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49화 (49/170)

챔피언 로드 (1)

존과 계약 얘기를 하기 위해 방문했던 카페, 난 그곳에서 팬클럽 부회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구 팬클럽이냐고? 내 팬클럽이다.

서채린, TV에서 봐도 전혀 위화감 없을 귀여운 친구가 내 팬클럽에서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세상에.

그럼 회장은 누구냐고 물어보니 김민준이란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나는 메시지로 ㅋㅋㅋ를 연타했다.

팀이 아닌 선수 개인 팬클럽은 1군에서도 특별히 인기가 많은 스타 선수의 전유물이다.

전생의 나는 스타 선수와 거리가 아주 멀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국에서 뛰고 있는 것도 아닌지라 설마 내 팬클럽이 한국에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죄송해요! 제가 쫌 늦었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서채린이 다급히 카페로 뛰어들어온다. 고작 5분.

오늘은 내가 부탁을 하는 입장, 조금 큰 부탁이니만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결승전 준비 잘 되셔야 할 텐데. 다들 엄청! 응원하고 있어요.”

“아, 고마워요.”

유니크 노트, 공책 이름 같은 내 팬카페 회원수는 121명.

간밤에 슬쩍 둘러보니 경기 응원 글이 주류였고 사진, 싸인을 받았다는 개인 후기가 올라오곤 했다.

간혹 내 이름을 부르며 킁카킁카거리는 조금 염려스런 인간도 있긴 했지만 그것 빼곤 좋아보였다.

“그런데 대체 왜 카페 부회장을 하는 거예요? 그것도 내 팬카페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건 꼭 물어보고 싶었다.

그랬더니 왜 당연한 걸 묻느냔 표정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멋있으니까요!”

“제가요?”

“음. 오빠가···아, 오빠라고 해도 돼요? 유니크 선수님이라고 해야 하나.”

“편하게 불러요. 상관없으니까.”

“리그에서 가장 멋있게 게임하시잖아요. 스타일리시 하다고 해야 하나? 빠르게 움직이면서 게임을 풀어나가는 거 엄청 멋있어요. 팬카페에 저 말고도 여성 회원분들 꽤 있는 걸요.”

그건 정말 의외인데?

톱레벨을 달리는 선수야 언제나 인기가 많았지만 내가 그렇다고 하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7년 동안 그렇게 살았으니 오죽하랴.

“아, 저 근데 오빠. 제가 오늘은 스케쥴이 바빠서 오래 있진 못할 거 같은데···어떡하죠?”

“괜찮아요. 오래 할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차라리 잘 된 일이다.

누군가에겐 이 예쁜 친구와 대화하는 시간이 포상이겠지만 프로게이머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내겐 아직 거북했다.

바쁜 친구를 붙잡고 얘길 빙빙 돌릴 필요 없으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민준이가 그러는데 전설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창공의 절벽 돌다가 상자를 받았는데 전설 스킬이 나오더라고요.”

무슨 스킬일까. 민준이에게 물어봐도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라며 끝내 알려주지 않아 전설급 스킬이란 것만 알 뿐이었다.

“무도가 전용 스킬인가요?”

그녀의 클래스는 웨폰마스터다.

무도가 스킬이면 서브 캐릭터를 키우거나 마켓에 파는 것 말곤 쓸데가 없으니 교섭하기 수월했다.

“아, 아직 모르셨구나. 공용 스킬이에요.”

공용 전설스킬. 웨폰마스터, 무도가, 다크레인저가 클래스 상관없이 배울 수 있단 뜻이다.

공용 스킬의 경우 티어가 낮아도 몸값이 높은 편이다.

지출이 생각보다 크겠단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다음에 이어진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림자 발자국이라는 스킬인데 혹시 아세요? 정보가 없어서 얼마나 좋은 스킬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크게 놀랐다.

“···그림자 발자국이요?”

“안 좋은 건가요?”

내 안색을 살피던 그녀는 아쉬워하는 기색이다.

굳어버린 내 얼굴을 보고 안 좋은 스킬로 짐작한 모양이다.

순간 그렇게 말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완전 안 좋아요. 무늬만 전설이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그녀는 왠지 믿을 것 같았다.

현재 DB에도 없는 스킬이라 제대로 된 위력을 알 수 없을 테니까.

가이아의 스킬 설명은 하나같이 써보기 전엔 제대로 알 수 없게끔 두루뭉술하게 적혀 있는게 흠이다.

“원래는 좋건 나쁘건 그냥 전설이니까 제가 쓰려고 했거든요. 첫 전설 스킬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안 쓰셨어요?”

“민준이가 오빠가 스킬 구하고 있다는 이야길 했거든요. 스킬이 필요하신 거면 제가 쓰기보단 오빠가 쓰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냥 남겨뒀어요.”

서채린씨 완전 천사!

민준아! 고맙다. 잊지 않겠다.

난 속으로 팬클럽 회장과 부회장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최근 무도가 스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서요. 좋은 스킬 있으면 값을 제대로 쳐줄 테니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럼 이 스킬이 오빠에게 도움이 될까요?”

“아주 좋은 스킬이에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난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다.

스킬을 얻기 위해 팬을 속이는 건 영 못할 짓이었다.

기왕이면 제대로 값을 치르고 정당하게 교환하고 싶었다.

“음. 그럼 오빠한테 드릴게요.”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첫 전설 스킬, 게이머라면 누구나 욕심낼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마스터 리그까지 오른 유저라면 전설 스킬의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신 값은 제대로 쳐주셔야 해요.”

“올해 우승하고 나면 팀 보너스가 들어오거든요. 시세에 맞게 계산해 드릴게요.”

“아. 돈은 괜찮은데, 다른 거로는 안될까요?”

“다른 거라면···?”

“음. 지금은 바로 생각이 안 나서 그러는데 외상으로 달아둘래요.”

그림자 발자국은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뭐든 예스라고 해야 할 정도의 스킬이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는 거로.”

“나중에 딴소리하시면 안 돼요. 부탁 꼭 들어주셔야 해요?”

“죽으라는 것만 아니면 들어줄게요.”

어떻게 살아난 목숨인데 스킬 때문에 또 죽을 순 없지.

아무리 그림자 발자국이라도 목숨은 안 된다.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설마요. 오빠 그럼 저 이만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리고 친구 추가 좀 받아주세요!”

“아, 네.”

“결승전 다 같이 응원할게요. 유니크 파이팅!”

“고마워요.”

그녀가 떠나고 테이블에 혼자 남게 됐을 때, 나는 손에 들린 금빛 스킬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전설급 스킬 - 그림자 발자국 / 청색 공용]

-마력을 소모하여 모습을 감출 수 있다.

정말 간단한 설명.

그러나 제대로 다룰 줄 아는 플레이어의 손에 들어가면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스킬이다.

원래라면 사이클론에게 들어갔어야 할 물건.

미래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손해 보는 기분이었는데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스킬리스트의 전설 카테고리에 new 표시와 함께 그림자 발자국이 등록됐다.

코앞으로 다가온 결승전, 이제 상대가 어떤 수를 준비했다 한들 깨부술 자신이 있었다.

기다려라. 고인물의 매서움을 보여주마.

***

북미 1회 가이아 프로리그 결승전 당일, 구름 관중이 안방 1열로 모여들었다.

안방에서 시청한다고 하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경기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건 가이아 내에 마련된 유료 경기장뿐이고 나머진 대개 TV를 통해 시청할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대된다 기대돼.

-드디어 오늘인가?

-오늘은 S.솔리드과 왕좌에서 내려오는 날이다.

-타도 S.솔리드!!

-백만 년은 이르다 이 자식들아! 어딜 감히!

다른 때와 달리 S.솔리드가 내려올 거란 의견을 보이는 유저들이 제법 많았다.

슈퍼호넷과 레드불스를 가볍게 꺾으며 올라온 레전드크루의 기세가 너무 좋은 탓이었다.

특히 최근 영입기사가 올라옴과 동시에 주전으로 뛰기 시작한 더원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각종 게임 매체는 더원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주목, 같은 한국 출신인 유니크와의 진검승부에 많은 페이지를 할당했다.

아직 가이아 프로리그가 열리는 곳이 북미뿐인지라 해외에선 관심이 적은 편이었는데 한국인 둘이 결승에서 붙는단 소식에 한국 웹진들도 두 선수에 대한 기사를 비중있게 다뤘다.

경기 시작 전, 숙소를 배경으로 찍은 영상이 나왔고 간략한 현장 인터뷰가 진행됐다.

최근 주목받는 양 팀의 선수가 한 명씩 대표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S.솔리드에선 당연히 유니크, 레전드크루에선 최근 기세를 입증하듯 주장 대신 더원이 나섰다.

“유니크 선수, 오늘 컨디션은 어떠세요?”

“아주 좋습니다.”

“벌써 S.솔리드의 멋진 경기를 본 게 오래전처럼 느껴지는데요. 결승전 준비는 충분히 하셨나요?”

-실전 감각 안 떨어졌을까? 리그 뛴 게 거의 한 달 전임

-의심하지 말지어다.

-유멘.

“준비랄게 따로 있나요. 지금까지 했던 대로만 하면 문제 없습니다.”

관중석에서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동시에 울렸다.

“유니크 선수, 언제나 자신있는 태도를 보이셨는데요. 레전드크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짧게 여쭤볼게요.”

“음. 그냥 게임 좀 할 줄 아는 팀이구나 하는 정도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니크는 저런 말 할 수 있지.

-실력없이 입만 털면 꼴불견인데 실력이 되자너

“아직 믿음이 부족한 분들이 커뮤니티에 많은 것 같은데 후회하십니다. 지금이라도 게임 결과를 두고 S.솔리드 패배쪽에 내기를 건 분들이 있으면 무르세요. 무조건 이길 테니까.”

“아, 이렇게 되면 더원 선수의 이야기도 안 들어볼 수가 없는데요. 유니크 선수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니크 선수, 확실히 잘하는 선수죠. 하지만.”

더원은 하지만에 힘을 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결승전은 리그 때와 다르게 팀플레이가 무척 중요한 매치입니다. 조합 시너지가 중요한데 그 부분에선 S.솔리드보다 우리 팀이 훨씬 좋거든요. 자만하면 큰코다칠 겁니다.”

-올 패기 넘치네

-근데 틀린 말 아님. 팀 조합은 레전드가 더 쎔

“그럼 더원 선수. 오늘의 스코어 몇 대 몇으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4:3 아니면 4:2로 이길 것 같습니다.”

“굉장히 팽팽하게 진행될 거 같단 말씀이시네요. 유니크 선수는요?”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4:0입니다.”

“한 판도 내주지 않겠단 말씀이신데 대체 그 조건이 뭔가요?”

한솔은 슬며시 웃으며 더원을 바라봤다.

“더원 선수가 저와 붙는 게 조건입니다. 아니면 내친김에 약속을 할까요? 더원 선수가 이 자리에서 1라운드에 나오겠다고 하면 저는 반드시 1라운드에 나가겠습니다.”

관중석이 술렁인다.

머리 쓰지 말고 1라운드에 한 번 붙어보자는 선전포고.

한솔의 도발에 더원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지간히 자신 있나 보네요.”

“물론입니다. 저한테 이길 자신 있다면 나오세요. 1라운드에서 기다릴 테니까.”

“흥.”

한솔의 도발에 더원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격해지려 하자 인터뷰어는 노련하게 상황을 마무리 짓고 중계진에게 바톤을 넘겼다.

은은하게 분노를 드러내는 더원을 보며 한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그렇지. 아직 경험이 부족해.’

만약 자신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렇게 하자고 답했을 거다. 그래야 상대의 머릿속이 복잡할 테니까.

하지만 더원은 속내를 감추지 못했고 한솔은 원했던 대로 상대에게 거짓 정보를 심는데 성공했다.

S.솔리드가 이번 결승전을 승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팀전이 시작 되는 5라운드 이전에 경기를 끝내는 것이다.

개인 라운드 4:0 스윕.

그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선 더원을 저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전력분석팀의 자료에 따르면 더원의 개인전 실력은 한솔을 제외하면 승리를 장담키 힘든 수준에 올라있었다.

레전드크루 입장에서 보면 개인라운드에서 1승만 따내도 팀전에 돌입하니 1승카드인 더원을 유니크와 붙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양측이 노리는 바가 정확히 엇갈리는 가운데 한솔은 인터뷰를 기회 삼아 상대의 수를 강제하는 노림수를 던졌다.

1라운드에 나가겠다고 한 건 순전히 연막이었다.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상대는 골머리가 아플 터, 1라운드에 더원이 나오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엔트리를 저격할 확률이 몇 배는 뛴다.

분주해진 레전드크루 벤치를 보는 한솔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브라이언 코치는 출격 직전 선발 멤버를 불러모았다.

“한솔이가 떡밥을 잘 깔아놨어. 잘했다.”

“별말씀을요.”

“저쪽에서 더원을 내보낼 확률은 낮아. 더원만 아니면 저쪽에 딱히 조심할 카드는 없고. 우리 1라운드는 마이클이 나간다.”

“예.”

“자. 얘들아. 우리 준비 열심히 했다. 긴장하지 말고, 오늘 다 보여주고 멋지게 마무리하자. 하나둘셋 하고 들어가자.”

“하나. 둘. 셋. S.솔리드!”

“GO!”

경기장의 모든 시선이 엔트리가 공개되는 전광판에 집중됐다.

그리고 잠시 뒤, 엔트리가 공개됨과 동시에 격렬한 함성으로 가이아 1차 프로리그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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