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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52화 (52/170)

운명의 소용돌이 (1)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책임이요?”

“모든 걸 맞춰줄 수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말을 책임지려면 팀의 대소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요? 일성생명이 만드는 팀에서 백은하씨의 위치는 어딥니까. 총감독? 단장? 그것도 아니면 대표?”

내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원라이프에서 그녀의 직책은 코치에 불과했다.

비록 재벌 3세라는 압도적 파워를 두르고 있긴 하지만 팀의 기조를 자신의 입맛대로 바꿀 입장은 아니다.

게다가 원라이프의 운영정책은 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식.

캐릭터 권한을 선수에게 일임하는 일은 꿈도 못 꿀 일이다.

S.솔리드는 내가 스타트를 잘 끊은 덕에 이적이나 은퇴를 할 때도 선수가 캐릭터를 빼앗길 일이 없지만 한국 대기업 휘하 게임단 대부분은 캐릭터 소유권을 직접 관리했다.

공격적인 스킬 투자, 장비 업그레이드를 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수억 원에 이르는 거액을 투자한 상품이 이적, 혹은 은퇴와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막대한 리스크를 생각하면 팀 입장에선 제대로 된 투자를 하기 어렵다.

언뜻 보기에 기업이 투자를 많이 하니 캐릭터 소유 권한도 팀이 가지는 게 맞지 않나 싶지만 이럴 때 선수는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만약 선수가 게임단과 마찰을 빚어 팀을 떠나야 할 때, 그는 그간 육성한 모든 걸 내려놓고 몸만 나가야 한다.

특급 선수가 아닌 이상에야 몸뚱이만 가지고 나가 새 직장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공백기가 한 달, 두 달 길어지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긴 더욱 어렵다.

가이아는 스킬 세팅 하나만 바뀌어도 흐름이 달라지는 섬세한 게임, 그런 게임에서 본래 쓰던 캐릭터 대신 테스트용 임시 캐릭터를 빌려 쓰면 제 실력이 나오겠는가?

물론 아무 캐릭터를 잡든 간에 기이하리만큼 가공할 실력을 뽐내는 선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선수는 아주 극소수, 소위 특급으로 분류되는 선수다.

특급 선수는 캐릭터의 유무와 상관없이 새 팀을 구하는 데 문제가 없겠지만 모두가 그런 재능을 타고나는 건 아니다.

나는 캐릭터 권한이 팀에 귀속됐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 몇 가지를 언급하며 말했다.

“일성생명은 선수의 캐릭터 권한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까?”

약속 못 하겠지.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그 엄청난 거금을 쏟아부어 가며 메테오 밤을 따낸 거다.

만약 내일 당장 김용재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고 싶다면 그는 팔다리를 자르고 나가야 한다.

레어리티 장비, 각종 고등급 스킬이 녹아 있는 엘레멘탈 마스터, ‘더원’은 그에게 있어 팔다리나 마찬가지다.

내 물음에 백은하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건···.”

“됐습니다. 답은 충분히 들은 거로 하죠. 일성생명쯤 되는 기업이면 선수복지도, 계약금액도 업계 평균 이상일 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원히 팀과 선수의 사이가 좋다는 보장은 없죠. 그럴 때 선수는 팀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게 설령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부당한 일이라도 말이죠.”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은데요. 꼭 팀과 선수가 사이가 틀어질 생각을 할 필요는 없죠.”

“틀어진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처음부터 권한을 선수 쪽에 남겨놔도 될 부분입니다. 이 이야긴 더 해봤자 평행선을 달릴 것 같으니 이쯤 해두죠.”

난 백은하에게 가지고 있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나를 설득하고 싶거든 캐릭터 권한은 건들 생각 말라고 말이다.

“선수가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땐 투자 리스크가 너무 커요.”

“팀 입장에선 그렇겠죠.”

“S.솔리드는 모든 권한을 선수들에게 남겨놨단 말인가요?”

“예.”

비록 통화중이지만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런 식으로 팀 운영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부호가 얼굴에 잔뜩 떠올랐을 터다.

“S.솔리드의 생각은 저로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네요. 어찌 됐건 세계 각국의 서버가 정상 가동되기 시작하면 최강의 리그 자릴 두고 각국 리그가 요동칠 거예요.”

나도 안다. 올해까지만 리그를 마치고 한국으로 넘어가려는 이유 중 하나기도 하니까.

최상급 재능을 지닌 괴물 플레이어들이 줄기차게 솟아나는 한국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세계 최고 레벨의 전장이다.

적어도 프로게이머라면 최고의 무대에서 뛰고픈 욕망을 갖고 있다.

“S.솔리드라면 얼마든지 북미에선 디펜딩 챔피언으로 군림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세계로 나왔을 때, 과연 그때도 우승팀의 위엄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정말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잡으시라고요. 세계 최고 팀의 일원이 될 기회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쪽 팀이 세계 최고가 된다?”

“물론이죠.”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물론 백은하는 팀을 성장시킬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원라이프에서 선수는 결국 소모품.

슈퍼엘리트로 불리는 스타를 가장 많이 배출해냄과 동시에 제일 많이 갈아치운 게임단이 원라이프다.

꽃을 피우면 내보이고 시들면 가차 없이 꺾어버리는 스타의 무덤.

그 운영기조는 그녀가 팀에 있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렵사리 프로생활을 이어온 탓일까.

그런 원라이프의 운영은 생리적 거부감이 강했다.

하루라도 더 뛰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의 노고는 그들에게 정녕 아무 가치도 없단 말인가.

“팀명은 정해졌습니까?”

“아직이요.”

“그렇군요. 뭐가 됐든 한국에서 좋은 결과 거두시길 바라겠습니다. ”

축객령임을 알아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두고 보세요. 반드시 우리는 세계 최고의 팀이 될 테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전활 끊었다. 제안을 거절했다고 토라진 모양이다.

물론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다. 모든 선수 인성이 올바른 건 아니니까.

실컷 도움만 받고 휙 떠나버리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거는 정돈 나도 찬성이다.

역시 우리 대표님이 최고다.

아무 제약 없이 선수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인물.

선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팀은 없었다.

아마 내가 떠나도 S.솔리드의 북미 순항엔 문제가 없으리라.

선수들은 최고의 팀에 남고 싶어 할 테니 말이다.

어쨌든 리그 치르느라 수고했다!

벌써 새벽 한 시, 스스로에게 작은 칭찬의 한마디를 건네며 나는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었다.

***

결승전도 끝나고 9월 중반을 넘어섰을 무렵, 한국 포털엔 가이아 그랜드 오픈이란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걸렸다.

내가 회귀하기 전, 2028년도엔 한국서 가이아의 인지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VR게임으로 주목을 받긴 했는데 아무래도 외국에 서버를 둔 게임이다 보니 한계가 명확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한국인 프로게이머 유니크가 북미의 내로라하는 게이머들을 눌렀다는 기사만 여러 번, 마침내 그의 도움으로 팀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단 소식이 나왔을 땐 국내 채널에서도 중계권을 따자는 논의가 오갈 정도로 관심이 일었다.

-너는 안간다고?

-지금 가면 형이랑 같이 게임 못하는데요?

나는 민준이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한국 서버 오픈과 함께 북미의 계정을 서버 이전 해주겠단 공지가 나온 상황.

북미 서버에서 선행학습을 한 많은 유저들이 계정 이전을 신청하는 와중에 민준인 아직 남아있을 모양이었다.

-알아보니까 일 년 정도는 신청 늦출 수 있대요. 형 올해까지만 뛰는 거 맞죠?

-생각은 굳혔어?

처음 봤을 땐 프로에 별 뜻이 없던 민준이는 나의 활약상과 연이어 들어오는 프로팀 오퍼에 생각이 바뀐 상태였다.

프로 복싱 선수로도 재능이 있지만 같은 재능이라면 가이아의 프로선수가 더 하고 싶다고 했다.

게다가 이 녀석, 내 개인 팬클럽 회장이다.

최근엔 하루라도 빨리 나와 한 팀에서 경기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수준이었다.

-형은 요즘 뭐해요? 리그 준비 벌써 하진 않을 거 아녜요?

최근엔 게임 내적으로 할 일이 그다지 많진 않았다.

가이아의 프로리그는 일 년 중에 약 5개월 정도 치러진다.

그 외의 시간엔 미개척 지역을 탐험하거나 계속 콜로세움을 돌리는 것뿐인데 내 입장에선 랭크 매치가 시시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일대일로 날 두근거리게 할만한 인재가 아직 없는 탓이었다.

더원 정도의 재능을 지닌 백색 계열 클래스라면 좋은 호적수가 될 텐데 아직 그런 인재는 보이지 않았다.

-요즘 새로 캐릭터 키워

-진짜요? 어떤 거요?

다른 팀 프로 선수들은 못다 한 장비 파밍, 코인을 벌기 위해 콜로세움을 뛰는데 내가 새로 캐릭터를 키우고 있다 하니 놀란 기색이다.

-아직 비밀이야.

-그럼 내년 시즌부턴 클래스 체인지 하는거예요?“

-글쎄.

일단 1월이 되면 서버가 리셋 되고 더 많은 컨텐츠가 풀린다. 그럼 다시 무도가의 스펙을 좀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동시에 두 개 클래스를 완벽하게 키우는 건 사실상 힘든 일이니 계속 무도가로 리그를 진행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은 그냥 진짜 할 게 없어서 키워보는 거야.

-와. 누군 파밍도 다 안 끝났는데 말도 안 돼.

아마 할 게 없어서 서브 클래스에 손대는 사람은 서버에 많지 않을 터, 그만큼 가이아의 스탯 작업과 장비 파밍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근데 왜 소문이 안 났지? 형이 서브 캐릭 키운 거 보면 소문이 진즉 났어야 하는데···.

-ㅋㅋㅋㅋ;;

*

다른 게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가면은 가이아에선 구하기 쉽지 않은 아이템이다.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아이템은 웬만해선 풀지 않는 운영 때문이다.

덕분에 가면 하나를 구하려면 웬만한 초월급 스킬 하나값이 들었다.

그렇게 거금을 주고 구해도 비매너 행동으로 신고라도 받으면 영락없이 사용불가 아이템으로 변한다.

철저히 얼굴을 드러내고 게임하게끔 만들려는 게임 철학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게 실제 외모를 기반으로 한 가이아에선 타 게임에 비해 불특정 유저의 공격성이 적은 편이란 연구결과도 있었다.

방패와 검을 든 허름한 아크나이트 한 명이 전장에 도착했다.

엠퍼러.

최근 키우기 시작한 캐릭터의 새로운 닉네임이다.

아크나이트 컨트롤 감각이나 살릴 겸 매칭을 돌렸더니 이게 웬 걸, 시작부터 마스터 리그였다.

가이아는 고인물의 초보자 학살을 막기 위해 계정 자체 점수로 리그를 분류했다.

나 같은 경우 유니크가 프로리그 정식 선수로 등록되어 있기에 엠퍼러로 아무리 연패를 해도 최소 마스터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터였다.

“이런 썅! 팀 꼬라지가 이게 뭐야!”

“와 저건 좀 심한데.”

대기실에 함께 매칭된 유저들이 날 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누가 봐도 이제 겨우 초보자를 벗어나기 시작한 장비, 게다가 클래스는 최근 약체라고 평가받는 아크나이트였으니 다들 뿔이날만 했다.

“저거 일부러 우리 엿 먹으라고 가면 쓰고 온 거 아냐?”

“얼굴 까고 겜 던지긴 쪽팔리니까 가면 쓴거네. 맞죠?”

아니, 랭크를 보정 받는단 사실을 깜빡해서 생긴 일이다.

솔직히 내가 아무리 센스가 좋아도 키운지 하루 밖에 안 된 캐릭터로 마스터를 쓰러트리긴 좀 힘든 게 사실이다.

서버 초창기에 가공할 연승으로 그마를 따던 시기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많았다.

일단 유저들이 게임을 반 년 넘게 하며 스탯과 장비가 제법 성장했다.

당시 그랜드마스터 유저들을 지금 마스터리그 유저와 붙이면 백이면 백 깨질 정도로 육성 차이가 컸다.

“워워. 다들 진정해.”

아크위자드 한 명이 성난 팀원들을 진정시켰다.

“저 사람이 진짜 초보라면 이곳까지 어떻게 올 수 있겠어.”

“생각해보니 그건 그렇네.”

“가능성은 둘 중 하나, 진짜 초보자 스펙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던지! 아니면 랭크 점수 보정을 받은 초고수의 서브 캐릭터란 뜻이지.”

“오호.”

“아깐 심하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프로세요?”

프로란 말에 다들 눈빛이 반짝인다.

마스터 리그쯤 되면 열심히 했을 때 프로 2군팀 문턱을 두드려볼 정돈 되는 사람들이다.

가이아 프로리그. 실력있는 유저라면 다들 가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다.

“아! 그래서 가면 쓰고 나오셨구나!”

“음. 죄송한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거 만든 지 얼마 안 된 계정이라···.”

“아.”

“점수 올려야 되는데.”

프로라고 좋아하던 것도 잠시, 진짜 초보 계정임이 밝혀지자 다들 낯빛이 어두웠다.

아무리 프로래도 저런 캐릭터로 1승은 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 번 최선을 다해볼게요.”

응원은커녕 다들 등을 돌리고 잡담이나 나누는 게 나에게 거는 기대는 조금도 없는 듯 보였다.

어쩌다 보니 1라운드에 먼저 나서게 된 나는 왼손에 들린 방패 손잡이를 매만졌다.

잊힌 고무덤의 보스를 잡고 나온 라운드 실드는 특급에 속하는 장비였다.

물론 초보자 기준에서 말이다.

마스터 유저라면 이런 방패,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

오른손에 들린 검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을 때 맵과 대전 상대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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