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소용돌이 (2)
망자의 광장.
크고 작은 비석들이 세워진 소형맵에서 마주한 상대는 무도가였다.
“뭐야. 이 뉴비는.”
랭크게임에선 상대와 대화를 나눠도 패널티를 받을 일이 없다.
물론 욕설을 하면 제재를 받게 되지만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정도는 괜찮다.
나를 바라보는 무도가는 영 이해가 안 된단 눈치다.
우리 팀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체 어떻게 나 같은 초보자가 마스터 리그 구간에 있는지 궁금해했다.
“꽁승이네.”
날 위아래로 훑던 녀석은 입맛을 다셨다.
승리하면 더 많은 코인과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
이제껏 마스터 리그에 오래 있던 사람들도 갓 전직한 초보자를 본 적은 서버 초기를 제외하면 없을 터였다.
“과연 그럴까?”
날 꽁승 취급하는 무도가를 비웃어주며 반격에 나섰다.
비스듬하게 세운 방패 위로 불꽃이 튄다.
내가 아주 깔끔하게 공격을 막자 상대 눈이 반짝였다.
“제법인데?”
가볍게 주먹 몇 번으로 게임을 마무리 지으려 했던 무도가는 눈을 부릅뜨고 제대로 달려들었다.
양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주먹엔 붉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강한 듯 하면서도 부드러운 권법은 초월급 스킬 낙일권이 틀림없었다.
간만에 보는 스킬이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 상대의 투로를 차단했다.
방패로 부족할 땐 오른손에 들린 검을 뻗어 상대의 급소를 노렸다.
계속 공격을 이어가야 하는 타이밍에 계속 내가 맥을 끊고 들어오자 무도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좆밥 클래스 주제에!”
연달아 유효타 넣기에 실패하자 녀석이 분노를 터트렸다.
아크나이트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가이아의 클래스 유행을 선도하는 건 자국 프로리그, 현재 리그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클래스는 무도가, 그리고 아크위자드, 엘레멘탈 마스터로 통하는 딜러들이었다.
본래 방어 주력, 서브 딜러를 겸할 수 있는 백색계열은 유저들에게 외면받는 추세였다.
어떻게 보면 아크나이트가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건 내 탓이 컸다.
무패의 신화를 달성하며 무도가를 가이아 최고의 인기 클래스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으니 말이다.
“교룡뇌조!”
뭐라고? 난 상대의 외침에 살짝 놀라 조법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가까스로 차단했다.
그러나 교룡뇌조는 온데간데없고 엉성한 주먹질만이 방패 위를 두들겼다.
그제서야 난 입딜에 속았음을 깨달았다.
말로만 스킬 명을 외치고 전혀 다른 공격을 하는, 콜로세움에서만 통하는 잡기술이었다.
마스터 리그에서 뛰는 선수치고 가이아 프로리그를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나름 효과적인 기술이긴 했다.
“항마장!”
망할 놈, 적당히 해!
난 방패로 녀석을 밀치며 검으로 옆구리를 썰었다.
육성이 덜 된 캐릭터라지만 클린히트에 데미지는 제대로 들어갔다.
“아니 씨발! 왜 안 맞아?”
어느덧 경기 시간 2분이 흘렀다.
나를 무시하고 잡담을 나누던 팀원들도, 상태 팀도 모두 이 경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진작 몇 대 맞고 쓰러졌어야 할 아크나이트가 비석을 밟고 튀어 올라 무도가를 압박하고 있었다.
체력은 92 대 72 퍼센트, 나의 우위였다.
라운드 종료시간이 되어갈수록 무도가의 표정은 초조해졌다.
녀석이 좆밥 클래스 운운하며 도발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정도까진 아니었겠지만 나는 간만에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너무 강한 공격은 막아도 데미지가 들어온다.
완벽에 가깝게 공격을 차단했는데도 체력이 8퍼센트나 깎인 이유였다.
“육룡거권!”
입만 열면 스킬명을 크게 외쳐대니 내 입장에선 맞아주기도 힘들었다.
괜히 프로들이 소리 없이 공격하는 연습을 하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수를 상대방에게 읽히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나의 압도적인 방어 앞에 무도가는 연신 말도 안돼를 중얼거렸다.
그렇게 3분이 모두 흐르자 타임아웃이 선언됐다.
고급 스킬은 하나도 쓰지 않고서 마스터 레벨 무도가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아직 아크나이트를 다루는 실력이 녹슬진 않은 것 같아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봐.”
“···?”
“다시는 아크나이트를 무시하지 마라.”
부들거리는 무도가를 뒤로 한 채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 팀원들이 호들갑을 떨며 맞이했다.
“프로 맞으시죠?”
“증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이런 멋진 경기는 프로리그에서도 못 봤습니다.”
감각을 살리는 덴 역시 실전이 최고였다.
올해 리그 우승까지 따낸 녀석이 무슨 실전 감각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무도가와 아크나이트는 엄연히 다른 클래스다.
당연히 감을 찾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엔 한두 판만 하고 말려던 매치가 길어지자 쉬고 있던 팀원들도 주변에 모여 내 경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와. 이젠 하다하다 다른 클래스도 준비해?”
“독하다.”
“그 와중에 또 한 판을 안 져요.”
“이거 완전 골목상권 침해 아니냐!”
S.솔리드에서 아크나이트를 맡는 빌은 제발 자릴 뺏지 말아 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이미 브라이언 코치는 내 경기를 매의 눈으로 경기를 분석 중이었다.
본래 세 개의 클래스가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백색 계열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상성이 돌지 않는 게 현재 리그 상황.
암살자를 잡아야 할 백색이 하나둘 사라지자 리그의 중심은 완전히 암살계에 쏠린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백색 클래스가 다시 경쟁력을 찾을 수만 있다면 타 팀이 육성에 들어간 웨폰마스터, 무도가, 다크레인저를 완벽하게 카운터치는 것도 가능했다.
“한솔아. 아크나이트는 전략적으로 키우는 카드냐?”
“그건 아니고요. 그냥 시험삼아 키워보는 정도죠. 아시다시피 최근 클래스 밸런스가 너무 청색한테 쏠려 있잖아요. 저는 세간의 평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든요.”
“평가가 잘못됐다?”
“다들 이야기하는 것만큼 백색계열이 나쁜 클래스는 아니거든요. 아직까지 그 직업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부족한 것뿐이죠.”
많은 프로팀 관계자들이 현재 백색의 밸런스는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상황, 오죽하면 처음 운영진이 설정한 15퍼센트 속도 너프가 리그 균형에 적절했을 거란 의견도 많았다.
당시엔 나 말곤 너프에 적응하는 선수가 없어 결국 8퍼센트 롤백으로 타협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암살계를 카운터 쳐야 할 백색의 힘이 너무 약하다는 말이 계속 나왔다.
“그럼 네 생각엔 충분히 백색 계열이 다시 뜰 수 있다?”
“예. 좀 더 키워봐야 알겠지만 청색 카운터 용도로는 가능성 충분해 보이는데요.”
다른 선수가 이야기했으면 모르겠는데 내가 이야기하니 약발이 잘 듣는다.
이제 겨우 생성한 지 며칠 안 된 캐릭터로 마스터 레벨 무도가를 가볍게 발라버렸으니 이견이 나올 수 없었다.
“코치님. 이건 솔직히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죠. 한솔이 형 아니면 아무도 못해요.”
“옳소!”
제레미가 의견을 내고 빌이 거들었다.
“니들은 조용히 해. 니들한테 서브 클래스 키우란 소리 안할 테니까. 한솔아. 서브 잘 키워두면 내년 전략 구상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열심히 한 번 해봐라.”
여러 클래스를 보유한 선수의 경우 엔트리 제출 하기 전에만 결정하면 되니 키워둬서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더 좋은 장비를 파밍하고 새로운 칭호를 얻으려면 연말 이후, 서버가 리셋 되는 시점 이후에나 될 것 같으니 이대로 아크나이트를 키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
엠퍼러 육성 한달 째, 이미 가이아 커뮤니티엔 가면을 쓰고 리그를 파괴하는 황제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엠퍼러란 닉네임 자체가 원래 흔하기 때문에 처음엔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최상위 리그인 마스터 레벨에서 무패 전적을 이어가니 금방 유명세가 붙었다.
-님들 엠퍼러 앎?
-가이아 좀 한다 하는 사람중에 모르는 사람 없을걸?
-처음엔 장비도 무슨 초보자 던전꺼 쓰더니 지금은 때깔 좋더라.
-돈으로 장비 떡칠한 애들 극혐;;
누군간 돈으로 부족한 실력을 커버하는 거라며 날 흠잡기 바빴다.
물론 테스트 삼아 키우는 계정에 벌써부터 돈을 쏟을 이유는 없었다.
내 장비가 좋아진 이유는 순전히 팀의 지원 덕이었다.
육성 과정 중에 천천히 파밍을 해도 되는데 프런트가 발 벗고 나서 아크나이트 장비를 공수해 넘기기 시작한 것이다.
해링턴 대표의 지시임이 틀림없었다.
항상 경기도 챙겨본다고 했으니 내가 서브 캐릭터 육성에 들어간 걸 모를 리 없었다.
내년 리그에서 아크나이트를 쓸 생각이 아니었기에 지원을 몇 번 사양하긴 했다.
챔피언십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거라고 이미 의견을 밝히지 않았던가.
무도가도 아니고 아크나이트에 거액 지원을 받기엔 조금 미안했다.
게다가 약속했던 우승 보너스를 받아 주머니 사정이 나쁜 편도 아니었다.
당초 약속했던 100만 달러보다 훨씬 많은, 150만 달러의 우승수당을 챙겼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선수의 몇 배는 받은 게 분명했다.
만약 다른 동료들이 이런 거금을 챙겼다면 LGE마켓부터 달려갔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코치는 사양하지 말라며 장비를 기어이 내 손에 쥐여줬다.
덕분에 한게임 한게임 신중하게 치렀어야 하는 마스터 리그 경기를 이제는 코풀 듯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전엔 게임을 할 때마다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했는데 이젠 눈치 보지 않고 화끈하게 경기를 주도할 수 있었다.
랭킹이 올라가 그랜드 마스터 유저들과 대전이 잦아지자 영입 메시지를 받는 횟수도 크게 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A.래피드 코치를 맡고 있는 베나테스라고 합니다. 조금 전 저희 선수와 매칭됐기에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혹시 프로 선수가 아니라면 저희 팀에서···
-슈퍼호넷 코치를 맡고 있는 라이언입니다.
사실 내 실력을 보면 순수 아마추어일 확률이 거의 없음에도 프로팀 관계자들은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유니크가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높은 승률을 기록하며 마스터 리그를 등반했으니 말이다.
당시엔 사이클론 기분도 맞춰줄 겸 고의로 몇 판 지기도 했지만 이번엔 누구 눈치 볼 필요 없이 싸웠더니 단 한 번도 지지 않는 괴력을 발휘했다.
혹시나 아직 데뷔하지 않은 원석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특급 대어, 각 팀 코치는 한 번만 만나달라며 내게 통사정을 했다.
물론 타 팀으로 이적할 생각도 없고 낭비될 시간이 아까웠기에 그런 요청은 전부 거절했다.
‘그건 그렇고 유저 수준이 생각보다 많이 올랐네.’
리그 등반을 하며 느낀 건 올초에 비해 유저 실력이 올랐다는 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땐 누굴 목표로 해야할지 애매했지만 지금은 프로리그라는 훌륭한 기준이 있었다.
어느 정도 플레이를 하면 프로가 될 수 있는지 기준이 확실하니 프로를 목표로 뛰는 유저들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더욱 게임에 매진했다.
우리 팀은 계약을 종료한 선수가 없었지만 타 팀에선 이미 내년 시즌을 위해 새 계약을 추진 중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현재 프로 선수 대다수가 서버 초기에 뽑아 올린 선수다보니 최근 치고 올라오는 유망주에 비해 재능이 부실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가이아의 유저수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상황, 뛰어난 재능을 지닌 유저들이 꾸준히 판에 유입되고 있었다.
“한솔아. 미안한데 훈련 좀 도와주면 안 될까?”
팀원들은 내게 일대일 지도를 자주 부탁하곤 했다.
프로팀 1군이 보유할 수 있는 선수 인원 제한은 총 열두 명, 그 중 무대 위에 꾸준히 오르는 선수는 기껏해야 여덟 명 남짓이다.
S.솔리드의 경우 곧 계약 갱신 시기이기 때문에 선수들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내가 리그 레벨 수준의 상승을 느낀 것처럼 이들도 그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짤릴 염려가 없는 나와 달리 이들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더욱 연습에 매달렸다.
올해 경기에 거의 뛰질 못한 존은 내게 지도를 부탁했다.
경기 참가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S.솔리드에 남고 싶어 했고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다.
물론 모든 동료가 훈련에 매달리는 건 아니었다.
용의 꼬리가 될 바엔 뱀의 머리가 되고자 하는 선수도 있었다.
계약 갱신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코치는 유망주 프로필을 훑으며 내게 조용히 부탁했다.
“한솔아. 유망주 픽업좀 부탁한다.”
사이클론으로 한 번 구멍을 내긴 했지만 내가 추천한 선수는 전부 걸출하다 해도 좋을만큼 성적이 뛰어났다.
하지만 매번 선수 평가를 도와주기엔 부담스러운 점도 있었다. 스카우트는 내 몫이 아니지 않은가.
“저라고 매 번 좋을 수 있나요. 부담되는데···.”
제레미의 경우엔 촉이 좋아 픽업했지만 그 외에 데니스나 케빈은 이미 미래에 성공한다는 결과를 알고 데려왔던 친구들이다.
또 그런 인재를 데려온단 보장은 없었다.
내가 난색을 표하자 코치는 전혀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말했다.
“주력 엔트리에 들만한 선수를 뽑아달라는 게 아니야. 적당히 12인에만 들 선수면 돼.”
“한 번 찾아는 볼게요. 너무 기대는 마시고요.”
꼭 남고 싶어하는 친구들과 다른 팀으로 떠날 친구를 가늠해보면 올해가 가기 전에 세 명 정돈 새 친구를 데려와야 했다.
리그 우승 이후 입단 문의를 하는 메일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오고 있지만 역시 스카우트는 직접 보는 게 최고였다.
그랜드 마스터 리그 문턱을 넘자 실력있는 친구들이 눈에 띄었다.
기존 팀원들에겐 미안하지만 당장 투입해도 전력 면에서 앞설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내년까진 디펜딩 문제 없겠는데.
올겨울이 지나기 전에 실력파 선수로 약점 라인 보강을 마치면 2년 연속 우승컵은 문제 없을 듯 했다.
여느 때처럼 엠퍼러로 접속해 조용히 선수 테스트를 하고 있는데 놀라운 이야기가 들렸다.
“누가 복귀했다고?”
야밤에 팀을 떠나 뭐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던 사이클론이 랭크매치에 모습을 드러냈단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