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66화 (66/170)

다시 돌아온 개막전 (4)

유구의 천칭, 랭크 매치에서 사용되는 맵 중 가장 아름다운 맵 선호조사 1위를 달성한 맵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하늘의 공중 광장.

바닥은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케 하는 오색 벽돌에 광장 외곽으론 유유히 흐르는 양떼구름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전신접속기로 바뀐 이후 더 실감 나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됐지만 애석하게도 경기장 위의 두 마법사는 풍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글거리는 화염과 파직 거리는 뇌전이 양쪽을 오가며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제리는 몸을 비틀며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다.

다들 제리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공격의 날카로움은 타우러스가 미묘한 차이로 우위를 점하는 그림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실력이 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순 없었다.

명색이 북미 최상급 아크위자드로 불리는 제리다.

설마 실력이 이 정도일 줄 몰랐던 코치와 팀원들은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반짝 활약했던 더원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 당분간 북미엔 제리를 능가할 마법 딜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타우러스가 새로운 암초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물론 제리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날카로움은 떨어져도 공격의 화력 자체는 이쪽이 한 수 위였다.

지팡이 주변으로 밝은 빛고리를 띄운 제리가 화계 마법을 연사하자 광장 위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광채의 스피카로드.

마법의 캐스팅 시간을 30퍼센트나 단축시키는 A급 레어 아이템이다.

여기에 공헌도 부여 작업을 마치니 자그마치 40퍼센트라는 대단한 옵션이 만들어졌다.

정면 화력 대결로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최상위 장비.

정교함과 순수화력, 어느 쪽이 이기느냐의 승부였다.

“타우러스 선수! 거리를 좁히고 달라붙습니다!”

-저자식 왜 달라붙는거야?

-여기서 근접전을 한다고?

-마법사가?

마법 클래스는 대부분 근접전을 싫어한다.

주문을 외워야 하는데 근접 거리에선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캐스팅 중에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하면 집중력이 무너져 마법이 실패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상대가 달려들면 거리를 벌리기 바쁜 직업이 오히려 거리를 좁힌다?

어지간히 근접전에 자신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이다.

암살자처럼 거리를 좁힌 타우러스가 간발의 차로 마법을 피하더니 날카로운 어퍼컷을 시도했다.

누가보면 마법사가 아니라 무도가라 해도 믿을 깨끗한 펀치였다.

격투기를 상당히 오래 단련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건방진 소리를 하고 다닐만한 실력인 건 확실했다.

아마 상대가 그랜드마스터 레벨, 아니 웬만한 프로 선수라도 깔끔하게 들어갈 만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이 정도론 어림없다. 이 자식아!’

제리의 얼굴은 꼭 그리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S.솔리드에 들어온 이후 나와 가장 많은 연습 시합을 가진 사람이 제리다.

제레미나 존도 만만찮게 연습벌레지만 작년부터 쌓아올린 횟수를 따지면 1등이 확실했다.

타우러스의 근접 공격이 수준급이라곤 하나 무도가 클래스를 기반으로 하는 나의 속도를 따라오진 못한다.

이미 일 년 넘게 내 속도에 익숙해진 제리가 이 정도에 당할 리 없단 뜻이다.

두 마법사가 뿜어내는 공격이 근거리에서 터지기 시작하자 위력이 더욱 거세진다.

문제는 이렇게 거리가 가까우면 본인도 피해를 고스란히 입는다는 점에 있다.

제리와 타우러스 모두 얼굴이 일그러진다.

뜨거운 불을 앞에 두고 싸워야 하니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타우러스도 열기에서 오는 고통은 버티기 힘들었는지 추가 버프를 걸고 나섰다.

백색 날개를 두르고 버티는 녀석에게 제리가 검은 창을 냅다 꽂았다.

아크위자드의 전략은 디버프, 논타겟 스킬이라 거리가 멀면 맞추기가 힘들 텐데 서로 근접전을 펼치는 중이지 않은가.

어깨에 검은 창을 관통당한 타우러스가 억하는 신음을 흘렸다.

고통을 심어 신체를 움츠러들게 하는 스킬임을 깨달은 녀석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드래곤 브레스!”

어느 한쪽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 제리가 재빨리 양손을 모아 거대한 화염을 뿜어냈다.

시동어 없이 스킬 쓰는 연습을 꾸준히 했음에도 다급해지니 예전 버릇이 나왔다.

시동어를 외치며 스킬을 사용하는 건 톱클래스 프로게이머가 되려면 무조건 고쳐야 하는 습관이다.

그래도 최악의 판단으로 이어지진 않을 거로 생각했다.

바로 코앞에서 터지는 집채만 한 불덩이는 아무리 몸놀림이 좋아도 피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나를 비롯한 관중 모두가 생각을 고쳐야 했다.

타우러스의 몸이 쉭하니 사라지더니 제리의 등 뒤에 나타난 것이다.

블링크를 구했어?

블링크, 짧은 거리를 원하는 방향으로 순간 이동하는 적색계열 최상위 회피기.

스킬 티어는 암살계 정점으로 꼽히는 그림자 발자국과 동급이다.

저런 스킬이 마켓에 떴으면 모를 리 없었을 터, 독자적인 루트로 손에 넣은 게 분명했다.

눈앞에서 상대가 사라져 제리가 당황한 사이, 타우러스의 손이 바삐 움직여 백색 구슬 수십 개를 쏘아냈다.

콰르릉-!

피해. 피할 수 있어.

나는 뒤를 잡힌 제리를 보며 속으로 마법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지금껏 프로 무대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스킬이라 당황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갑작스레 적이 사라지거나 뒤를 잡히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림자발자국, 이형환위를 고속으로 전개하며 시야 사각에서 들어오는 나의 공격을 제리는 이미 수백, 수천 번 이상 경험했다.

스킬만 다를 뿐 결국 연습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제리의 몸이 스프링처럼 튀더니 뒤에서 쏟아져 나온 백색 구슬을 방어했다.

숫자가 많아 완벽히 막아내지 못했지만 체력 바가 0이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체력 게이지는 24퍼센트 대 49퍼센트.

제리를 응원하는 팬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을 계속했다.

-저런 거지 같은 새끼한테 지면 안 된다!

-내일은 져도 되니까 타우러스는 밟아줘. 제발.

S.솔리드 팬이라면 오전의 인터뷰로 다들 열이 받은 상태.

일방적인 야유를 퍼붓는 가운데 두 명의 선수가 동시에 스킬을 발동했다.

“둠비전!”

“파이어 웨이브!”

캐스팅 속도는 확실히 제리쪽이 빨랐다.

둠비전으로 타우러스의 시야를 완전히 암흑으로 만든 제리는 포악스럽게 다가오는 불길을 피해 지면을 굴렀다.

둠비전은 시야를 가릴 뿐 채널링 스킬을 중단하는 기능이 없다.

파이어 웨이브에 맞으면 남은 체력이 고스란히 탈 판이었다.

이글거리는 열기와 함께 불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이 더 줄어들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합은 체력 바가 완전히 꺼지기 전까진 승부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시야를 뺏긴 타우러스는 소리만 듣고 마법을 피하느라 체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다시 쿨타임이 돌아온 드래곤 브레스를 제리가 재차 발동했다.

이번엔 시동어 실수를 하지 않은 묵음이었다.

“젠장.”

화르륵 하고 무언가 날아드는 불길한 소리.

여전히 시야가 어둠에 먹혀 돌아오지 않은 상황 속에 타우러스는 감으로 마법을 쐈다.

넓은 지역을 커버하는 벼락의 파도가 일대를 덮쳤다.

블링크가 없는 제리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스킬이었다.

“동시에! 마법이 터졌습니다!”

“오랜만에 나온 더블 KO 상황이군요.”

가이아에선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마지막 스킬로 서로 체력바가 동시에 터진 것이다.

평소라면 즉시 WIN 과 LOSE를 표시하던 전광판이 침묵하자 관중들이 술렁였다.

-뭐야 이거. 무승부야?

-ㄹㅇ 무승부?

-멍청이들아. 가이아는 무승부 없어.

-와. 아깝네.

-그래도 체력 완전 밀리고 있었는데 선방했다.

차단막이 내려가고 관중들의 웅성거림을 듣는 가운데 제리는 초조한 기색으로 전광판을 지켜봤다.

가이아엔 무승부가 없다.

만약 동시에 체력바가 터진다면 어느쪽이 더 데미지를 많이 넣었는가로 최종 승자를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잠시 뒤, 제리와 타우러스의 얼굴이 올라오더니 바로 아래 데미지 점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S.솔리드의 승리를 바라는 대다수 팬들이 눈을 부릅뜨고 전광판을 지켜보고 있을 때,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마이클이 물었다.

“왜 그렇게 여유로워?”

“어차피 제리가 이겼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고갯짓으로 케빈의 물음을 대신 해소했다.

“내 말 맞지?”

-와아아!

-정.의.구.현!

-그지같은 새끼 꼴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개막전에서 은퇴하는 선수가 있다?

-개웃기네 ㅋㅋㅋㅋ

승점 1점이 또 한 번 S.솔리드에게 들어왔다.

제리의 데미지가 확실하게 타우러스를 압도해 승리를 챙기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큰 데미지 격차였다.

둘의 클래스는 똑같은 아크위자드.

블링크라는 변수가 있긴 했지만 제리는 최선을 다해 대응해냈다.

데미지 결과가 뜨기 전에 제리의 승리를 예측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북미 최고의 개척도를 자랑하며 공헌도를 쓸어담은 건 바로 S.솔리드다.

각종 부여 작업을 통해 스킬과 스탯을 연마할 수 있는 강화 작업, 그리고 남들은 아직 밟지 못한 최신 던전을 격파하며 레어 장비를 시즌 개막 전에 맞춰냈다.

같은 스킬이라도 장비가 우월하다면 위력의 차이가 생긴다.

더블 KO가 된 시점에서 제리의 승리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잘했어!”

“잘했다!”

“살살 때려. 이 자식들아!”

경기를 마치고 들어오는 제리를 거칠게 환영하는 우리 팀과 대조적으로 블랙이글스 분위기는 한바탕 폭우라도 쓸고 지나간 것처럼 어두웠다.

“씨이발!”

벤치로 들어가던 타우러스는 괜히 벽을 치며 애먼 분풀이를 했다.

그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으니 당분간 굴욕 영상으로 나돌 게 분명했다.

아. 어차피 은퇴할 테니까 상관없나?

“얘들아! 아직 게임 안 끝났다! 조금만 더 집중하자!”

코치 얼굴을 보니 그도 화가 상당히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코치의 역할은 게임이 끝날 때까지 선수들을 다잡는 역할도 포함이다.

“코치님 이제 저 나가는 거 맞죠?”

혹시나 엔트리가 바뀔까 봐 걱정됐는지 제레미가 다시 한 번 출전에 대해 물었다.

현재 스코어 2:0.

한 번만 더 지면 셧아웃당하는 상태에 몰린 블랙이글스는 사이클론을 뒤로 뺄 여유가 없었다.

3세트는 반드시 사이클론이 나올 확률이 99퍼센트 이상이었다.

만약 맹목적 승리를 노린다면 여기서 마이클을 내보내고 4라운드로 제레미를 보내야 했다.

마이클이 어디가서 두드려 맞기만 하는 동네북 선수는 아니지만 사이클론에 비하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고 상성으로도 암살계에게 불리했다.

반면 제레미의 경우 사이클론을 제외하면 딱히 블랙이글스에서 적수가 없는 상황.

3라운드를 지더라도 제레미를 뒤로 빼면 4라운드를 높은 확률로 거의 가져오는 그림이 된다.

하지만 코치는 오늘 정면대결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길 자신 있지?”

“옙.”

“그럼 제대로 한 번 해봐.”

코치는 제레미를 보며 고갤 끄덕였다.

첫 번째 매치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오늘 경기는 여러모로 관심을 끄는 흥미진진한 매치업이었다.

첫 번째 경기는 내 공약의 성공 여부, 두 번째는 팀의 자존심을 건 한판이었다면 세 번째는 누가 진정한 2위인지를 겨루는 무대였다.

리그 최고의 자리를 견고히 지키고 있는 나,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암살계 2인자를 결정하는 매치인 것이다.

사이클론은 작년에 무단이탈 전까지 S.솔리드를 이끌었던 더블에이스.

나를 제외하면 딱히 적수가 없다고 불렸던 녀석이다.

그에 비해 제레미는 시즌 후반기에 급작스레 투입돼 실력을 증명한 새로운 강자.

신흥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이미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보태기까지 했다.

이미 여러 프로 선수가 분석방송, 스크림 등을 통해 제레미의 실력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했기에 이미 대다수 팬들은 사이클론보다 제레미의 실력을 더 윗줄에 두는 경향이 강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S.솔리드로 넘어왔기에 팬들은 제레미가 이길 거란 의견이 다수였다.

블랙이글스 팬들은 이미 찍소리도 못 내고 찌그러진 상태여서 채팅창에서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마 제레미 역시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만약 사이클론보다 자신의 실력이 높다고 생각했으면 굳이 붙게 해달라고 코치에게 다시 한 번 요청하진 않았을 거란 게 내 생각이었다.

시즌 초반, 블랙이글스와 철의 계곡에서 충돌했던 날.

사이클론은 제레미와 마이클의 협공을 상대하며 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제레미 역시 그때의 기억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였다.

“후-. 그럼 이기고 오겠습니다.”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제레미가 무대를 밟았다.

*

경기 스코어 3:1

4라운드까지 꽉 채웠지만 결국 블랙이글스는 연장전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유일한 1승은 사이클론이 제레미에게 거둔 승리였다.

3라운드는 3분을 꽉 채운 접전이었다.

무도가와 웨폰마스터의 대결, 무기를 이용하는 웨폰마스터가 더 긴 리치의 이점이 있지만 민첩함은 무도가 쪽이 다소 우위.

누가 더 정확하게 공수를 이뤄내는가의 승부였는데 시합 종료 7초를 남기고 제레미의 평정심이 깨지고 말았다.

3분을 꽉 채운 경험이 거의 없던 데다 체력이 약간 밀리는 상태에서 역전을 노리다 무너지고 만 것이다.

살짝 풀이 죽은 제레미를 위로하고 있을 때 MVP 인터뷰를 위해 제리를 호출하는 소리가 들렸다.

S.솔리드 경기에서 나 대신 다른 선수가 인터뷰하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수개월 만에 마이크를 잡은 제리는 살짝 미친 사람처럼 랩을 쏟아냈다.

그중 상당 부분은 블랙이글스와 타우러스에 관한 내용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인터뷰어가 제지를 할 법도 한데 오늘만큼은 별말 없었다.

관중들도 다들 유쾌한 반응으로 잘했다며 제리를 응원했다.

“아. 약속대로 은퇴하셔야 하는구나. 다시 못봐서 어쩌지이? 조금 섭섭하려 그러네. 크크크.”

-ㅋㅋㅋㅋㅋ 아.

-타우러스. 숙소에서 뒷목 잡고 사망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내려주세요.

-이 정도면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ㄹㅇ

-게임이 숩다 수어.

상대 팀이 미리 퇴장한 관계로 타우러스가 어떤 얼굴일지 보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쉬웠다.

-오늘도 개꿀 게임. ^^

-어.우.솔!

유료 관중석을 가득 채운 팬들의 축하를 받으며 S.솔리드의 2차 시즌 개막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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