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변한다 (6)
S.솔리드의 엔트리는 사이클론 탈퇴 이후에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1. 피닉스 (데니스 트란) - 실드나이트
2. 레인엑스 (존 테일러) - 버서커
3. 유니크 (정한솔) - 무도가
4. 아폴로 (조던 데이비스) - 아크 위자드
5. 아그니 (제리 우드) -아크 위자드
6. 티르윙 (케빈 스미스) - 비숍
정규 리그에선 항상 5라운드를 염두에 둬야 하기에 나, 데니스, 제리와 케빈은 고정직이었다.
남은 두 자리는 딜러를 두고 로테이션을 돌렸는데 오늘 주인은 존과 조던이었다.
관중의 우레와 같은 환호 속에 입장한 둘은 비장한 표정을 머금었다.
나는 저 친구들이 사뭇 비장한 이유를 짐작했다.
제레미 때문이었다. 최근 나와 제리가 돌아가며 일대일 훈련을 봐주고 있었는데 성장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면 이미 로테이션을 도는 팀 내 딜러진을 상대로 충분한 승률을 거둘 정도였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존과 조던이었다.
이제 그들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레미가 리그에 합류하면 다섯 자리가 고정이 될 테고 남은 인원은 단 한 자리를 두고 박터지게 싸워야 한다.
그 전에 인상적인 활약을 하지 못하면 당분간 무대는 고사하고 대기실 냄새도 못 맡는 수가 있었다.
“1라운드 누가 나갈래.”
“제가 하겠습니다.”
“저도 할 수 있···.”
시즌 초엔 맵이 공개되는 2, 4라운드에 상성을 맞춰 출전하길 선호했던 팀원들이 이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아니란 걸 깨닫고선 손을 번쩍번쩍 든다.
코치는 잠시 고민하더니 1라운드 출격 선수로 조던을 낙점했다.
존은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입단 테스트 때 2패를 한 게 충격이었는지 최근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실을 지키는 존이었다.
다만 프로 레벨에 다다르면 연습량을 늘린다고 실력이 오르는 건 아니라는 게 그에게 있어 불행이었다.
상성 면에서도 조던을 내보내는 게 무난했다.
최근 암살계열 너프로 적이 암살을 내보낼 확률은 거의 없었다. 만약 탱커가 나온다면 상성 우위, 마법사가 나와도 동 클래스 대결이 된다.
[1라운드 - 벽람 초원]
[S.솔리드 아크위자드 vs 레드불스 엘레멘탈 마스터]
벽람 초원, 장애물 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 언덕맵. 상대 팀 선수를 본 브라이언 코치가 가슴을 쓸었다.
엘레멘탈 마스터, 그것도 무한맵.
안그래도 이동속도가 느린 버서커를 무한맵에서 마법사한테 붙였으면 3분 내내 맞기만 하다 끝났을 터다.
불스 마법사의 견제용 화염구가 쏟아지자 조던이 좌측으로 피하며 맞사격을 시작했다.
순간 화력집중은 아크위자드가 강하지만 유틸 스킬은 엘레멘탈 마스터의 우위, 불스의 마법사는 헤이스트, 매직실드를 걸고 장기전 준비에 들어갔다.
엘레멘탈 마스터에게 버프가 있다면 아크위자드에겐 디버프 스킬이 있다.
다만 이 두 종류 스킬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으니 바로 타겟 유무였다.
버프는 아군에게 거는 스킬이지만 디버프는 적에게 거는 스킬이다. 아군은 버프를 받지 않으려 피하는 법이 없지만 디버프 스킬은 상대를 반드시 ‘맞춰야’ 발동한다.
물론 타겟 디버프 스킬이 없는 건 아니나 드물었고 위력적인 스킬일수록 이런 패널티로 밸런스를 유지했다.
“슬로우!”
“그라비티!”
조던의 디버프 스킬이 몇 번 상대를 스쳤다. 그러나 속도가 느려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불스 마법사의 속도는 과장 좀 보태면 거의 암살자 수준이었다. 스킬이 자꾸 빗나가니 조던도 쉽사리 스킬을 쓰지 못했다. 마력을 낭비하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마력이 모자라게 된다.
상황은 조던에게 불리하게 흘렀다.
무엇보다 내 눈에 거슬린 건 상대의 아이템 세팅이었다. 가이아엔 무한대에 가까운 서로 다른 장비가 존재한다.
이름이 같아도 스탯이 조금씩 갈려 같은 아이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솔직히 프로레벨에서 주로 쓰는 스킬을 다 외우는 것만 해도 머리 깨지는 일인데 장비를 외형만 보고 맞추는 건 이미 인간의 저장 능력을 초과하는 일이다.
그러나 스펙을 달달 외우는 게 아니라 대략 어떤 아이템일 것이다 외우는 건 할 만했다.
장비의 정보가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유는 향후 장비세팅도 중요한 승리 요소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마법 클래스를 상대로 할 때 마법 저항력에 관여하는 인내 스탯 위주의 장비를 세팅하면 보다 대결이 수월해지는 맥락이다.
저거 마저 세팅 같은데.
광채의 신전 급 A레벨 장비를 구할 수 있는 던전이 하나, 둘 풀리고 있는 시기라 장비 외형이 눈에 익었다.
쪽잠 자가며 그림책 보듯 공부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오래전에 공부했던 케케묵은 정보가 저 아래 깔려있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런 감각이다.
장비 정보를 주섬주섬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을 때 솔리드 팬들의 비명이 울렸다.
불의 뱀이 지면에서 치솟아 조던의 몸을 옭아맸다.
제압기를 겸하는 전설급 스킬, 프로미넌스 씰이었다. 엄청난 수증기가 일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조던이 수(水)계 마법을 이용해 어떻게든 버터보려 했지만 화염의 뱀이 내뿜는 화력이 터무니없이 강했다.
애초에 제압기 스킬은 안당해주는 게 최선인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를 악물고 빠져나온 조던의 전신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은 체력 26퍼센트. 겨우 한 번의 적중으로 너무 많은 체력을 빼앗겼다.
아무리 전설급이라 해도 공방 밸런스 타입인 엘레멘탈 마스터 스킬치고 너무 강했다.
-뭐야 저게. 제압기가 아니라 대인공격기 수준인데;;
-장비에 돈을 얼마나 쓴거냐 ㄷㄷ;
-불스가 드디어!
-설레발 ㄴㄴ
마법 저항 세팅을 볼 때부터 불안했는데 불스 마법사의 장비는 조던보다 몇 배는 비싼 게 틀림없었다.
“드래곤 브레스!”
이대로 지긴 억울했는지 틈을 노리던 조던의 손에서 푸른 화염이 초원 위를 날아 뿜어졌다.
커다란 용이 뿜어낸 듯한 불길이 지팡이 끝에서 쏟아지자 그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아크위자드 스킬 중 이름에 드래곤이 들어가는 것들은 대개 전설급 스킬들이다.
불의 위력은 확실히 의심할 여지 없이 전설급이었지만 놀랍게도 불스의 엘레멘탈 마스터는 손 한 번 까닥하는 것으로 공세를 차단했다.
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거야?
어쩌면 레드불스 쪽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좋은 관계자가 있어 일찍 스킬을 쓸어담아둔 걸 수도 있다.
조던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한 엘레멘탈 마스터의 스킬은 오행방벽, 오행 속성을 이용해 다섯 겹의 단단한 방어벽을 생성하는 전설급 방어스킬로 전에 나도 박스에서 뽑은 적이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반격을 할 땐 프로미넌스 씰이 아닌 진짜 공격용 전설급 스킬로 치고 들어오기까지 했다.
벌써 전설급 스킬만 셋, 드래곤 브레스 하나에 초월급 스킬 위주로 전투하는 조던과 전력 차이가 너무 컸다.
질적으로 장비와 스킬이 모두 밀리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프로레벨에서 이기기 쉽지 않다.
그나마 조던이 유리한 것이라곤 스탯 완성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장비 차이에 묻혀버린 감이 컸다.
“아! 조던 선수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레드불스, 시원하게! 그야말로 시원하게 1라운드를 잡아내며 1승을 올립니다.”
“S.솔리드의 1라운드 패배는 처음이 아니지만 오늘은 왠지 느낌이 다르군요?”
“칼을 갈고 나온 느낌입니다. 오늘의 불스는 확실히 날이 서 있습니다.”
관중석이 들끓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해도 만년 2위 팀이란 소릴 듣던 억눌려있던 팬들의 응어리가 한방에 터지며 경기장은 온통 불스를 외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번에야 말로 S.솔리드를 타도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불스 관중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수고했어.”
“괜찮아. 잘했어.”
돌아온 조던을 팀원들이 다독거리는 사이 2라운드 맵이 오픈됐다.
잊혀진 사원.
바닥을 부수고 플로어를 바꿀 수 있는 복층 구조 맵.
코치는 전광판에 떠 있는 상대팀 엔트리를 보며 고민했다. 현재 S.솔리드에 남은 딜러는 버서커, 아크위자드, 무도가 셋.
잊혀진 사원 정도면 밸런스가 어느 정도 맞는 맵이라 버서커를 내보낸다면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문제는 상대도 우리 엔트리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거란 점이다.
데니스나 케빈은 개인 라운드에서 쓸 일이 없는 카드다.
조금 양보해서 실드나이트는 라플라타 같은 맵이면 어찌 써볼 수는 있긴 하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선 버서커를 내보내는 게 백번 나았다.
레드불스도 개인전에 나올 것으로 추측되는 인원은 셋, 웨폰마스터가 한 명, 아크위자드가 둘이었다.
팀 간판인 비프로스트와 대기중인 힐러는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존, 어떻게 생각해.”
“지금 나가면 저격당할 거 같은데요.”
버서커는 발이 느려 아크위자드를 상대하게 되면 히트 앤드 런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암살자 너프 이후 암살 클래스 유저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다 보니 자연스레 백색계열 유저들도 할 일이 없어졌다.
물고 물리는 상성관계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자, 이제 작전시간도 겨우 20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불스는 이미 선택을 마친 것 같은데 솔리드, 고민이 깊은가 봅니다.”
1~4라운드간 의논시간은 고작 1분. 고뇌하던 코치는 선택은 결국 나였다.
“올라가라. 한솔아.”
나를 바라보는 코치의 눈빛에 무한한 신뢰가 엿보였다.
2라운드에 나를 내보낸 선택은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상대가 3:0 셧아웃을 노린다면 이번 판은 아크위자드를 내보낼 확률이 높았다.
제리를 내보내도 되겠지만 4라운드에 유구의 천칭같은 마법사 우위 맵이 뜰 경우를 대비한 선택이었다.
“과연 양 팀의 선택은···아, S.솔리드. 여기서 필승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프로리그 유일! 20전 이상 선수 중 전승을 달리고 있는 바로 그 선수입니다.”
조금 전까지 활활 타던 불스팬들의 기세가 신기루처럼 줄더니 압도적인 솔리드 팬들의 환호가 일었다.
“S.솔리드 팬분들이 유니크를 부르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입니다. TV로 보고 계신 시청자분들도 잘 들리시겠죠?”
입술을 비죽 내민 불스 팬들은 이 상황이 못마땅했는지 채팅 치기 바빴다.
-제발 유니크 1패 하는 것좀 보면 소원이 없겠다.
-나는 불스 우승보다 저 자식 언제 넘어질지 그게 기대됨 ㅇㅈ?
-인정;;
물론 이런 이야긴 거의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유니크 마렵다는 채팅이 줄을 이었다.
[2라운드 - 잊혀진 사원]
[S.솔리드 무도가 vs 레드불스 무도가]
당했다.
상대 클래스를 본 순간 직감했다. 1라운드 수싸움은 잘 해냈는데 2라운드는 실패였다.
무도가 등판은 내가 올라올 것에 대한 저격 엔트리였다. 상성상 버서커에게 밀리는 웨폰무도가를 지금 내보낼 이유가 없었고 제리를 노렸다고 보기에도 근거가 빈약했다.
머리에 총맞지 않은 이상 지금 타이밍에 제리를 내보낼 이유가 없다는 걸 저쪽도 알고 있다.
결국 저들이 노린 건 나였고 맞춤 엔트리 저격에 성공했다.
어디 불스 암살자 실력은 어떤지 구경이나 해보잔 마음으로 부동보를 밟았다.
프로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덕목은 승리.
팀을 위해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그 덕목을 누구보다 잘 지키는 나의 신형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엔트리 싸움이 밀려 아쉬운 이 감정을 상대에게 때려 박을 참이었다.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스텝으로 거리를 좁힌 뒤 용의 충격으로 간을 보려던 찰나, 상대의 몸에서 보라색 기운이 피어올랐다.
용의 머리처럼 살아움직이는 아홉 갈래 기운이 상대를 뒤덮는 걸 보며 나는 재빨리 몸을 비틀었다.
이런 젠장!
전력으로 치고 나가다 방향을 바꿀려니 스텝이 엉켜 힘들었다. 갑자기 비틀거리며 턴하는 나를 보며 상대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도 네가 나만큼 당황하진 않았겠지. 하마터면 손도 못 써보고 골로 갈 뻔했다.
“아, 무슨 일이죠? 유니크 선수 돌진하다 말고 방향을 급히 틀었습니다.”
대체 저 스킬이 지금 왜 풀렸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번 생은 좀 더 익스트림한 전장이 된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