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42화 (42/170)

유니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1)

시원하다!

전생엔 능력이 모자라 이렇게 날뛰어 본 적이 없는데 혼자 무쌍하는 쾌감은 생각한 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딜러의 자체 체력 회복기는 예상대로 크랙 같은 위용을 발휘했다.

그래도 성능이 좀 아쉽긴 하네.

다른 선수에게 말하면 욕 한 사발 푸짐하게 먹기 딱 좋은 생각.

광채의 신전 업적으로 받은 혼돈의 스킬 박스.

내가 사용한 여신의 은총은 본래 힐러의 전유물이다.

무도가가 쓰는 여신의 은총은 스탯 때문에 힐의 위력이 많이 떨어졌다.

체감상 삼 분의 일 정도?

물론 이 정도만 돼도 상대 입장에선 이를 악물만 했다.

빠른 이동속도에 딜까지 겸비한 암살자가 홀로 체력을 채우며 아군 한복판을 휘저으면 정말 답도 안 나온다.

후방을 확인하니 케빈을 지키던 데니스가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급하면 도와주려 했는데 체력 상태를 보니 거의 정리돼가는 그림이었다. 이쪽도 전투가 격렬해 보진 못했지만 히드라 스피릿에 당한 뒤 부활을 걸어준 거로 보였다.

잠시 뒤, 승리 메시지와 함께 S.솔리드의 28차전 경기가 종료됐다.

경기를 마무리 짓고 여운에 잠겨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인터뷰 마이크가 올라왔을 때였다.

“오늘의 MVP선수, 유니크 선수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최근 S.솔리드가 5라운드 경기만 하면 유니크 선수를 모시고 인터뷰를 하는 것 같아요.”

“다른 선수들에게도 마이크를 좀 넘기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유니크 : 은퇴 전엔 마이크 넘기지 않아.

-음흉하다 음흉해

-마이크 잡고 싶으면 좀 더 잘하라는뜻.

-나 제리 팬인데 그런 날은 영원히 안올거가타···.

“다른 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먼저 2라운드 이야기를 꼭 해야 할 것 같아요. 락사스 선수와 잊혀진 사원에서 대결하셨는데 락사스 선수가 필살기를 사용하셨잖아요?”

아마 히드라 스피릿을 필살기로 착각한 모양이다.

가이아엔 필살기 스킬이 따로 없다. 물론 위력만 놓고 봤을 때 히드라 스피릿은 필살기로 부르기에 충분했다.

“대체 처음 보는 스킬을 어떻게 그리 깔끔하게 막으셨는지 모두가 궁금해하셨거든요. 조금만 비법을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딱히 비법은 없는데···. 오늘 락사스 선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프로리그를 하다 보면 팀의 주력 선수일 경우 감기에 걸려도 그날 경기를 소화해야 하는 경우가 의외로 종종 있다.

감기가 심하면 당연히 플레이에도 영향이 있다.

서버 오픈 6개월째, 신체 컨디션 상태에 따라 게임이 잘 풀리는 날이 있고 아닌 날이 있다는 걸 일반 유저들도 알고 있는지라 내 대답에 다들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다만 당사자는 어처구니가 없겠지.

락사스나 불스 코치가 들으면 얼마나 기가 찰 이야긴가.

히드라 스피릿은 선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정해진 루트대로 들어가는 고정 스킬이다.

설령 지릴 만큼 배가 아파도 스킬 위력이 감소할 일은 없다.

“락사스 선수의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군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프로끼리는 다 알죠.”

-유니크 : 척 보면 몰라요?

-모르면 조용히 하십시오 휴먼.

-락사스 평소보다 더 잘했어 ㅅㅂ;;

-어쩐지 좀 둔한 거 같더라니

-못했다는데 더 잘했다고 하는 앤 뭐냐. 지가 프로야?

“락사스 선수 컨디션이 좋았다면 저도 쉽게 막지 못했을 겁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5라운드 막판에 모두가 깜짝 놀랐어요. 힐을 쓰셨거든요. 무도가가 힐이라니, 어떻게 된 건가요?!”

“음. 일급비밀이라 쉽게 알려드리면 안되는데···.”

말끝을 흐리자 인터뷰어가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다.

“조금만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미녀의 애원은 언제나 상당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당했다는 건 아니지만.

“가이아를 플레이하다 보면 드물게 혼돈의 스킬 상자를 얻을 수 있어요.”

-오! 혼돈! 그게 뭐야?

-그런게 있음?

-첨 들어보는데. 스킬 상자 콜로세움 전용 아닌가

-관중석에 수만 명이 앉아있는데 아무도 모름 ㅋㅋㅋㅋ

-진짜 있음 그런게?

“여러분 진짜 있습니다.”

-어디서 얻는지 알려줘요

-알.려.줘!

-건방진 놈들. 알려주세요. 라고 해라!

-알려주세요 ㅠㅠ

어차피 시간 지나면 알아서 풀릴 거 슬쩍 정보를 풀었다.

너무 재는 척하면 이미지에 안 좋으니까.

“제가 알고 있는 건 고위 던전 업적을 따서 랜덤 박스를 받는 방법입니다.”

-아.

-아···.

-너흰 안된다는 선고

-프로 팀이 도는 상위 던전 영상 봄? 개 토나옴;;

-포기합니다;;

대다수 관중은 포기하겠지만 내 인터뷰를 보고 있는 프로팀은 귀를 쫑긋세우고 있을테지.

무도가가 자체 힐을 쓰는 광경은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프로씬에서도 놀랄만한 일이다.

타 클래스의 핵심스킬을 장착할 수 있는 비법의 실마리를 알려줬으니 당분간 고위 던전에 주력할 게 눈에 선했다.

어디 고생 좀 해 보라고.

광채의 신전이 오픈된 지도 벌써 한 달 이상 흘렀다.

다른 프로팀도 몇 차례 도전 끝에 클리어 횟수를 늘려가는 중이었다.

A급 장비를 드랍한다는 소문이 퍼져 최상위권 유저들의 핫스팟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매달려도 혼돈 박스는 구경도 못 할 터였다.

업적 클리어 조건이 첫 도전에서 완전 정화였으니 말이다.

워낙 던전 난이도가 높아 클리어가 어렵기도 했지만 레드불스나 슈퍼호넷처럼 나름 실력있는 팀들은 진즉 첫 도전을 넘겨 조건이 안 맞았다.

“귀중한 정보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 그리고 최근 가장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너프 이야길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유니크 선수를 제외하면 다들 승률이 많이 저조하거든요. 너프가 크게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불편하죠. 그래도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게 프로니까요.”

-그런데 다 이기잖아;

-형이 다 이겨서 롤백 안하자나!!!

-한 번 져줘라 쫌! 지오도 자존심이 있어!

나는 채팅창에 올라오는 의견을 슥 훑으며 말했다.

“여러분 무슨 유저 한 명 때문에 밸런스 패치할만큼 지오가 동네 구멍가게 아니잖아요? 저완 상관없이 통계를 보고 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뼈 때려버리네 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유니크 아니었음 너프 안했음? 인정? 어 인정.

-지오 순식간에 구멍가게행;

암살계 승률이 처참하게 무너지자 금방이라도 되돌릴 것 같던 너프를 꿋꿋이 유지하고 있는 이유, 여론의 의견은 유니크 때문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너프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 고승률에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게 정상 밸런스라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

나도 그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너프 폭을 최대 10퍼센트 정도로 조절했겠지.

내가 은근히 운영을 까기 시작하자 인터뷰어는 부드럽게 종료 멘트를 올렸다.

방송사가 게임 주최측과 척을 져서 뭐하겠는가. 이대로 놔두면 내가 더 강한 발언을 할 줄 알았나보다.

“유니크 선수의 전승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정말 기대되는데요. 마지막으로 팬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오늘도 이렇게 S.솔리드와 저를 응원하러 와주신 팬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MVP를 받아 이렇게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자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MVP 인터뷰, 팀 에이스라면 자주 있는 자리지만 1군 로테이션을 도는 선수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자리다.

그렇게도 한번 서보고 싶었던 자리인데 이번 생에선 원 없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자주 하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팬들과 나누는 자린 언제나 새로웠다.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만큼 매 경기,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우승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 또 봐!

-내일 보자!

-ㄴㅇㅂㅈ!

-사랑해!

“지금까지 S.솔리드의 에이스! 유니크 선수 인터뷰였습니다.”

***

경기가 끝내고 푸짐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희소식이 들려왔다.

“얘들아. 패치 새로 올라왔다!”

가이아의 새로운 밸런스 조정 공지였다.

[민첩 스탯 속도 밸런스 재조정 안내]

------------------------------

민첩 스탯에 따른 클래스 속도 조절 폭이 8퍼센트로 재조정됩니다.

스피드한 플레이를 주력으로 삼는 암살자는 지금까지 모든 유저들에게 사랑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문제는 암살자의 민첩성이 과해 PVP밸런스가 무너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암살자 클래스의 속도를 줄이기보단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함으로 다른 클래스와의 균형을 맞추고자 합니다.

이전의 속도 조정은 암살 클래스의 승률이 과도하게 떨어져 다소 지나친 점이 있다고 보입니다.

이는 결코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써 이제 본래 암살자 본연의 기획에 어울리는 성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기존 성능에 비하면 속도가 줄어 만족도가 다소 떨어질 수 있으나 일부 암살 클래스 유저의 경우 본래 의도를 넘어서는 위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부 플레이어에게서 암살계 유저들이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민첩스탯에 따른 클래스 속도 상승폭 하향 15% -> 8%

------------------------------

이거 왠지 내 이야기 같은데.

본래 의도를 넘어서는 위력이라니···.

패치 내용을 요약하자면 너프는 완화해주겠다.

하지만 일부 유저(아마도 나)는 이미 기획의도를 넘어서는 운용으로 뽕을 뽑고 있으니 이제 그만 징징거려라.

이런 뜻이다.

그 속내야 어떻든지 간에 좋은 소식이었다.

글로리아 연계 퀘스트 보상으로 잃어버린 속도를 어느 정도 복구해둔 상태였는데 이번 재조정으로 오히려 너프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를 얻게 됐다.

이제 암살 클래스도 살만하겠단 생각과 함께 사이클론이 떠올랐다.

회귀하기 전엔 S.솔리드의 에이스로 팀에 월드 챔피언십 우승컵까지 안겨줬던 선수.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계약 조항 때문에 최소 올해는 프로리그에 나설 수 없다고 했다. 돈은 따로 구했는지 팀에게 반환해야 할 금액은 모두 갚았단 얘기도 들었다.

만약 슬럼프 극복을 도와달라고 했다면 난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을 거다.

그렇게 한밤중에 사라질 거라곤 꿈에도 몰랐지만.

이렇게 묻힐 선수가 아니니 아마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

7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려는 시기에 나는 VR접속기를 벗어던지며 포효했다.

“드디어 끝났다!”

뒤늦게 헤드기어를 벗은 제리가 엄지를 척 치켜세우며 박수를 쳤고 케빈과 데니스도 동참했다.

게임 시작 7개월 차, 유니크의 스탯합이 5천을 달성했다.

프로 선수의 경우 빡세게 굴리면 4개월 정도로도 풀스탯 캐릭터를 육성할 수 있지만 상위 던전도 몇 개 없기에 상당히 오래 걸린 편이었다.

현재 가이아 내의 대륙 탐험 진척도는 35퍼센트.

나머지 65%엔 더 어려운 A급 던전과 S급 던전이 도사리고 있지만 헤르메스에도 신규 던전 정보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대륙 미개척 영역을 탐험하려면 캐릭터 육성은 필수다.

그러나 하루종일 게임 하는 프로도 아직 육성을 끝내지 못했다.

프로 1군의 경우 코인을 보너스로 받기 때문에 일반 유저에 비해 육성이 훨씬 빠른 편이다.

일반 유저는 숙련도 버프를 위해 콜로세움을 꾸준히 돌아야 한다. 그러나 프로 선수는 특권으로 코인을 정기 지급 받는다.

리그를 위해 비워야 하는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육성은 편한 편이었다.

이러면 내년쯤이나 돼야 탐험 진척도가 제대로 오를 판이었다.

연말이나 돼야 헤르메스 휘하 탐험가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너흰 얼마나 남았어?”

“나는 150?”

“나도 그 정도.”

150스탯이면 빡세게 굴려서 며칠 안으로 컷할 수 있는 수치다.

스탯 육성을 마치면 유저는 시간이 남아돌게 된다.

프로라면 매주 있을 경기 대비에 바쁘겠지만 일반인이면 다른 캐릭을 키우거나 미개척 지역 탐험에 나선다.

남들이 밟지 않은 곳을 먼저 개척하면 좋은 점이 여럿 있다. 고위 던전에 관한 정보를 선점해 이득을 보거나 업적 작업도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미개척 지역 탐험에 나서기 전에 아직 해결할 일이 남아있었다.

‘때가 됐다.’

플래티넘 등급에 달하는 글로리아 왕국 재건 퀘스트를 본격적으로 다시 밀어붙일 차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