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44화 (44/170)

유니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3)

인원 하락은 잠깐이었다.

신규 시청자가 들어오는 속도가 워낙 빠른지라 떨어지던 시청 인원이 다시 상승세를 그렸다.

몇 명 정도 빠졌지?

순간 빠져나간 인원을 가늠해보니 대략 3천 명은 넘었다. 하지만 당초 예상했던 숫자엔 못 미치는 규모였다.

미국보다 시장 규모가 작은, 한국의 중하위권 프로팀 K퀘스트도 당시 퀘스트에 앞서 방송으로 2200명을 모았다.

리그 출범 이후 부동의 1위를 지키는 S.솔리드라면 적어도 1만 명은 모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미리 알릴 걸 그랬나?

방송 시간을 커뮤니티마다 미리 알리지 않은 건 나름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이제와 돌이킬 수도 없고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대화를 나누며 방송을 이어나가자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길을 찾아오는 덴 계급이 상관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고계급 유저들이 먼저 도착했다.

마스터 리그, 그랜드 마스터 리그에 속한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이들 한 명이 지닌 힘은 글로리아 훈련병 열 명 이상으로 봐야했다.

콜로세움에서 마주쳤던 낯익은 유저들이 팬이라며 인사를 건넨다.

그랜드마스터보단 마스터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

최상위 리그인 그랜드마스터 계급이면 프로팀 2군이나 연습생 신분으로 가계약을 맺은 유저가 많은 편이다.

실력으로 볼 때 프로에 가까운 사람들인지라 아무래도 죽음에 따른 패널티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마스터 급은 순수하게 프로팀 선수를 동경하는 즐겜러들이 많은 편이었다.

“어? 또 뵙네요.”

“안녕하세요.”

“닉네임이···채린이었던가? 맞죠?”

“네!”

“닉네임이 본명이에요? 채씨?”

“아니요. 성은 서씨구요. 이름이 채린이요.”

서채린, 마스터리그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미모의 유저.

저번에 봤을 땐 조금 굳어있단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은 훨씬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근데 지금 달려올 정도면 거의 방송 키자마자 봐야할 텐데?

실력이 뒷받침 되면 여성팬도 생기는구나.

혼자 속으로 뿌듯해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어달란 요청이 들어왔다.

“사진요?”

“네.”

무척 기대하는 눈빛,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잡았다.

어깨에서 정확히 1센티미터 좀 안되게 띄워 매너손으로 어깨동무를 했다.

그녀는 사진을 확인하더니 무척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감사합니다.”

“저도 찍을게요!”

“저욧!”

한 명을 찍어주니 다른 사람들도 이때다 하고 손을 번쩍 든다.

누군 찍어주고 누군 안 찍어줄 수도 없는지라 결국 1시간 동안 열심히 사진찍기에 최선을 다했다.

-우리도 신경 써 줘!

-첫방송인데 사진찍기만 보여주는거 실화야?

-이대로 방종하면 가만두지 않게써!

-ㄴㄴ 퀘스트 하는거 보여준다고 했음

-같이 하러 오라고 했지. 보여준다곤 안했음!

약속한 한 시간, 정신을 차렸을 때 텅 비었던 초원은 우릴 보기 위해 모여든 1만 명의 유저와 6만 7천명에 달하는 시청자로 만석이었다.

“진짜 1만 명이 왔어?”

“그렇다니까. 암튼 이쪽으로. 이쪽.”

제리는 팬싸인 하느라 정신없던 나를 단상 위로 이끌었다.

이건 대체 언제 만들었어?

흙으로 만든 단상의 높이는 족히 2미터, 짧은 시간에 높이도 쌓았다.

‘뭐야. 왜 나만 올라가?’

빨리 올라오라고 일행에 손짓했더니 다들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올라오는 친구가 없었다.

주목받는 게 나쁜 건 아닌데···이런 것까지 혼자 하긴 좀 그렇잖아? 아무튼 사람이 모였으니 이제 슬슬 시작해야 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가이아 프로팀, S.솔리드에서 딜러를 맡고 있는 유니크입니다.”

커다란 함성, 거리감이 없는 함성이 코앞에서 터졌다.

프로리그를 하면 6만 관중이 한꺼번에 내는 함성을 매일 같이 듣지만 거리가 가깝기론 이번이 최고였다.

볼륨을 줄여달라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 꾹꾹 누르듯 흔들었는데 어째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보다 못한 엘레멘탈 마스터 팬이 단상 옆으로 올라와 확성마법을 보조해주자 전달력이 훨씬 나아졌다.

“이 자리에 영문도 모르고 나오신 분이 계실까 하여 다시 한 번 퀘스트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앞줄에 모인 인원은 그런 거 안 들어도 괜찮은데 하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꼭 다시 한 번 정확히 설명을 해줘야 나중에 말이 안 나온다.

“이번 퀘스트는 여러분이 수행한 퀘스트 중 단연 가장 어려운 레벨에 속합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 최소 절반은 쓰러질 정도로요.”

-도적 퀘스트 때 얘기 들어보니까 그냥 코파는 수준이었다던데.

-저기까지 간사람 중에 포기할 사람이 있겠음?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자! 어차피 할건데!

“퀘스트 내용은···글로리아 왕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입니다.”

전쟁.

수천, 수만 명이 한 장소에서 부딪치는 힘과 힘의 충돌.

다들 그게 뭐 별건가? 하는 얼굴이지만 가이아의 전쟁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단언컨대 여기 모인 이들 중 전쟁 비슷한 것조차 겪어본 사람은 없을 터였다.

VR게임의 현실성, 그리고 높게 설정된 NPC들의 전투력은 유저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당황하게 만든다.

호러영화 보면 저것들이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무섭지 않은가.

가이아는 스크린 속 인물들이 코앞에서 움직이는 세계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아직 캡슐형 접속기가 보급되지 않았단 점이다.

이제 내년, 통각을 연동하는 전신 접속기가 나오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다시 한 번 나뉜다.

뿐만 아니라 가이아의 모든 컨텐츠가 대격변을 맞이한다.

만약 이들이 가이아에서 고통을 한 번이라도 느껴봤다면 이번 전쟁의 피해는 최소 몇 배는 더 커졌을 거다.

과거 K퀘스트가 유저를 끌어모아 치렀던 전쟁 당시, 갑주를 걸치고 달려드는 기마대의 차징에 전열이 삽시간에 무너져 엄청난 피해를 냈다.

실제와 같은 정도는 아니더라도 전신 접속기가 주는 고통이 살벌한 탓에 진형이 먼저 무너진 것이다.

당시에 비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다.

인원도 훨씬 많이 모인데다 적어도 여기 모인 유저들은 고통이 두려워 스스로 나자빠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 정도 말했으면 설명은 충분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단상 앞으로 모인 1만 명의 유저들에게 퀘스트를 공유했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시야 내의 모든 유저에게 연계 퀘스트를 수락할지 묻는 알림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글로리아 왕국 수호를 위한 전쟁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

퀘스트 대상인 왕국군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접근해 들어오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데다 1만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니 대군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멀리서도 보였다.

“전진!”

확성마법의 힘을 빌려 외치자 1만 명에 달하는 유저들이 일제히 움직인다.

적들 역시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는데 저쪽의 속도가 좀 더 빨랐다.

적들은 본래 오래전부터 합을 맞춰온 왕국 정규군이란 설정이고 일부는 군마를 탄 기마대였다.

전부 보병인 아군에 비하면 빠른 게 당연했다.

-근데 저렇게 뭉쳐서 이동하는거 보기 답답하지 않음?

-유니크가 전략 같은 건 모르나봐

-저렇게 병력이 많으면 나눠야지

-방구석에서 보는 사람들이 말만 많네

-솔직히 지휘는 내가 더 잘할 듯.

시청자 반응을 슬쩍 확인하니 유니크는 책략이 부족하다. 이러다 1만명 모랄빵 난다는 등 험담이 제법 올라왔다.

나는 그들의 의견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 건 철저히 경험에서 비롯된 작전이다.

과거 K퀘스트는 병력을 중앙군, 좌군, 우군까지 3개로 나눠 병법에서 볼 법한 공격을 시도했다.

중앙군이 적을 막아내는 동안 날개로 펼친 양익으로 적을 섬멸하는 계획이었다.

계획 자체는 그럴싸했다.

그러나 실전은 이론과 전혀 달랐다. 당시 선수들이 간과한 건 글로리아 병사들이 아직 훈련을 다 마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유저 역시 마찬가지란 사실이었다.

머릿속에서 그리던 날렵한 전술은 온데간데 없고 덩어리가 작아진 중앙은 적의 돌파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양옆에서 공격하기로 한 날개는 그저 우왕좌왕, 순식간에 각개격파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퀘스트를 깬 게 기적이었다.

난 유저들에게 단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클래스 배치 순서.

방패를 든 탱커가 전열에 서고 그 뒤를 원거리 딜러가 뒷받침하는 구조다.

어차피 병력을 쪼개봐야 지휘도 쉽지 않고, 유저들도 혼란스러울 뿐이다.

양측 거리가 점점 줄어들자 적이 먼저 칼을 빼 들었다.

중앙의 기병을 중심으로 적의 돌진이 시작됐다.

“정지! 마법 준비!”

현재 아군의 원거리 클래스 비율은 대략 2할.

어려운 진형 컨트롤은 무리지만 이동을 멈추고 동시에 화력을 집중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발사!”

4대 원소 마법, 다크레인저의 화살, 포격사의 탄환까지.

엄청난 공격이 쏟아져 나가자 유저들이 도리어 놀랐다.

수천 명이 일제히 쏟아내는 공격은 그야말로 장관, 아마 앞으로도 이런 광경을 또 볼 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공격이었다.

-왐마 화력봐라

-이정도면 퀘스트 금방 깰거 같은데?

-아 패널티 받을까봐 그냥 있었는데 갈 걸;

그러나 낙관적인 반응도 잠시, 아군의 공격이 공중에서 맥없이 터져나간다.

적 기마대를 거대한 마법 결계가 보호 중이었다.

이게 아군과 적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적은 정규군이란 설정에 맞춰 탄탄한 지휘체계 아래 움직였다.

마법사가 동시에 방벽을 만들고, 기병들이 열을 맞춰 달리는 돌진은 당장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양측의 선두가 요란한 충돌을 벌였다.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기마병 앞에 보병이 서면 어떻게 되는가. 볼 것도 없이 잘 다진 육포행이다.

사방에서 욕설과 함께 짓밟히는 유저들이 속출했다.

일부 몸놀림이 좋은 랭커들은 펄쩍 뛰어올라 기수를 붙잡고 넘어졌지만 대부분은 군마에 치여 순식간에 패널티를 먹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저게 몇 명이야

-한 번에 2천명은 쓸린 거 같은데?

-유저가 압살할 줄 알았는데 NPC도 장난 아니네;;

“힐!”

“방패 놓치지 말고 들어!”

“기수를 노려!”

간신히 살아남은 탱커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힐을 부르짖었다. 이곳에 모인 힐러의 숫자는 거의 1500명, 굵은 빛기둥을 연상케 하는 힐의 폭풍이 아군에게 떨어졌다.

적군도 속도가 줄자 그 다음부턴 그냥 진흙탕 싸움이었다.

“조준 똑바로 해!”

워낙 서로가 어지럽게 얽힌 상태라 아군의 눈 먼 마법에 맞아 드러눕는 사람도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퀘스트를 공유한 사이라고 해도 아군의 공격에 무적이 되는 건 아니다.

애초에 가이아는 그런 편리한 시스템보단 리얼리티에 중점을 둔 게임이다.

언뜻 팽팽한 것처럼 보이지만 초반 격돌로 아군이 불리해진 상황, 게다가 혼란한 와중에 적들은 태세를 정비하고 방패 뒤에 숨어 장창을 찌르기 시작했다.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태였다.

-와 적병 클라스봐. 기계네 기계;;

-보기만 해도 숨막힘.

-이번에 솔리드 돕겠다고 모인 사람만 만 명 넘는다던데 이거 깨라고 만든거 맞냐?

-플래티넘 퀘스트라곤 하던데 그래도 너무하네

다들 지오의 밸런스가 엉망이라 입을 모아 비난할 때 일부 시청자는 화면의 변화를 깨닫고 외쳤다.

-유니크 움직인다!

-개인 시야 속도감 지리는거보소

-이게 유니크 시야구나 ㄷㄷ

-프로리그 유료 관중석으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음.

난전이 펼쳐진 전장을 쏜살같이 뚫고 들어가는 움직임에 시청자들이 감탄하는 사이, 마스터 계급 이상으로 추린 정예 유저들이 내 뒤를 따랐다.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확실한 방법, 아군이 전부 무너지기 전에 적 지휘관의 목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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