멘탈이 많이 흔들렸다.

감독님이 줄담배를 피운다. 이거 어쩌면 좋냐 등의 내용이었다.

“한솔이 넌 아무렇지 않니?”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죠.”

“왜?”

“당연하잖아요. 프로끼리 게임을 하는데 이기고 지는 건 당연하죠. 8할이면 아주 잘하고 있는거예요.”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감독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나 봐. 요즘 알게 모르게 압박이 심하다.”

원래 코치직은 샌드위치다.

선수와 감독 사이에서 조율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 팀에 트러블이 왕창 터진다.

“혹시···대표님은 별 말 없었어?”

“글쎄요. 저한텐 연락 없으셨는 데요.”

문득 해링턴 대표도 지금의 성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지 궁금하긴 했다.

“입 싹 닫고 가만히 겜하는 그 개자식 보세요. 얼마나 멘탈이 좋습니까.”

“개자식? 아.”

우리 팀에 개자식이라고 불리는 선수는 딱 한 명밖에 없다. 타우러스다.

평생 들을 욕은 다 들었을 텐데 꿋꿋하게 경기에 나와 입을 놀리는 걸 보면 진짜 멘탈 하나는 타고난 놈이다.

“하.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생각해보니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코치에게 슬쩍 운을 띄웠더니 번개처럼 다가와 내게 귀를 기울인다.

대체 그 수가 무엇인지 기대하는 코치에게 난 건조하게 답했다.

“제가 게임에서 지면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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