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소용돌이 (6)
다른 길드에게 공격 당했다는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꾸준히 미개척 지대 탐험을 진행중인 S.솔리드가 처음으로 전쟁지역을 발견한 건 불과 이틀 전의 일, 그 어떤 길드, 탐험대보다 빠른 진척 속도였기에 안심했던 게 화근이었다.
벌써 부딪칠만한 그룹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케빈의 말에 따르면 당한 인원은 열 명, 적지 않은 수였다.
여기서 당했다는 뜻은 사망으로 인한 패널티를 받았음을 뜻한다.
아직 시즌 초반이라 시간이 길진 않겠지만 하루씩 누적되는 패널티 특성상 충돌이 자주 일어나면 공략에 차질이 생긴다.
전쟁지역 발견 이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사전에 주의를 줬지만 겪어보기 전엔 피부로 와 닿지 않는 법이다.
처음엔 충돌이 일어나도 때려눕히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던 팀원들도 일방적으로 얻어맞자 적개심을 활활 태웠다.
“대체 어떤 녀석들이야?”
“BOB 알지?”
밥 혹은 비오비라고 불리는 곳, 유명 드라마 이름을 이니셜을 따 만든 상위 길드였다.
현재 가이아의 상위 길드는 하나 같이 프로 팀과 연관이 있는 곳들뿐이다.
아무리 유저들 실력이 좋아졌다 한들 아직은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벽이 존재했다.
프로를 끼지 않고선 상위권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는 셈이다.
BOB의 지원을 맡는 프로팀은 리그 중위권을 달렸던 블랙이글스였다.
“이유가 뭐래?”
전쟁지역에서 두 세력이 마주쳤다고 해서 항상 충돌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길드라는 게 어찌 보면 프로팀의 또 다른 간판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우리가 맞았다면 반격을 하는 건 당연한 수순, BOB에서도 이걸 몰랐을 리 없다.
“우리가 맘에 안 들어서 그랬다더라.”
“미친 거 아냐?”
그런 이야길 들으면 아무리 우리 길드원들이 천사라 해도 발끈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시비를 걸려고 작정하고 들어온 셈이다.
“다른 친구들은?”
“다 일어났지.”
일방적으로 당했단 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팀원은 없었다.
연습실로 내려가자 소식을 들은 브라이언 코치가 팀원들의 어깨를 주무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여느 팀 코치나 비슷하지만 더 효과적인 전략을 세우기 위해 직접 게임을 즐기는 관계자가 많았다.
브라이언 코치 역시 우리 길드 일원이었고 그는 이번 사건에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감히 우리 길드를 건드려?”
왕년에 격투 게임 챔피언 출신이었던 그는 이번 시즌도 금방 마스터 레벨에 올라 아직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접속 준비를 마친 팀원들이 게임에 하나둘 접속하기 시작했다.
목덜미를 관통하는 찌릿한 느낌과 함께 눈을 떴을 땐 길드 로비였다.
소식을 듣고 집결한 길드원 숫자는 나를 포함해 열여덟 명.
일이 있을 때마다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게임에 있어서 좋을 게 없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이렇게 당하고도 가만있는다면 호구 소릴 들으며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릴 테니까.
“다들 소식은 들으셨겠죠. 조금 전에 우리 길드원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임에도 다시 한 번 언급하자 다들 얼굴에 노기가 어린다.
“긴말 않겠습니다. 우리가 점령한 지역에 다시는 들어올 수 없도록 박살 내줍시다.”
*
철의 계곡, 은색 나무가 빼곡하게 박혀있는 이 지역은 S.솔리드가 최초로 찾아낸 전쟁지역이다.
전쟁 지역의 특별함은 필드 어디에서나 유저간 전투를 벌일 수 있단 점에 있다.
가이아는 다른 게임에 비해 아주 강력한 데스패널티를 적용하는 게임이다.
몬스터 뿐만 아니라 유저까지 견제해야 하는 전쟁지역은 위험천만한 지역이지만 언제나 랭커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던전의 존재 때문이다.
광활한 영역을 자랑하는 각 전쟁지역엔 다른 필드에 비해 보상이 좋은 레어 던전들이 존재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장비를 구할 수 있다면 목숨을 거는 랭커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근데 이놈들은 장비 때문에 시비를 건 것도 아니란 말이지.
S.솔리드의 기준은 분쟁 지역에서 활동함에 있어 최대한 서로 배려하고 충돌을 일으키지 말자는 쪽이었다.
패널티를 받아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길드원들 얘길 들어보니 S.솔리드라고 소속을 밝히자마자 일방적인 공격을 당했다고 했다.
블랙이글스와 척질만한 일은 한 적은 없었기에 더욱 이상했다.
리그에서 밟혀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면 그들보다 결승전에서 당한 레전드크루쪽이 더 심할 터였다.
철의 계곡에 입장했단 메시지가 울리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렇게 대범하게 일을 벌였으니 우리가 올 걸 대비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계곡은 우리가 나뭇잎을 밟아 바스락거리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제리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주변을 스캔했지만 유저로 보이는 움직임은 없었다.
“없는 것 같은데?”
“튄 거 아냐?”
뻔히 반격이 들어올 걸 아는 전쟁지역에서 자리를 옮기는 건 흔한 일이지만 내 촉은 여전히 그들이 이곳에 있다고 말했다.
만약 그들이 아직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있을 만한 곳은 정해져 있었다.
레어 던전이 위치한 중앙이다.
나는 조심스레 길드원들을 이끌고 철의 계곡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따금 나타나는 커다란 강철 도마뱀을 사냥하며 전진하길 한 시간 여, 다른 팀이 이곳을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다.
“전투 준비.”
신호를 보내자 다들 몸을 추스르며 눈을 빛냈다.
제리는 떨어진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푸른색 마나 포션을 들이켰다.
계곡 중앙엔 야트막한 언덕과 함께 불쑥 솟아오른 돌기둥이 자리잡고 있는곳, 기둥 밑단에 뚫린 거대한 던전 입구에 스물네 명에 달하는 인원이 우릴 기다렸다는 듯 진을 치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놈들이 우리가 찾고 있던 BOB 녀석들이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음.”
상대방의 얼굴을 훑던 난 가벼운 탄식을 흘렸다.
한때 우리의 동료였던 녀석, 사이클론이 팔짱을 끼고 언덕 위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팀원들 역시 사이클론을 알아보고선 눈을 부릅떴다.
“야! 마커스! 네가 계획한 일이냐?”
성격 급한 맏형 존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배신자, S.솔리드 팀원 중 일부는 시즌 도중 도망친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존. 오랜만이네.”
사이클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 답했다.
“우리가 서로 오랜만이라고 말할 사이였던가? 배신자 자식.”
배신자라는 소리에 그의 눈이 꿈틀였다.
“책임감도 없이 한밤중에 튀어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우리 뒤통수를 쳐?”
언성을 높이는 존을 향해 사이클론이 무어라 답변하려는데 누군가 손을 들어 사이클론을 저지했다.
“엄한 사람 잡지 맙시다. 내가 하자고 했으니까.”
“넌 뭐야?”
갑자기 끼어든 건 흑색의 로브를 걸친 마법사였다.
복장만 보고선 아크위자드인지 엘레멘탈 마스터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적색 계열인 건 확실했다.
“타우러스라고 합니다. 올해부터 블랙이글스 주장을 맡게 됐습니다.”
처음 보는 플레이어가 자신을 블랙이글스 주장이라고 말한다.
보통 주장은 팀 베테랑에게 맡기거나 실력이 좋은 선수에게 맡기는 직책이다.
리더십을 비롯해 선수들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올해 처음 게임을 뛰는 신인이 주장을 맡았다면 팀에서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 된다.
“명성이 자자한 S.솔리드 팀이 운영하는 길드 실력 좀 알아보려고 건드렸는데 별 거 없더라고요?”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팀원들이 분노하며 달려들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우리 길드원들을 일방적으로 때렸다고?”
“뭐···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서로 구구절절하게 대화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이유를 말해준다고 해서 그냥 돌아갈 것도 아닐 텐데.”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는 미소가 영 재수 없는 자식이었다.
나는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발로 올려 낚아챈 다음 상대를 향해 던졌다.
쐐액하고 날아드는 돌멩이를 녀석이 지팡이로 쳐냈다.
“뭡니까? 이걸 공격이라고 한 겁니까?”
“아니. 도주 차단.”
전쟁지역에선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일단 전투가 시작하면 마음대로 이탈이 불가능했다.
돌멩이를 쳐낸 순간 두 세력은 이미 전투 상태에 돌입했다고 시스템이 인식했기 때문에 이제 상황이 종결되기 전엔 누구도 자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 이유가 없다 이거지.”
“없다니까요? 말귀 못 알아들어요?”
더 이상 대화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녀석 말대로 이유를 알아도 그냥 보내주지 않을 참이었다.
처음부터 우리와 붙어보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들, 내가 손을 내리며 신호를 보내자 길드원들이 열을 맞췄다.
“돌격.”
나의 양손에 모인 마력이 항마장으로 화해 적을 때리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맞았으니 갚아줄 뿐이었다.
18대 24의 수적 열세, 그러나 우리 팀 누구도 질 거란 생각 따윈 안중에 없었다.
“저놈은 내가 맡는다.”
타우러스라고 밝힌 저놈만큼은 내 손으로 끝장낼 참이었다.
속도를 높여 선두를 달리자 다양한 마법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림자발자국의 은신효과를 발동하자 마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날렸다.
“뭐해. 여긴 나한테 맡기고 가서 처리해.”
“혼자서 쉽지 않을 텐데.”
“나한테 진 주제에 말이 많네. 필요 없으니까 가라고.”
거리를 좁혔을 때 녀석의 입에서 나온 이야긴 사뭇 놀라웠다.
이 건방지게 생긴 놈이 실력으로 사이클론을 압도했다고?
입술을 깨문 사이클론은 이내 체념한 듯 우리 길드원을 향해 튀어나갔다.
“다 보이는데 안 들어오고 뭐해?”
사이클론을 보내고 난 뒤 녀석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은신해 있는 방향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력이 요동치지 않았으니 스킬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부드러운 지면이 패이는 걸 유심히 지켜볼 수 있는 눈썰미를 가졌거나, 은신을 꿰뚫어보는 기능을 가진 장비를 가지고 있거나.
어차피 들킨 마당에 더 이상의 은신은 마력 낭비였다.
“네가 게임을 그렇게 잘한다며? 나는 원래 관심이 없었는데 내 주변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말이야.”
말이 참 많은 놈이었다.
별로 말을 섞고 싶은 상대가 아닌지라 난 답변하는 대신 사이클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레미와 붙은 사이클론의 무기가 날카롭게 움직이며 불꽃이 튄다.
당장은 호각인 듯 보이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이클론에게 유리할 듯 싶었다. 프로 리그를 한동안 떠났음에도 공백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몸놀림이 좋아 보였다.
“어딜 쳐다봐. 하여간 너는 마음에 안 들어.”
날카로운 빛줄기가 날아드는 걸 고개를 돌려 피했다.
아크위자드가 틀림없었다.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디버프 마법, 공격 마법이 엇박자로 날아들어 시야를 어지럽혔다.
날카로운 공격이 이어졌다. 사이클론을 이긴 건 결코 요행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탁월한 연계였다.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지?
나는 마법을 피하며 타우러스라는 닉네임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전생의 프로게이머는 아니란 소리다.
이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엄청난 유명세를 탔을 텐데 말이다.
전신접속기가 도입된 지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블랙이글스 주장이라고 했으니 지금 녀석도 전신접속기로 플레이하고 있을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놈의 움직임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제리가 애를 먹고 있는 시동어 없이 스킬을 쓰는 것부터 스텝을 밟는 동작까지 모든게 일류급 플레이였다.
당장 제리, 제레미, 사이클론까지. S급으로 평가받는 플레이어 모두가 어색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단 점을 생각하면 기이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 운명의 앞날이 마구잡이로 바뀌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좀 당황한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상황 판단이 되시나?”
잠시 생각이 많아 방어 위주의 수동적인 움직임을 보였더니 녀석이 이때다 싶어 마법을 쏟아냈다.
“프로게이머도 별거 아니네. 이런 놈이 감히 격투기계를 우습게 봐?”
“야.”
“이제 와서 빌려고? 늦었어!”
“사람 말은 자르지 말고 끝까지 들어라. 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아.”
항마장을 쏟아내며 마환지를 섞자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습적으로 날린 마환지가 허벅지를 제대로 관통했다.
전체 연령가 게임이라 피는 튀지 않지만 허벅지가 꿰뚫리는 고통은 그냥 넘길 수 없을 터였다.
“말은 바로 하자. 첫째, 난 격투기계를 무시한 적이 없다. 둘째, 상황 판단을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너고.”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전력으로 부동보를 밟았다.
코앞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는데 나는 아랑곳 않고 화벽을 넘어 달려들었다.
“미친놈인가? 뜨거울 텐데!”
뜨겁지만 견딜 만 했다.
수년간 게임을 하며 이보다 더한 고통도 겪었다.
금빛 기운이 어린 주먹, 용의 충격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몸놀림을 보아하니 격투기 혹은 체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내 상대는 아니었다.
용의 충격이 복부에 깔끔하게 들어가며 퍽 소릴 내자 녀석의 입에서 허연 무언가가 잔뜩 튀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가이아는 너무 폭력적인 게임이라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고통이 도가 지나쳐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경우가 왕왕 있을 정도니까.
그리고 이런 정신적 충격을 가장 선명하게 받는 이들이 바로 가이아 프로게이머다.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지.
날카롭고 정확한 타격으로 상대의 멘탈을 흔들 수 있을지.
누군가를 쓰러트릴 목적으로 갈고 닦은 전투 기술을 매일 같이 받아내는 직업이다.
나는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셋째, 프로게이머를 우습게 보지 마라. 개자식아.”
허우적거리는 녀석을 향해 나의 주먹이 벼락처럼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