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시즌 돌입 (3)
레전드크루, 현재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도전자.
전력분석팀이 눈이 빠져라 레전드크루의 약점을 찾고 있을 때 난 스크림을 제안했다.
“스크림? 어디랑?”
“블랙이글스요.”
“블랙이글스?”
결승전까지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도 분석팀이 쏟아내는 정보량을 선수들이 버거워하는 마당에 블랙이글스와 스크림을 하자니.
다른 프로팀과 치르는 스크림이야 언제나 도움이 되기 마련이지만 S.솔리드의 강함은 리그에서도 독보적, 어느 정도 상대도 수준을 맞춰야 할 것 아닌가.
“그게 정말 도움이 되겠어?”
“됩니다. 확실합니다.”
꼭 필요한 작업이기에 난 힘주어 도움이 된다 말했다.
적어도 숙소에서 내 의견을 그냥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화 한 통으로 대표에게 200만 달러를 지원비로 받아내는 선수가 또 있을까.
“네가 적극 주장을 하니 바로 연락해보마.”
연습 일정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S.솔리드와의 스크림을 싫어하는 팀은 없으니까.
연습경기는 상대가 강할수록 얻는 게 더 많은 작업이다.
팀의 어떤 부분이 더 부족한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알려면 상대가 약해선 곤란하다.
그런 점 때문에 팀단위 스크림은 언제나 S.솔리드에게 손해였다. 스크림을 뛰면 우리가 얻는 것보다 상대 팀이 얻는 게 훨씬 많았다.
감독은 이 스크림이 마땅찮은 기색이었다.
스크림을 할 거면 차라리 불스나 호넷을 부르는게 낫지 않은가. 포스트시즌 진출도 실패한 블랙이글스라니.
이 스크림에서 배울 게 있나 싶은 얼굴이다.
그나마 팀원들은 내가 적극 주장을 하니 간만에 몸 좀 풀어보겠다며 흥미를 보였다.
*
오후 다섯 시, 커스텀 게임룸에 양팀 선수, 관계자가 모였다.
“S.솔리드가 우리에게 스크림 제안을 할 줄 몰랐습니다.”
양 팀 감독이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다.
“별말씀을요. 블랙이글스도 저력 있는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더군요.”
시작하기 전엔 탐탁지 않은 기색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감독의 얼굴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연기자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다.
인사를 받는 블랙이글스의 감독은 사람 좋아 보이는 호인이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S.솔리드가 그렇게 봐준다면 내년 저희 팀 성적도 더 좋아질 것 같네요.”
“음, 그런데 저희 애들이 결승전 대비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레전드크루 스타일은 좀 변칙적이지 않습니까.”
이번 스크림은 시작 전부터 특별히 팀전만을 플레이하기로 얘기를 끝내둔 상태였다.
문제는 레전드크루의 스나이퍼 조합을 흉내 내기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해당 조합은 장비레벨부터 조율해야지 효율이 나오는 구성이다.
레전드크루가 5라운드에서 워낙 재미를 많이 봐 타 팀에서도 스나이퍼 조합 육성을 고려했는데 이름난 포격사부터 음양사, 희귀한 라이플 장비까지 찾는 데 애를 먹어 아직 제대로 정착시킨 팀이 없었다.
감독이 슬쩍 내 쪽을 돌아보자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내가 블랙이글스와 스크림을 추진한 이유는 레전드크루의 열화판 조합을 보고자 한 게 아니었다.
이번 스크림의 목적은 바로 메테오 밤.
내 머릿속에선 이미 오래전 대처법이 정립된 스킬의 이해를 팀원들에게도 전하기 위함이었다.
“괜찮습니다. 다만 스카라 선수만 엔트리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스카라, 메테오 밤을 장착한 블랙이글스의 엘레멘탈 마스터다. 그가 빠지면 이번 연습의 의미가 없기에 감독이 한 번 더 짚고 넘어갔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블랙이글스 감독은 양손을 비비며 말했다.
*
스크림 돌입 5전째, 경기 결과 5:0.
처음 예상했던 결과대로 나온 셈이지만 팀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S.솔리드의 팀전 구성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고정 멤버다.
실드나이트, 무도가, 아크위자드, 비숍. 흔히 실무아비라 불리는 라인이다.
언제 어디서든 1인분 이상을 할 수 있는 딜러 둘과 든든한 탱커, 부활을 장착한 힐러까지.
팀전에 어울리는 표준구성 조합이다.
하지만 이번 스크림에서 다섯 경기를 치르는 동안 경기 내용은 썩 좋지 않았다.
메테오 밤이 떨어져 경직에 빠질 때면 블랙이글스 딜러진의 날카로운 공격이 쏟아졌다.
나는 힐을 몇 번이나 사용하며 땅을 굴러야 했고 케빈은 부활을 써보지도 못하고 넘어지곤 했다.
평소 리그에서 보였던 압도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선수 개인 능력에 의존해 꾸역꾸역 승리를 챙기는 그림이 계속됐다.
만약 상대가 블랙이글스가 아니라 레전드크루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이대로면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팀은 S.솔리드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팀전에서 메테오 밤이 낼 수 있는 변수가 이 정도인 줄 몰랐던 감독과 코치는 얼굴이 썩어들어갔고 블랙이글스 관계자들은 화색이 만연했다.
저력이 있다길래 흔히 주고받는 인사치레겠거니 했는데 스크림 양상이 나쁘지 않았다.
다섯 판을 내리 지긴 했지만 그 내용이 좋아 개선의 희망이 보였다.
“잠시 작전시간 좀 갖겠습니다.”
“그러시죠.”
“얘들아 모여.”
브라이언 코치는 암담한 얼굴로 입가를 쓸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단 얼굴로 그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도 조합을 좀 바꿔야 할 것 같다.”
조합을 바꾼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 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실무아비를 깨자는 뜻이다.
원인은 메테오 밤을 제대로 못 막는 게 문제였다.
그간 메테오 밤 경기 분석에 따르면 해당 스킬의 위력을 줄이려면 운석이 땅에 꽂히며 터지는 충격파를 막는 게 중요했다.
하늘이 갈라지며 운석이 보이면 우리 팀은 데니스를 필두로 방패 뒤에 모였다.
그 움직임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제리나 케빈의 움직임은 리그 최상위급이었으니까.
문제는 메테오 밤의 궤적이 항상 다른 점에 있었다.
운석이 떨어지는 위치는 순전히 엘레멘탈 마스터의 마음대로였다.
데니스 앞에 떨어지면 방패가 충격파를 받아낼 수 있지만 뒤쪽에 떨어지면 케빈부터 쓸려나갔다.
훅하고 떨어지는 운석을 보고 용케 데니스가 방패 방향을 맞게 잡아도 상대 딜러진이 놀고 있는 게 아니라 무자비한 공격이 쏟아졌다.
뒤쪽에 떨어지는 운석을 막기 위해 등을 보이면 상대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코치의 제안에 팀원들 어깨가 들썩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출전할 기회를 잡게 생겼다.
그것도 무려 결승전, 다들 눈을 반짝이며 코치가 이름을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눈치다.
“어떻게 생각해. 한솔아.”
“저도 일단 조합에 변화를 주는 게 좋다고 봅니다.”
좋다고 보는 게 아니라 변화가 꼭 필요했다.
애초에 스크림을 제안한 목적 중 하나가 고정화 된 5라운드 엔트리를 바꾸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오늘 스크림이 없었더라도 내 말 한마디면 자리를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 입김이 세도 선수가 그런 일을 계획하면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건 팀 스스로 경험에 의해 느끼는 거고 S.솔리드는 스스로 엔트리 유연성의 필요를 깨달았다.
“일단 제리 대신 마이클이 들어간다.”
“으악. 안 돼!”
자신이 지목당하자 제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만 원래 유쾌한 녀석이라 크게 상처받은 기색은 아니었다.
마이클 롱. S.솔리드의 엘레멘탈 마스터.
부름을 받은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마이클을 고른 코치의 선택에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마이클 교체는 우리 팀 선수 풀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제리는 아크위자드, 마이클은 엘레멘탈 마스터.
아크위자드는 1인 화력과 디버퍼를 전담하는 클래스다.
대인전 스킬에 치중됐기에 개인 라운드에선 강세를 발휘한다.
반면 엘레멘탈 마스터는 밸런스형으로 각종 버프와 다양한 속성마법을 다루는 클래스.
팀전으로 역할을 한정하면 아크위자드보다 엘마쪽이 훨씬 더 쓰임새가 많았다.
엔트리에 자주 들진 못해도 마이클 역시 S.솔리드의 주력 딜러 중 한 명.
마이클이 메테오 밤이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춰 마법 저항력을 높이는 레지스트 스킬을 돌리며 실드를 펼쳤다.
운석의 위력이 강해 실드가 곧장 깨졌지만 적어도 스턴에 크게 시달리진 않았다.
또한 헤이스트 마법을 부여해 팀 움직임도 한층 좋아졌다.
적진을 파고든 내가 이전보다 더 빠르게 상대를 녹이자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결승 팀전 멤버는 제리가 아니라 마이클이란 사실을 말이다.
힐러 클래스도 1인 대(大) 힐을 책임지는 비숍보단 버프를 겸한 하이프리스트가 유리하지만 애초 S.솔리드에 힐러는 케빈이 유일하니 지금은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엔트리 변경 이후 치른 열 번의 스크림 역시 S.솔리드의 승리, 경기 양상도 좋아져 분석팀과 코치의 얼굴은 한결 나아 보였다.
“오늘 스크림 안 해봤으면 큰일 날 뻔 했다.”
“한솔이 네 덕이다. 이제 레전드크루쯤 충분히 이길 수 있겠지!”
감독과 코치가 한 목소리로 결승전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엔트리 변경 등 작은 곡절이 있긴 했지만 S.솔리드의 전력을 생각하면 블랙이글스는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대였다.
블랙이글스에 비하면 레전드크루의 전력은 압도적으로 높은 편, 스탯, 장비가 좋으면 스킬도 위력이 더 붙는다.
오늘은 메테오 밤을 무난히 막아냈지만 더원이 쓰는 스킬이라면 다른 그림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는 프로판 관계자라면 누구나 인정했던 톱클래스 선수.
스카라도 프로지만 둘을 비교하는 건 더원 선수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직 부족해.
정규시즌 1위 팀이 결승전에서 고꾸라지는 경우는 프로리그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S.솔리드가 그 주인공이 되는 건 곤란했다.
혹여 결승에서 패배하면 일 년간 열심히 쌓아올린 팀의 영예를 고스란히 넘길 수도 있다.
그건 정말 개 같은 일이지.
“가자.”
“어, 어?”
스크림 결과에 만족하며 쉬려던 마이클을 붙잡아 가이아에 다시 접속했다.
“쉬려고?”
“스크림 빡세게 했으니까 조금만 쉬자···열 경기나 했다고!.”
“응. 안 돼.”
네가 지금 쉴 짬이야?
결승전을 앞둔 지금 이 시간은 돈 주고도 못 살 시간이다. 좀 더 연습할 걸, 조금만 더 했으면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었는데, 피눈물 흘리며 경기 후에 혹은 몇 년 후에 게을렀던 자신을 후회하는 선수는 수도 없이 봤다.
그리고 나도 그런 선수 중 하나였고.
“제레미. 너도 같이 가자.”
“예압.”
스탯도 올리고 장비도 파밍할 겸, 제레미도 호출했다.
팀전엔 내가 올라가겠지만 개인라운드에선 제레미도 1승 카드다.
아마 결승전 당일이 되면 나와 데니스, 제리, 케빈과 마이클, 제레미가 6인 엔트리로 올라갈 확률이 높았다.
남은 기간, 이 둘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했다.
게임을 뛴 마이클과 다르게 제레미는 관전만 하고 있어 아직 여유가 있었다.
“너희들 던전 가니?”
“응?”
“힐러 없이 그런 위험한 곳을 가려고 그래. 같이 가자.”
“어···그래.”
장비 욕심이 났는지 케빈이 냉큼 끼어들었다.
열 경기를 뛴 마이클도 징징거리는데 케빈은 오늘 열다섯 경기 풀타임을 뛰었다.
나야 연속으로 게임을 해도 지치지 않는 강철체력이니까 상관없지만 다른 팀원들은 연전을 치르면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보다 스크림이 널널한 편이었나?
VR게임 피로도는 다른 게임보다 훨씬 심한 편이다.
내가 고갤 갸웃거리고 있을 때 땀에 젖은 데니스가 샤워를 하러 가며 중얼거렸다.
“독한 새끼들.”
저 반응을 보니 확실했다.
케빈의 장비 욕구는 남들보다 강한 게 틀림없었다.
***
결승전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유롭던 숙소 분위기도 서서히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결승전이니만큼 그간 치른 리그 경기와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빡빡하게 던전을 돌고 팀원들과 일대일 매치로 실전 감각을 다듬고 있을 때 오래간만에 민준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형형!
-무슨 일이야. 또 시합 나가야 해서 바쁘다며.
김민준, 미래의 슈퍼스타가 될 재목은 현재 복싱으로 좋은 성적을 올리는 중이었다.
지금까진 복싱이 주, 게임이 부였다.
조만간 나에 의해 바뀔 운명이지만 열심히 공을 들여놔서인지 프로팀 러브콜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형이 무도가 스킬 좋은 거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잖아요.
-혹시 좋은거 떴어?
스킬. 가이아에서 가장 구하기 힘든 게 바로 스킬이다.
장비는 귀속 개념이 거의 없어 쓰다가 더 좋은 장비를 구하면 팔아치울 수 있는데 한 번 배운 스킬은 캐릭터를 통째로 매각하기 전엔 넘기는 게 불가능했다.
현재 암살계의 비중이, 그 중에서도 무도가의 밸류가 높은 상태라 LGE마켓에서도 무도가 스킬을 구하긴 쉽지 않았다.
통 매물이 올라오지 않아 스킬 상자를 뜯고 싶은 충동마저 드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자연의 기운을 소모하면 획득 스킬 레어리티를 올릴 수 있다.
누구나 탐낼 능력을 자체 봉인한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튀니까.
가이아에서 코인을 가장 획득하는 프로 1군 선수들이 평균적으로 획득하는 전설스킬 개수가 1년에 1개다.
운이 좋으면 두 개, 정말 드물게 세 개를 얻는 선수도 있긴 하지만 내 경우엔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용의 충격, 항마장, 교룡뇌조, 천사의입맞춤, 오행방벽, 철의방패. 여신의 은총 혼돈급까지 스킬 박스를 뜯어 얻은 전설만 일곱 개.
이 중에 전직시험 상자는 원래 레어리티 보정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확실히 과했다.
스킬 레어리티야 운이라지만 특정 유저만 계속 득을 보면 밸런스 팀이 가만있을 리 없다.
몇 시즌 뒤면 영원급 스킬도 등장할 텐데 지금은 자중할 시기였다.
-제가 뜬 건 아니고요. 파티 돌다가 업적 달성했는데 상자에서 뜨더라고요. 형도 아는 사람일 텐데?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
민준이랑 같이 던전 돌만한 상위 클래스 암살 유저는 프로를 제외하면 아는 바가 없었다.
혹시 사이클론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채린 누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