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65화 (65/170)

다시 돌아온 개막전 (3)

가이아 커뮤니티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떡밥.

나와 타우러스의 개막전 은퇴 공약은 평소 재방송으로 경기를 챙겨보던 사람들까지 화면 앞으로 끌어올 정도의 힘을 발휘했다.

경기 입장 전, 이미 네 번째 팀 매치에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다는 이야기가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오늘 우리 팀의 경기는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 우리 경기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단 사실에 기뻐하는 상황.

이런 화끈한 도발은 언플이 패시브인 북미리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니 당연했다.

그러나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도 잠시, 1라운드 양 팀 선수가 공개되는 순간 경기장에 찬물이 대차게 쏟아졌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놈을 봤나.

[1라운드 - 잊혀진 사원]

[S.솔리드 무도가 vs 블랙이글스 실드나이트]

블랙이글스에서 나온 1라운드 상대는 타우러스가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은 순간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타우러스는 1라운드에서 나와 맞붙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무도가가 마법사에게 유리 상성인 건 놈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도발을 하길래 뭔가 한 수를 준비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1라운드 도발은 그냥 허세에 불과했다.

나와의 매칭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던 셈이다.

야유가 들리는 듯했다.

차단막이 발생해 관중의 소릴 들을 수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사람들도 나와 타우러스의 1라운드 매치를 기대했을 테니 말이다.

어찌 됐건 시합이 시작됐으니 경기에 집중해야 했다.

타우러스와 매치가 불발된 것과는 별개로 난 1분 내로 상대를 밟아버리겠단 공약을 내걸지 않았던가.

실드나이트로 날 막아보시겠다?

실드나이트. 압도적인 방어력을 지닌 수비형 클래스.

공격력이 상당히 부족해 개인 라운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클래스를 지금 꺼내는 이유는 명백했다.

어떻게든 1분만 버텨보자는 생각이다.

내가 아무리 공격력이 대단해도 실드나이트를 1분 내로 쓰러트릴 순 없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그마 상위권 대전을 참고해도 작년보다 경기 시간이 늘어난 상황, 수비에만 올인하는 실드나이트를 1분 내로 꺾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우러스가 나오지 않아 투덜거리던 관중들도 상황을 깨닫고선 다시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만약 1분에서 1초라도 넘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도 궁금한 상황 아닌가.

리그 개막전에서 은퇴할 추호도 없기에 나는 냉큼 부동보를 밟으며 뛰쳐나갔다.

육중한 은색 방패를 들어 올린 실드나이트가 매의 눈으로 내 움직임을 주시했다.

최근 장비 연마를 마무리한 상황이라 정면에서 두들기면 방패를 뚫고 데미지를 넣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굳이 방패를 때려가며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자세를 무너트릴 생각으로 상단에 교룡뇌조를 심으며 하단을 킥으로 후려쳤다.

워낙 빠른 연계라 보고 막긴 힘든 속도였는데 녀석이 용케 막았다.

내 발차기를 중검으로 가드한 것이다.

-와 저걸 막아?

-올해도 날먹 패턴으로 삼키나 했더니 안되겠네.

-벌써 13초 지났다 ㄷㄷ

-개막전에서 유니크 밑천 드러나 버리네 ㅋㅋㅋ

-헛소리는 집에 가서 해라.

작년 경험치를 먹고 성장해서인지 상하 원투 패턴만으로 상대를 꺾기 쉽지 않았다.

수평으로 휘둘러지는 중검을 자세를 바짝 낮춰 피함과 동시에 온 힘을 담아 열양지로 상대 발등을 찍었다.

바위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상대 표정이 일그러졌다.

발등을 바위로 찍은 느낌일 테니 말이다.

“실드 차징!”

아직도 입으로 스킬을 쓴다는 건 전신접속기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단 뜻이다.

스킬 시동어를 다 듣기도 전에 나의 몸이 기계처럼 반응해 이형환위를 발동했다.

몸을 둘로 나눠 잔상을 심는 전설급 회피 스킬, 평소엔 잘 쓰지 않지만 오늘은 나도 힘을 보여줄 참이었다.

용의 충격이 빈틈을 찌르고 들어가 쾅 소릴 내는 걸 시작으로 공방전의 포문이 열렸다.

*

“엄청난 연계입니다!”

“같은 스킬을 빠르게 사용하는 것보다 다른 스킬을 연계해서 들어가는 게 훨씬 딜레이가 적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스킬이 빠르면 쉽지 않을 텐데 유니크 선수, 정말 매끄럽게 연계를 해내네요.”

-님들 저게 눈에 들어옴?

-못 쫓아가겠다;;

-여기 모인 사람들중에 제대로 보는 사람 거의 없음;

고속의 공방전.

부동보, 이형환위, 그림자발자국을 총동원해 움직임을 극대화한 유니크의 손에서 연신 불꽃이 번쩍였다.

푸른색과 붉은색 불꽃이 번뜩일 때마다 실드나이트의 체력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심장 떨리네.

-숨셔 얘들아!

-은퇴는 안 된다!

시합이 시작된 지 어느덧 40초가 흐른 상황, 실드나이트의 체력은 이제 막 50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불과 20초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관중들 일부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들은 줌인을 당겨 유니크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보던 사람들이었다.

‘유니크 눈빛 뭐야.’

집중력을 발휘한 유니크의 얼굴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가 감돌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한 느낌을 주는 그런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천천히 떨어지던 실드나이트의 체력이 쑥 하고 곤두박질쳤다.

“세상에!”

“유니크 선수!”

경기를 지켜보던 중계진이 큰소리로 외쳤다.

“아론 선수 장비가 브레이크 됐습니다. 말도 안 되는 공격력입니다!”

일명 브레이크라 불리는 장비 파괴.

장비의 경우 내구도를 뛰어 넘는 한계를 입으면 이따금 깨지곤 하는데 이럴 경우 성능이 크게 저하된다.

갑옷이 파괴되거나 시합 도중 무기가 깨지는 일은 리그를 치르다 보면 볼 수 있는 일이다.

작년엔 B급~A급 장비를 썼다면 올해는 모두 A급 이상의 장비를 쓰고 있기에 보기 드문 광경임엔 틀림없지만 말이다.

‘미친 새끼···.’

블랙이글스의 실드나이트 아론은 이를 악물었다.

A급 중갑주의 옆구리가 파손됐다.

중계진은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만들어낸 놀라운 광경이라고 했으나 아론의 생각은 달랐다.

단순히 강한 공격력으로 브레이크를 낼 수 있다면 무도가보다 훨씬 강한 화력을 발휘하는 클래스는 얼마든지 있다.

마법 클래스의 경우 순간 화력은 암살계보다 훨씬 높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도사와 붙어 브레이크가 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지금 중갑주의 옆이 터진 건 공격력도 공격력이지만 괴물 같은 집중력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서로 전력을 다해 펼치는 공방전에서 한 부분만 타격할 수 있는 동체시력, 피지컬이 이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쾅소리가 나며 방패가 흔들렸다.

깨진 부분을 노리고 들어온 유니크의 용의 충격이 쏟아졌다.

본래 용의 충격은 견제기로, 딜레이 없이 빠르게 뿌리는 게 최대 강점인 스킬인데 어찌된 일인지 위력이 웬만한 공격기 못지않았다.

상대하는 입장에선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 20초 밖에 안 남았다. 아니, 15초!’

아직 체력은 30퍼센트가 남아있는 상황, 15초를 버티면 리그의 지배자라 불리는 유니크를 은퇴시킬 수 있었다.

설령 은퇴를 번복하더라도 그야말로 개망신임엔 틀림없었다.

아론은 순간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방패와 검을 교차해 물샐틈 없는 수비로 몸을 보호했다.

블랙이글스를 응원하는 소수 관중들이 벌떡 일어나 포효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S.솔리드 팬들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저히 남은 시간 동안 아론을 쓰러트릴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파워실드!”

강공을 최대 10회까지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스킬.

콩볶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10회의 타격이 휩쓸고 지나가자 아론은 기다렸다는 듯 스킬을 터트렸다.

“철의 방패!”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받는 데미지를 최대 체력의 1퍼센트 이상 받지 않는 전설급 스킬.

은빛 방패의 오라가 아론을 감싸는 순간 관중들이 비명을 질렀다.

-안돼 망할 놈아!

-그냥 죽어 제발!

-눈치 더럽게 없네!

“아론 선수가 쓰러지지 않습니다!”

“마치 블랙이글스를 지키는 수호신 같습니다!”

아론은 눈을 부릅떴다.

철의 방패의 유지시간은 5초, 1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13초.

남은 체력을 고려했을 때 이건 거의 따낸 경기였다.

브레이크 된 부분을 방패로 단단히 막고 있는 데다 철의 방패가 세워진 상황.

다른 때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불안한 마음이 들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저 눈빛 때문이야.’

아론은 유니크와 얼굴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분명 흐름이 자신에게 넘어왔음에도 유니크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언제라도 맘만 먹으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 같은 표정 아닌가.

허세일 거다.

이런 상황에선 게임의 신이라도 방법이 없다.

아론은 그리 생각하며 가드를 더욱 단단히 했다.

쿵-

“어엇?”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충격에 몸이 흔들렸다.

조금 전 스킬은 유니크의 절기 중 하나인 항마장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작년과 달리 위력이 아주 강했다.

용의 충격에 항마장까지.

저번 시즌과 비교하면 몰라볼 정도의 위력이었다.

“저, 저거!”

눈을 크게 뜨고 경기를 지켜보던 블랙이글스 코치는 스킬 한방에 사원 바닥이 무너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블랙이글스도 비시즌 기간 동안 캐릭터 육성을 위해 정말 많은 공을 들였다.

흔히 북미 프로팀이라고 하면 훈련 시간이 적단 이미지가 있는데 타우러스와 사이클론 영입 이후 블랙이글스 선수들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고된 훈련을 소화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선수들이 강해진 만큼 유니크는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인터뷰에서 1분만에 쓰러트리지 못하면 은퇴하겠단 소릴 들었을 때 드디어 저놈이 맛이 갔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실드나이트가 아니라 평범한 딜러 클래스였다면 20초나 버텼을지 의문이었다.

추락으로 인해 아론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교룡뇌조가 퍼부어졌다.

휘몰아치는 강공에 아론은 어떻게든 버티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용의 충격을 시작으로 교룡뇌조와 열양지가 번갈아가며 쏟아졌고 최후 일격에 아론은 반응조차 못했다.

완전 은신 상태에서 사각지대를 파고드는 강렬한 일격이 터지며 아론의 체력바가 폭발했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함성과 함께 전광판에 승자가 기록됐다.

-진심 공격력 개 또라이급

-오늘 경기 보고 확신했음. 이번 시즌 우승도 무조건 S.솔리드다.

-ㄹㅇ ㅋㅋㅋㅋㅋㅋㅋㅋ

-은퇴 당하는 줄 알고 쫄렸어···.

-배팅 사이트 다시 폐업 선언.

-자꾸 인간계 어지럽히시네; ㅋㅋ

경기 시간 54초.

의심할 여지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

“더 빨리 이겼어야지! 쫄았잖아!”

“1분 내로 실드나이트 이기기가 쉬운 줄 알아?”

“진짜라고? 연기한 거 아냐?”

케빈은 무대를 내려오는 나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제리는 의심의 눈초릴 보내며 물었다.

내 실력이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았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살짝?”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말했지? 이 녀석 연기한 거라니까?”

“연기였다고? 진짜?”

“넌 애가 왜 이렇게 순진하냐. 하루 이틀 겪어봤어? 얘 실력에 아론 정도는 삼십 초면 끽이야.”

“쉿-. 조용히 해.”

기껏 연기했는데 큰 소리로 떠들면 좋을 게 있겠는가.

제리의 말대로 30초까진 아니더라도 충분히 시간을 10초 이상 당길 수 있었음에도 시간을 꽉 채운건 전력 노출을 삼가자는 의미에서였다.

데니스급 상위 탱커였다면 힘들겠지만 확실히 아론은 중급 레벨이라 시간을 조절하기 편했다.

리그가 이제 막 시작된 상황, 어느 정도 힘을 감추고 있는 편이 중요한 순간을 위해서도 나았다.

“그럼 아까 그 무서운 눈빛은 뭔데? 막 무섭게 째려봤잖아. 1분 다 돼서 그랬던 거 아냐?”

케빈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 그건 그냥 지금 끝낼지 좀 더 시간 끌지 고민하느라 그런건데···. 그나저나 어떤 것 같아? 케빈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오늘 괜찮았지?”

“연기 괜찮았냐고? 솔직히 우리 팀 아니면 아무도 모를 걸. 누가봐도 전력을 다해서 쓰러트린 느낌이었지.”

제리의 답변에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경기 데이터를 분석해 공략법을 만든다 한들 아무 쓸모 없는 게 될 터였다.

“그만 떠들고 잠깐 집중하자.”

“옙.”

코치가 우리를 다시 한곳에 모았다.

2라운드 맵이 공개됐다.

마법사에게 유리한 유구의 천칭, 코치는 누굴 내보낼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저쪽에선 십중팔구 타우러스가 나올 확률이 높은 상황.

제레미와 제리가 둘다 나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얌마. 나한테 양보해.”

“누가 봐도 상성 상 유리한 제가 나가는 게 낫죠.”

“유구의 천칭 마법사 맵인거 몰라?”

“마력 다 쓰기 전에 충분히 잡을 수 있거든요?”

둘다 어지간히 타우러스와 싸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내가 아니었으면 1라운드에 서로 나가겠다고 할 친구들이었다.

“주목! 어차피 블랙이글스 1승급 카드는 타우러스랑 사이클론이다. 오늘은 맞대결로 간다.”

“윽···.”

코치의 말에 제리는 웃었고 제레미는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흐.”

“방심하지 말고. 제리 넌 유리한 상황에서 잔실수가 많은 편이니까 끝까지 집중해. 알았어?”

“예.”

블랙이글스와는 스크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타팀 교류전에서 타우러스가 상당히 무서웠단 이야긴 꽤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입을 놀릴 만한 최소한의 실력은 갖췄단 뜻이다.

“무조건 이기겠습니다!”

평소엔 유쾌한 캐릭터인 제리,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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