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변한다 (8)
5라운드.
4:4 팀 게임으로 치러지는 마지막 게임은 가이아 프로리그의 꽃이라 불린다.
“블래스트 캐논!”
제리의 스피카 로드가 밝은 빛과 함께 마력을 태우며 불을 뿜었고 근근이 버티던 적 마법사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자칫 3:1로 패할 수도 있던 경기를 제리가 지켜냈다.
“이 경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S.솔리드 벼랑 끝에서 연장전 승부로 돌입합니다!”
-중계진 신난 거 너무 티남 ㅋㅋㅋㅋ
-꼴좋다! 이놈들!
-아직 백 년은 이르다!
-솔리드 부활!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는 법,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S.솔리드가 끝내 5라운드로 게임을 이어가자 솔리드 팬들은 신나게 불스를 물어뜯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퇴물소리와 함께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소릴 듣고 있던지라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양 팀 신중하게 작전을 짜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줄지 기대되는데요.”
-중계진도 다 알고 있는 거 맨날 모른 척하기도 힘들겠다.
-유니크 그만 보고 싶다.
-응 너만
-응 너만~
-실무아비 출.격!
실드나이트, 무도가, 아크위자드, 비숍.
최근 변한 적이 없는 S.솔리드의 5라운드 구성이었다.
보통 팀전이라는 게 데이터가 쌓이다보면 공략법이 생기기 마련인데 아직 이들은 단 한 번의 침범도 허락지 않았다.
프로팀은 크게 두 가지 구성으로 팀전을 준비한다.
첫 번째는 선수 개인의 능력치를 더 중시해 조합을 맞추는 팀, 주로 상위 팀에서 쓰는 방식이다.
S.솔리드, 레드불스, 슈퍼호넷 같은 팀은 강한 에이스와 서브 선수를 데리고 있기에 선수만 모아 내보내도 기본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두 번째는 조합을 위해 클래스를 맞추는 경우.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레전드 크루의 스나이퍼 조합이 그 대표적인 예다. 따로 떼놓고 보면 별 거 아닌데 조합을 맞추는 순간 서로 단점을 보완, 시너지가 폭발하는 구성이다.
언뜻 들어보면 후자가 좋은 듯 하지만 조합을 위해 클래스를 맞추는 팀은 개인 라운드 승률이 저조해진다.
포격사 같은 클래스는 애초에 대놓고 필드 플레이를 위해 만들어진 컨셉인데 엔트리에 대결이 불리한 클래스를 많이 넣으면 승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쉽게 가겠는데?
제리가 5라운드 까지 끌고 와준 순간 난 팀의 승리를 예측했다.
각 클래스 최고의 선수들이 이곳에 모여있다.
레드불스도 조합보단 선수 개인에 기대는 팀인데 실력 평균을 보면 이쪽이 더 우세했다.
히드라스피릿 때문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팀전에선 문제없었다.
우리에겐 케빈의 부활이 있다. 마수의 독에 당하면 되살리면 그만이다.
경기 준비를 하며 몸을 풀고 있는데 데니스가 내 쪽을 자꾸 흘깃거렸다.
“뭐야? 할 말 있으면 해.”
“아니 너 표정이 조금 이상해서.”
“내가?”
나는 얼굴을 더듬었다. 이상 없는데?
어디가 이상하냐고 묻자 웃는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는 부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레드불스를 요리할 생각에 신이 났던 모양이다.
푸른 막이 주변을 덮으며 관중의 소리가 차단됐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차단막이다.
[5라운드 - 십만 대산]
-와아!
-ㄷㄷㄷㄷㄷㄷㄷ
-리그에서 5라 십만 대산 뜬 거 처음아님?
-맵 개 헬인데? ㅋㅋㅋㅋㅋㅋㅋ
발 밑이 좁아진다 싶더니 구름위로 솟은 기암괴석으로 변했다.
팀원 모두가 당황한 눈치로 날 바라본다.
이건 나도 예상 못 했는데.
레드불스의 조합은 실드나이트, 무도가, 엘레멘탈 마스터, 아크위자드였다.
힐 없이 딜에 기대는 조합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엘레멘탈 마스터는 밸런스형 마법사다.
힐은 못해도 아군에게 실드를 씌워줄 수 있고, 결정적으로 부유마법이 가능하다.
적어도 십만 대산에선 레드 불스의 안정성이 우리 팀보다 높았다.
적 무도가가 먼저 움직여 외곽을 돌기 시작했다.
눈치 보다가 케빈을 암살하려는 게 분명했다.
힐러 본인이 죽으면 부활 스킬도 소용없다. 케빈이 S급 힐러인 건 틀림없지만 오늘 처음 본 히드라스피릿을 연습도 없이 막긴 불가능했다.
아니, 애초에 연습을 해도 힐러는 못 막는다.
각자도생(各自圖生).
데니스에게 케빈의 호위를 부탁한 뒤 제리와 함께 적을 향해 뛰었다.
이대로 가만히 멈춰 서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다. 장거리에서 적 마법사 둘이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하면 제리 혼자선 역부족이었다.
데니스는 리그 최상위 탱커, 히드라스피릿을 상대로 설령 죽는다 해도 케빈만 지키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 후방은 믿을 만 했다.
부유 마법을 믿고 혼자 절벽 위를 신선처럼 밟는 엘레멘탈 마스터를 향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순간 바위 벽을 뚫고 올라오는 화염의 뱀이 다리를 스쳤다.
이런 느려 터진 마법으로 날 묶어보려고?
제리한테도 평소에 이야기했지만 마법사는 지식을 좀 챙길 필요가 있다.
아직 서버 오픈 일 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마법사 대부분은 마력을 최우선 스탯으로 관리했다.
마력 최대치를 늘려주는 데다 마법의 위력을 강화해주기 때문이다.
지식 같은 경우는 마법 자체의 마력 소모량을 줄여줌과 동시에 캐스팅 속도에 영향을 끼친다.
지식을 올릴수록 더 빠르게 마법을 쓸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마력과 지식은 일대일 비율을 선호하는데 서버 대세는 일단 마력이었다.
속도를 보니 마력을 정말 극한으로 챙긴 게 분명했다.
그러나 마법이 아무리 강해도 맞추지 못하면 소용없다.
반격을 못 하게 마환지와 항마장으로 견제하며 들어가자 엘마 주변에 단단한 실드가 펴졌다.
이거 왠지 데자뷰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20연승으로 커뮤니티를 파이어 냈을 때, 그때와 비슷했다.
다만 그 땐 실드를 치는 동안 다른 선수가 녀석을 도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비프로스트와 페어를 이룬 아크위자드는 제리가 묶어둔 상태라 엘레멘탈 마스터를 도와줄 동료는 없었다.
난 잽싸게 실드 위로 올라가 주먹을 퍼붓기 시작했다.
용의 충격으로 실드를 연달아 때리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었다.
실드 안 멈출거야? 눈빛으로 그리 말하며 계속 실드를 깨자 엘마는 이를 꽉 물고 실드를 걷었다.
내 주먹이 발을 딛던 봉우리로 떨어지자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윽!”
쏟아지는 파편에 얻어맞은 상대는 반대편 봉우리로 날아가 부딪혔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대에게 그대로 달려든 내가 교룡뇌조를 펼치자 엘마의 몸이 꺾이며 더 깊이 절벽에 박혔다.
-으아ㅇㅏㅏㅏㅏㅏ!
-저런 잔인한 놈!
-우리 엘마 괴롭히지마아아아!
통제불가 상태에 빠진 마법사의 몸 위로 묵직한 연타를 쏟아냈다.
“인페르노!”
최후의 발악이 제법 매서웠다.
그러나 전설급 스킬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선 위력이 급감한다.
불길을 항마장으로 밀어내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자 엘마는 실 끊긴 인형처럼 구름 아래로 떨어졌다.
*
“유니크-!! 너무나도 무서운 선수입니다.”
“킹오브몬스터다운 실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와이드 선수의 분전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졌거든요. 다시 티르윙 선수에게 합류할까요? 회복을 받고 다시 전투를 하지 않으면 힐러를 최종전에 포함시킨 이유가 없···.”
“아! 말씀드리는 순간 다시 달립니다! 후방으로 가는 게 아니라 아크위자드를 향해 달려듭니다!”
제리의 남은 체력은 28퍼센트.
실드나이트 뒤에 숨어 마법을 때리는 2:1 플레이 속에서 용케 잘 버티고 있었다.
‘왔다!’
혼자 둘을 마크하고 있던 제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엘레멘탈 마스터를 처리한 한솔이 바람을 타고 뒤로 접근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제리를 두들기던 불스의 아크위자드는 질색하며 지팡이 끝을 돌렸다.
체력이 거의 바닥 난 제리보다 유니크가 훨씬 위험한 존재였다.
“레드불스 선수들이 갈라집니다! 비프로스트 선수가 아그니 선수를 마크하러 나서는군요.”
“몸놀림을 보세요. 단단한 탱커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날렵합니다.”
-아빠 힘내!
-이건 진짜 잡았다.
-아그니도 거품 좀 많이 꼈지. 검증 들어간다!
-빛프로스트···.
비프로스트를 응원하는 무수한 채팅의 물결.
그는 레드불스의 정신적 지주였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선수였다.
실드나이트라고 하면 보통 중갑주를 걸치고 묵직한 걸음걸이를 떠올리곤 한다.
물론 대부분 선수가 그런 이미지에 맞게 플레이하는 건 사실이지만 비프로스트는 예외였다.
그는 큰 몸집에도 아크나이트처럼 민첩한 움직임으로 봉우리를 밟으며 접근, 제리를 압박했다.
개인 방송을 자주하는 그가 고등학교 때까지 NFL(미국프로미식축구)을 노리던 피지컬 괴물이란 사실은 이미 유명했다.
코뿔소처럼 달려드는 탱커를 보며 제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버틴다!’
‘쓸데없는 짓을.’
경기 중엔 선수 간 대화를 할 수 없다.
심한 경우 패배 처리가 되기에 각 팀 코치는 아예 게임할 때 이 꽉 물고 있으라고 조언할 정도다.
그런데 신기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도 경기에 몰입하면 눈빛만으로 대화가 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냥 편하게 누워. 고생하지 말고.’
‘싫은데.’
마법을 노말 소드로 가르고 들어오는 비프로스트는 공포 그 자체, 안 그래도 체력이 바닥인 제리는 버티고 또 버텼다.
28퍼센트였던 체력 바가 어느새 10퍼센트 아래로 뚝 떨어졌다.
‘헛수고를!’
비프로스트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지자 제리의 지팡이에 불꽃이 튄다. 실드나이트가 수비 특화이긴 해도 공격스킬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유니크를 믿고 버티나 본데.’
유니크가 정말 뛰어난 선수인 건 인정하지만 이번엔 어림 없었다.
갈라지기 전, 아군 체력은 99퍼센트나 남아있었다. 이쪽도 명색이 프로다.
거력을 담아 방패로 후려침과 동시에 검술 스킬을 발동하자 한틱 남아있던 제리의 체력이 0으로 변해 흩어졌다.
육체가 흩어져 리타이어하는 걸 확인한 비프로스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풀고 몸을 돌렸다.
아군이 쓰러지기 전에 합류해 이 대 일로 승부를 지을 참이었다.
쿠구궁-!
봉우리 너머, 아군이 있던 자리는 대마법의 여파로 먼지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설마 싶었다.
S.솔리드 마법사를 자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 남짓 아니던가. 유니크가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그 짧은 시간에 풀체력인 아군을 자를 순 없었다.
잠시 뒤 먼지기둥을 뚫고 그림자 하나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비프로스트는 혼이 나갈 뻔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저승사자, 유니크였다.
‘침착하자. 아직 내가 유리해.’
유니크의 남은 체력은 고작 11퍼센트, 평범한 연계기 딱 한 번만 넣어도 게임을 마무리할 수 있는 수치다.
승부를 급하게 짓느라 무리한 게 틀림없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아직 80퍼센트 넘는 체력이 남아 있는 상황.
그는 제리를 덮쳤을 때처럼 봉우리를 넘으며 달려들었다.
“차징!”
방패를 앞으로 돌려 어깨를 밀착시키고 들이받는 강공.
초근접 거리에서 들어오는 차징은 면적이 넓어 완벽히 피하기 힘들다.
상대 체력 게이지가 8퍼센트로 떨어지자 비프로스트의 얼굴에 희열이 감돌았다.
‘내가 끝낼 수 있다!’
아무도 무릎 꿇리지 못한 리그의 지배자를 쓰러트릴 절호의 기회였다.
비프로스트는 눈에서 불을 뿜으며 마력을 퍼부었다.
방패와 검을 동시에 움직이며 강공을 넣자 유니크의 체력이 줄어드는 게 보였다.
관중석도, 중계진도 숨넘어갈 듯 소리치며 이 전투의 끝을 주시했다.
“비프로스트! 유니크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습니다! 라이징G.C전 이후 처음입니다! S.솔리드, 대위기!”
“유니크. 시간 벌어야 돼요. 덤비지 말고 뒤로 빠져서 후방 팀원들이 도와주길 기다려야죠! 무모합니다!”
-왜 안 빠지는 거야!
-미쳐버린 거시야!
-아 제발;;
-못보겠네 ㅅㅂ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엄청난 공방.
체력이 떨어지면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음에도 기계처럼 틈을 찾아 반격을 하는 유니크, 단 한치의 딜레이도 없이 스킬을 연계하는 비프로스트도 한계를 넘은 것처럼 보였다.
이제 유니크의 남은 체력은 2퍼센트.
강공 한 번 스치기만 해도 패배하는 수치.
반격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비프로스트의 체력도 50퍼센트까지 떨어졌지만 그의 표정에선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비프로스트는 그대로 검을 찔렀다. 상대의 어깨를 향한 검 끝이 어깨에 닿는 걸 느꼈다.
그 때 유니크의 오른손은 번개를 두른 채 자신의 목줄기를 파고드는 중이었다.
어깨에 검을 찌르는 것과 목으로 들어오는 뇌격은 데미지에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비프로스트는 아랑곳없었다.
어차피 한 방, 스쳐도 이기는 게임 아닌가.
‘너의 그 오만함이 승부를 갈랐다!’
자신이 유니크였다면 먼지구름을 뚫고 나오자마자 후방으로 합류해 힐러의 지원을 받았을 터다.
고작 11퍼센트였던 체력으로 자신의 체력을 3할이나 날린 괴물.
체력을 회복하고 왔다면 오늘 불스에게 기회는 없었다.
“죽어!”
경고를 받는단 사실도 잊어버린 비프로스트는 악에 받친 외침과 함께 그대로 어깨를 찔렀다.
드디어 리그의 괴물을 잡았단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러나 짜릿함도 잠시, 느낌이 이상했다.
‘원래 이렇게 늦게 사라지던가?’
팀전에선 캐릭터의 체력이 바닥나면 빛가루로 흩어져 퇴장한다. 그런데 무도가는 여전히 그의 눈앞에 남아있었다.
희열에 잠겨 컨트롤을 완전히 놓은 비프로스트와 달리 유니크의 손발은 여전히 기계처럼 움직여 체력을 도려냈다.
뭔가 잘못된 걸 깨달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
급소에 박힌 교룡뇌조가 몸에 경직을 가져왔고 반격할 틈도 없이 체력이 순식간에 바닥을 찍었다.
“···?”
정신을 차려보니 벤치였다.
세상이 떠나가라 외치는 함성이 주변에 가득했고 모두의 시선은 아직 끝나지 않은 무대에 꽂혀 있었다.
눈만 깜빡거리던 비프로스트는 스크린을 보더니 낮은 신음을 흘렸다.
“말도 안 돼···.”
마법이 부딪쳐 엉망이 된 봉우리 위, 검은 연기를 두른 무도가가 스스로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