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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54화 (54/170)

운명의 소용돌이 (3)

가이아의 콜로세움은 닉네임만 알고 있으면 누구나 관전할 수 있는 시스템이 오픈 초기부터 존재했다.

덕분에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실력있는 유저의 경기를 관전하는 관중이 무척 많은 편이었다.

일단 관전하는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감탄이 절로 나오는 플레이를 꾸준히 보면 절로 게임 실력이 느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소문난 아마추어가 관전 인원을 수십, 수백 명씩 끌고 다니는 것도 예삿일.

하물며 사이클론이라면 어떻겠는가.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거의 잊혀졌지만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와 함께 S.솔리드의 더블 에이스 자릴 굳건히 지켰던 녀석이다.

사이클론의 경기는 이미 천 명도 넘는 관중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몇 개월 만에 보는 모습이지만 장비나 스킬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실력이 녹슬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버서커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감각이 살아있었다.

아니, 오히려 움직임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공백기 동안 마냥 놀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게임에 복귀한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각 팀이 새로운 선수를 수급하기 위해 사방으로 유망주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으는 시기 아닌가.

십중팔구 리그 복귀를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

바삐 움직이며 버서커의 체력을 깎아내는 사이클론을 보며 녀석의 행선지를 짐작했다.

우리 팀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으면 최소한 감독이나 코치, 혹은 팀원 중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물었을 테지만 그런 기미는 없었다.

시즌 중의 책임감 없는 무단도주는 선수로서 정말 큰 잘못이다.

용케 제레미가 시기적절하게 들어와 줘서 다행이지 우리 팀은 하마터면 일 년 농사를 제대로 엎을 뻔 했다.

솔직히 이런 일을 저지른 선수가 다시 리그에 복귀하기란 쉽지 않았다.

만약 전생의 내가 이런 일을 벌였다면 그대로 매장당했을 거다.

하지만 사이클론은 누가 보더라도 특급에 속하는 인재.

예전이 비해 실력이 상향 평준화된 그랜드 마스터 유저를 상대로 가볍게 승리를 따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소식을 듣고 온 타 팀 관계자들이 눈에 띄었다.

영입 시기에 나타난 S급 매물, 스카우트 입장에선 눈독 들일만 한 대상임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우리 팀으로 올 확률은 거의 없었기에 계속 리그에 남는다면 내년부턴 적인 상황, 나는 객관적으로 녀석의 실력을 저울질했다.

전생에선 그림자발자국이란 특급 스킬을 갖춰 최강의 딜러 중 한 명으로 손꼽혔지만 공교롭게도 그 스킬은 내 수중에 있었다.

사이클론은 그림자발자국이 없어도 충분히 좋은 선수지만 위상이 조금 떨어지게 된 건 사실이었다.

과거엔 리그 내에 적수가 없는 언터쳐블한 선수였다면 지금은 충분히 S.솔리드 주력 엔트리로도 비벼볼 만 했다.

내가 붙으면 승리 확률은 9할 이상, 제레미의 경우엔 5할 박빙 승부가 예상됐다.

제리는 클래스 상성 문제로 조금 불리하지만 내년 시즌 돌입 전 새로운 컨텐츠 적응 여하에 따라 충분히 붙어볼 만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사이클론은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관중들은 끝내줬다며 플레이에 박수를 보냈다.

우리 팀 입장에서야 나쁜 놈이지만 외부에서 볼 땐 그냥 시즌 도중 사라진 선수에 불과했으니 악감정이랄 게 없어 보였다.

경기를 마치고 관중석을 슥 훑던 사이클론의 시선이 순간 멈춰 섰다.

멈춰선 곳은 내가 있는 자리였다.

엠퍼러로 들어온 상태인 데다 가면을 쓰고 있어 나인 줄 모를 텐데도 사이클론은 한참이나 날 바라봤다.

대체 이건 무슨 눈빛이야?

사이클론의 눈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읽은 난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 속엔 반드시 이겨 보이겠단 의지가 담겨있었다.

내가 독심술사는 아니지만 워낙 많은 선수들과 눈빛교환을 해서 그런지 보면 딱 알 수 있었다.

지금 녀석은 내게 모종의 승부욕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좀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적개심에 가깝기도 했다.

이거 참 당황스럽네.

저런 눈빛을 받을 정도로 내가 녀석에게 까칠하게 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툭하면 저기압 상태인 걸 맞춰주겠답시고 많이 배려해준 편이었다.

시선을 마주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뒤로 사이클론은 추가 랭크게임 없이 그대로 전장을 떠났다.

더는 관전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레 관중도 해산 수순을 밟았다.

“방금 저 자식. 너 쳐다본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진짜? 어떻게 알아봤지? 아니 그보다 뭔가 눈치가 좀 아니꼽던데.”

제리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확실했다.

내가 엄청 잘해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살갑게 대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팀 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참나, 우리가 뭐했다고? 도망간 놈이 지랄이네.”

“새 팀 구해서 리그에 다시 들어올 것 같더라고.”

“박살 내버리면 그만이지!”

“형. 자신 있어요?”

주먹을 불끈 쥐는 제리를 보며 제레미가 툭 던졌다.

“뭐가.”

“이길 자신이요. 아까 보니까 실력은 좋던데. 큰소리 치다가 깨지기라도 하면 망신인데···.”

“혼나볼래?”

갑자기 투닥거리는 둘을 놔둔 채 난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시즌 시작은 내년 5월,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지만 시즌 준비를 하다보면 시간은 금방 갈 터였다.

일단 나갈 동료들의 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팀원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

S.솔리드의 계약기간이 종료됐다.

시즌을 치르며 거의 경기를 뛰지 못했던 친구들이 짐을 쌌다.

해링턴 대표는 남아있으려는 친구들에게 빠짐없이 계약을 연장해 주기로 했지만 이들은 스스로 떠나겠단 의사를 밝혔다.

팀에 남아있으면 안정적으로 연봉을 받겠지만 프로게이머로서 무대에 설 기회를 잡긴 쉽지 않았다.

S.솔리드의 주력 엔트리는 정말 재능있는 선수가 아니면 뚫기 힘든 게 사실이었기에 이들은 중하위권 팀에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길 원했다.

안정된 수입을 포기하고 도전을 시작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나는 그들이 잘 되길 진심으로 응원했다.

공백이 생긴 인원은 셋, 코치의 말대로 부담 없이 추천을 하다 보니 평범한 친구들이 새로 빈 자리를 채웠다.

팀은 좋은 선수를 뽑으려 했는데 S.솔리드가 그렇게 쉽게 물갈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인 팀은 아니었다.

6인 엔트리에 들지 못하는 존이나 애덤같은 친구들도 중위권 팀에 가면 충분히 엔트리에 들 수 있는 실력이었다.

새로 합류한 친구들을 도와주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달력이 빠르게 넘어갔다.

이제 두꺼운 파카 없인 밖에 나갈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숙소 인원이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장기 휴가였다.

다른 게임이나 스포츠에 비하면 시즌이 짧다 보니 휴가를 길게 가질 수 있었다.

어느 스포츠나 안 그런 종목이 없겠지만 프로 레벨에선 멘탈, 컨디션 관리가 무척 중요하다.

갑자기 슬럼프가 찾아오면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즐비하기에 시즌을 치르며 쌓인 피로를 충분히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무한 체력으로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중인 나와 달리 다른 팀원들은 휴가를 무척 반기며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팀원 중 집이 가장 먼 나지만 휴가 기간이 길어 한국을 다녀오는 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들이 돌아오길 오매불망 기다리셨던 부모님과 연말을 함께 보내고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 숙소엔 아주 익숙한 물건이 들어서 있었다.

“한솔아! 이거 개쩔어!”

케빈은 엄치를 척 세우고 따봉 표시를 연발하며 어서 플레이해볼 것을 내게 권했다.

“코치님 이게 대체 뭐예요?”

이미 알고 있는 물건이지만 나는 모른 척 물었다.

헤드기어형 간이 접속기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캡슐형 전신접속기였다.

“운영진에서 보내온 새로운 접속기야. 아마 써보면 깜짝 놀랄 거다.”

당연히 깜짝 놀라겠지.

이걸 처음 써봤을 때 어찌나 놀랍던지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할 정도다.

가상현실 중독자를 양성한다는 거센 비판을 받을 정도로 유저에게 압도적 리얼리티를 선사하는 물건이었다.

“프로리그 시작 전에 적응할 기간을 준다고 각 팀에 우선 지급됐거든.”

이러니 다른 국가가 우승할 엄두를 못 냈지.

오죽하면 전신접속기에 적응하지 못한 프로들은 다시 헤드기어를 쓰고 경기를 치르고 싶다할 정도였다.

현재 정식으로 리그를 치러낸 곳은 북미 뿐, 이 시기에 접속기를 지급받은 곳도 북미가 유일할 터였다.

다른 곳은 빨라도 리그 시작 전에나 도입될 테니 북미는 다른 지역에 비해 5개월이나 먼저 접속기에 적응할 시간을 가지게 됐다.

어찌 됐건 2회 우승에 이어 초대 월드챔피언십 우승을 노리는 나로선 전혀 나쁠 게 없었다.

더원 등의 고수가 포진한 원라이프를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 됐다.

[Welcom to GAIA.]

묵직한 캡슐 내부의 시트에 몸을 맡기자 검은 화면에 백색 글씨가 나타난다.

빛이 스미는 광장에 내려섰을 때 나는 두 개의 캐릭터와 마주했다.

둘다 나랑 똑같이 생긴 얼굴이라 느낌이 묘하다.

유니크와 엠퍼러.

팀원들이 신형 접속기를 이용한 대결을 제안했기에 난 간만에 유니크로 게임에 접속했다.

“왔다. 왔어.”

커스텀 룸에 접속하자 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제리와 제레미를 비롯해 휴가에서 조금 일찍 복귀한 친구들은 날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 친구들이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건 던전 루팅을 마치고 아이템을 뜯을 때를 제외하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내막을 짐작한 나는 모른 체하며 싱긋 웃었다.

“어질어질하지? 적응하려면 시간 좀 걸릴 거다.”

내가 처음 전신접속기를 접한 건 PC방에서였다.

최신 데스크탑 보다 훨씬 비싼 물건이라 직접 구매하는 건 당연히 엄두도 못낼 시절이었으니 PC방에서 즐겨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찌나 조작이 어렵던지, 제대로 걷는 것조차 한참을 헤매야 했다.

별도의 조작을 하지 않아도 생각만으로 캐릭터를 다루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음.”

오래간만에 느끼는 진짜 가이아의 느낌에 나는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가만히 서서 손을 쥐락펴락 하고 있자 제리는 짜식, 너도 별 수 없구나! 하며 거들먹거렸다.

“자! 복수의 시간이다! 킹오브몬스터를 이때 아니면 언제 잡아보겠냐!”

“너무 치사한 거 아니야? 딱 봐도 너희 하루 전부터 꼬박 연습했잖아.”

“천하의 유니크가 여기서 빼겠다고?”

연습 때 당했던 걸 오늘 전부 풀겠다는 듯 몇몇 친구들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나는 웃음을 참기 힘들어 큼큼거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누가 먼저 할 건데?”

지금 제일 먼저 나서는 녀석이 나에게 가장 큰 원한이 있는 녀석이렷다!

아마 제리가 제일 먼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고 움직이는 제리의 움직임은 상당히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센스 하난 타고난 녀석이었다.

고작 하루 만에 저 정도로 익숙해지는 건 프로라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솔직히 이건 좀 심했다.”

“너도 처음엔 바닥만 기어 다녀놓고 뻔뻔하게 말이야.”

“어제 제리가 움직이는 걸 네가 봤어야 하는데. 술 먹고 게임하는 줄 알았다니까?”

“양심 없지.”

“뭐가 양심이 없어! 지금 아니면 너희가 한솔이 발끝이나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제리는 사방에서 들어오는 비난에 버럭 소리쳤다.

나는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난 괜찮아.”

“야!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너무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

제리는 투덜거리며 적응할 시간을 주겠다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너 그러다 후회한다? 이게 허접한 헤드기어 접속기랑은 완전히 달라요. 보면 몰라? 지금 네 얼굴 솜털이 몇 개인지까지 보인다고.”

오히려 연습 시간이 필요한 건 너희들이지···.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격이다.

프로팀 입단 이후 7년 동안 캡슐접속기를 통해 가이아를 플레이했다.

그리고 그 경험치는 고스란히 내 혈관에 녹아 있는 상태, 설령 내 육체가 스물 일곱 노땅 선수였어도 내 압도적인 승리는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전생버프로 피지컬까지 괴물이 된 지금은?

눈 깜짝할 새에 이 자리에 모인 팀원들을 전부 눕히는 것도 가능했다.

“너무 자신만만하니까 수상하네.”

제리는 나의 여유로운 미소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낀 듯 했지만 먼저 얘기를 꺼냈기에 차마 무르자고 하진 못했다.

“그럼 가볍게 몸을 풀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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