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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58화 (58/170)

운명의 소용돌이 (7)

예상을 뛰어넘는 강렬한 일격이 몸을 때릴 때, 작은 비명도 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다.

프로게임을 치르다 보면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인데 날붙이보단 주로 무도가의 주먹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갈비 끝을 노리고 치는 리버블로가 용의 충격과 함께 터지자 타우러스는 눈을 부릅떴다.

격투기를 전문적으로 배웠기에 가드를 보면 상대가 숙련자인지, 초보자인지를 금방 구분할 수 있었다.

내 공격속도가 너무 빨라 막지 못했을 뿐, 타우러스의 가드엔 문제가 없었다.

격투기를 제법 오래 배운 게 틀림없었다.

격투기 계를 무시하니 마니 언급하더라니, 그나저나 내가 무시했단 얘긴 왜 나온 건지 궁금했다.

곧 죽을 놈이라 물어보기도 애매하고.

이 녀석을 빨리 처리해야 수적으로 밀리는 아군을 도와줄 수 있었다.

“젠장.”

몇 대 맞고 휘청이던 녀석은 뒤로 굴러 사정거리를 벗어나려 애썼다.

이것 또한 숙련자라는 증거다.

바디샷을 안 받아본 친구들은 그 강렬한 고통에 공격 의지를 대번에 상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매도 맞아본 놈이 잘 맞는 거랑 같은 이치다.

데미지를 빨리 털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녀석에게 나는 조소를 지었다.

쉽게 풀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복싱을 배웠군.

고통스러울 텐데도 꿋꿋이 상체를 흔드는 걸 보니 상체 위주의 공격엔 나름 경험치가 있는 모양으로 보였다.

그러나 킥에 대한 대비는 영 엉망이었다.

용의 충격의 장점은 주먹과 발, 어디로든 뻗어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로우킥과 미들킥을 소나기처럼 몰아치자 정신을 못 차리고 흔들거린다.

마법사의 애환,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면 스킬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슬픈 직업이다.

어찌보면 가이아에서 가장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직업은 마법사가 아닐까.

살이 뚫리는 고통 속에서도 마법을 외우려면 보통 정신력 가지곤 어림없을 테니 말이다.

턱에 무릎을 꽂아넣자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녀석의 체력은 5퍼센트도 남지 않은 상황, 아마 머리가 윙윙 울려 정신이 없을 터였다.

“야.”

흙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엎어진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들리지? 앞으로 우리 길드 건드릴 생각하지마. 또 건드리면 그땐 이 정도로 안 끝나. 언제 어디서 접속하든 끝까지 쫓아가서 박살 내줄 거라고. 알아들었어?”

몸을 부르르 떠는 녀석에게 마무리 선물로 항마장을 때렸다. 연타로 다섯 방을 먹이자 녀석의 몸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아마 제법 강렬한 고통이 뇌리에 남지 않았을까?

나는 곧장 언덕을 내려가 전투중인 길드원들을 도왔다.

마환지를 쏠 때마다 적들의 자세가 무너지며 구멍이 생겼다.

스킬의 위력은 스탯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내 장비는 백 명가량의 프로 중에서도 단연 최상위 레벨이니 위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쉬운 상대부터 처리해 나가자 자연스레 강한 녀석들만 남았다.

대부분 블랙이글스 현역 선수들이었고 사이클론은 격렬한 저항으로 마이클과 제레미의 협공을 받아내고 있었다.

“뒈져 이 새끼들아!”

제리는 먼저 간 길드원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듯 드래곤 웨이브를 꽂아넣으며 필드를 초토화했다.

지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거대한 불기둥, 휩쓸려나간 블랙이글스 팀원을 끝으로 이제 남은 건 사이클론 하나뿐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이클론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피만 묻지 않았을 뿐, 크게 지친 모습이었다.

제레미와 마이클은 S.솔리드에서 당당히 주력 엔트리를 차지한 실력파 플레이어다.

2:1로 이만큼 분전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한때는 내 뒤를 잇던 북미 프로씬 2인자 암살 유저였지 않은가.

“배신자 새끼.”

존이 대검으로 정수리를 찍으려는 걸 내가 급히 말렸다.

“잠깐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뭘 물어보려고 해. 쳐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솔직히 궁금했다. 정말로 이런 상황을 누가 유도했는지.

별에별 사건이 다 일어나는 프로 판에서 사이클론 정도면 깔끔하게 뒤처리가 끝난 편이다.

어찌 됐건 그는 팀이 요구하는 금액을 전부 털어냈으니까.

당시 합의에 나섰던 프런트 얘길 들어보면 상당히 원만한 합의였다고 했다.

그런 녀석이 길드원을 앞세워 습격할 정도로 우리 팀에 앙금이 남아있을 것 같진 않았다.

“괜찮다면 어떻게 된 건지 듣고 싶은데.”

전투가 일어나기 전, 사이클론이 뭐라 말하려던 걸 블랙이글스의 주장 놈이 훼방 놓았던 게 떠올랐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대답하기 어려울까 싶어 일부러 길드원들을 뒤쪽으로 물렸다.

브라이언 코치는 불만이 많은 기색이었지만 내게 맡기겠다는 듯 손을 털며 아예 고갤 돌렸다.

“믿을진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내가 주도한 게 아니야. 우리가 먼저 때렸다는 것도 여기 와서야 알았어.”

“타우러슨지 뭔지 하는 그 자식이지? 대체 왜?”

“격투기를 하다 온 친구야. 꽤 잘 나가는 유망주였다고 하더라. 제프와도 친분이 있다고 했고.”

이런 빌어먹을, 또 제프야?

이번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니콜라이가 기획했던 그 일 이후로 내 팬이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안티 팬 또한 제법 커진 게 사실이었다.

특히 AFC 시청자들이 내가 프로 격투기판에 똥물을 튀겼다며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나로선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

내가 기획한 것도 아니고 설마 챔피언 갈비가 나갈 줄 몰랐으니까.

당시 제프 페티스는 훈련중에 부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크게 신경쓸 것 없다는 말을 했다.

당사자가 별일 아니라는데 되려 주변에서 난리를 피우는 격이다.

“아까 보니까 실력 여전하더라. 나는 그 녀석 못 이겼거든.”

“왜? 붙어보니까 네가 질 정도의 상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네가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겠지.”

과대평가가 아니다.

사이클론이 가졌어야 할 특급 스킬을 내가 가지게 되긴 했지만 그걸 제외해도 뛰어난 선수임엔 틀림없었다.

“어쩌면 경험의 차이 때문인지도 모르지.”

“경험의 차이?”

“격투기를 배우다 온 선수는 적응이 빠르거든. 게다가 네가 더 가이아를 오래했잖아. 헤드기어 접속기로.”

사이클론은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작년부터 게임을 시작했던 선수들은 지금 변화의 시기를 겪는 중이었다.

나는 전신접속기로 수년간 플레이했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전신접속기를 쓸 때와 조작감이 크게 달라 새로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타우러스라는 놈은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테니 전신 접속기에 더 쉽게 적응했을지도 모른단 게 내 생각이었다.

“새 팀에서 지내는 건 할만해?”

“너는 내가 그렇게 떠난 게 아무렇지 않아?”

사이클론은 내 안색을 살피는 눈치였다.

“글세. 팀 내에선 네 이미지가 조금 안좋은 건 사실인데···. 나는 그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거든. 그냥 우리 팀에 남아있었더라면 더 편하게 명성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복을 발로 찼다는 생각 정도?”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내 말은 들은 사이클론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최대한 오래 붙어있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라. 너를 보면 내가 너무 병신인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었거든.”

“······?”

“너프 때문에 내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을 때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건 너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도 마찬가지였어.”

오히려 사이클론은 속도 너프에도 제법 잘 버틴 편에 속했다. 다른 선수들 승률이 완전히 바닥을 찍을 당시, 어떻게든 5할 근처에 비빈 선수는 사이클론이 유일했다.

누구보다 잘 버틴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제일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생각보다 속이 좁더라고. 너는 멀쩡한데 나는 그게 안 되니까 견딜 수가 없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아. 뭐든 잘하는 네가 부러웠지.”

내가 부러웠다고?

전생의 나는 누군가가 가진 재능을 부러워하는 처지였다.

일군 말석을 전전했던 나보다 잘하는 선수는 프로 판에 차고 넘쳤다.

그런데 이번 생은 달랐다.

스타로 활약했을 선수가 나 때문에 의지가 꺾여 선로를 이탈하고 말았다.

그간 내 활약으로 누군가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겠단 생각을 어렴풋이 해왔는데 사이클론의 대답으로 그것이 증명된 것이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은 그래도 게임이 좀 되는 편이야. 아무튼···말 걸어줘서 고맙다.”

사이클론은 나랑 대화하면서 뭔가 마음에 가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제 슬슬 끝내주라. 다른 사람들 기다리겠어.”

“지금 대화하는 거 모니터링되는 거 아냐?”

지금 나랑 나누는 대화가 새어나가면 새 팀에서 지내기 곤란할 수도 있었다.

사이클론은 블랙이글스는 모니터링이 느슨한 편이라며 상관없다는 말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셀 잡았다.

전후사정은 알았으니 일단은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사이클론은 길드가 출전하니까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모양, 하지만 봐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S.솔리드 길드를 이끄는 길드장으로서 수락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타우러스 조심해. 그놈은 너랑 관련된 일이라면 이를 갈더라.”

“그럴게. 혹시나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빠지겠다고 해. 다음번엔 정말 제대로 손봐줄 참이거든.”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꼭 피해야겠네. 그리고···그 때 그렇게 도망쳐서 미안하다.”

“난 됐어. 미안하면 나중에 따로 연락이라도 해. 감독님, 코치님이 그날 화가 많이 났었거든. 우린 존 빼면 널 엄청나게 탓하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고맙다.”

“다음엔 무대에서 보자.”

나는 고통을 줄여줄 요량으로 빠른 연타를 담아 사이클론의 체력을 불태웠다.

상황을 정리하고 길드원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제리가 다가와 속삭였다.

“너는 사람이 너무 좋은 거 아니냐.”

“뭐가?”

“딱 봐도 네가 대화해줘서 저 녀석 멘탈 살아났잖아. 올 시즌에 날아다니면 골치 아프다고. 아예 재기 못하게 멘탈을 박살 내버렸어야 하는 건데.”

“내가 그 정도로 악독한 인간은 아니거든? 그리고 내 얘기랑 상관없이 이미 폼은 올라온 상태였어.”

제레미와 마이클의 협공에서 오래 버틴 거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속절없이 리그에서 무너지던 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회복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가이아는 팀전보단 개인전의 비중이 높아서 사이클론의 활약만 보장된다면 올해 블랙이글스의 성적은 오를 게 분명했다.

“다친 사람은 없어요?”

숫자를 세어보니 다섯 명이 추가로 패널티를 받았다.

수적 열세로 싸웠던 점을 고려하면 그래도 대단한 전과였다.

“다들 피곤하실 텐데 던전은 휴식을 취하고 돌기로 하죠.”

패널티를 받은 친구들이 다시 접속하려면 빨라도 하루는 쉬어야 했다.

난 던전 입구의 옆에 있던 부유 비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내 마력을 받은 비석이 빛을 쏘아냈고 철의 계곡 전체에 새로이 영역이 설정됐다.

이곳의 주인이 S.솔리드라는 걸 알린 것이다.

***

대체 어디서 소문이 퍼진 건지 그날 이후 커뮤니티엔 S.솔리드와 블랙이글스가 대규모 길드전을 벌였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그리고 블랙이글스가 처참하게 깨졌다는 후문이 돌자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레드불스도 상대가 안 되는데 무슨 블랙이글스임.

-주제를 알고 깝치셔야지.

-근데 이번에 블랙이글스가 선수 영입 제대로 했다고 함. 포스트시즌 노리는 듯

-님 이글스 관계자죠?

-아닌데?

-관계자 아닌데 그런 걸 어떻게 앎?

-블랙이글스에서 선수 새로 영입했단 소리 여기서 첨 들음. 관계자 맞는 듯

블랙이글스의 올해 성적이 정말로 상승할지는 두고봐야 아는 것이기에 유저들은 영입설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블랙이글스보다 관심을 끈 건 전쟁지역, S.솔리드가 점령한 철의 계곡을 과연 누가 트라이할 것인지에 대한 점이었다.

실제로 격전이 벌어졌던 이후, S.솔리드의 아성을 무너트려 보겠다며 수많은 길드가 철의 계곡을 찾았다.

S.솔리드가 누구인가.

최강의 승률을 자랑하며 타 팀은 범접할 수 없는 포스로 리그를 박살 낸 가이아 지구 최강의 프로팀이다.

TV로밖에 볼 수 없던 선수들과 직접 부딪칠 수 있단 소리에 수많은 길드가 도전장을 들고 나섰다.

물론 아무 길드나 도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철의 계곡은 지금까지 개척된 지역에서도 최전선에 위치한 곳, 실력이 없으면 도착하기도 전에 몬스터에게 유린당하기 십상이었다.

다수의 길드를 상대로 영토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S.솔리드는 막대한 공헌도를 긁어모았다.

영토를 빼앗기 위해선 모아둔 공헌도 일부를 바쳐야만 도전권을 따낼 수 있는 시스템 덕분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도전 길드가 쏟아져 들어왔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철의 계곡을 남겨두고 S.솔리드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레어 던전도 좋긴 하지만 S.솔리드와 직접 붙어볼 수 있단 희망으로 찾아온 길드는 텅 빈 계곡을 보며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대체 그럼 어디로 갔다는 거야?

-파밍 끝내고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함.

-개척 점수 보니까 아직 속도 살아있더라

다른 대형 길드, 모험가 팀은 서서히 개척 속도가 늦어지는 와중이었다.

미개척지를 공략하려면 언제든 위험이 출몰하기 마련, 데스패널티를 먹다보면 부활하는데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재정비하는데 시간이 점차 오래 걸린다.

개척 속도가 늦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S.솔리드의 개척 속도가 유지 된다는 건 팀 내 전력 소모가 다른 팀에 비해 월등히 적단 뜻이었다.

-이 정도면 올해도 리그는 S.솔리드 압살이겠는데?

-솔리드 팬이라 ㄹㅇ루 행복함.

-빨리 유니크 경기 보고 싶다.

-리그 시작 언제지? 5월?

-ㅇㅇ 5월.

미개척지의 장비와 업적, 던전 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상황, 1회 우승을 차지한 최강의 팀에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크리스마스를 한국에서 보냈으니 약 4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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