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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32화 (32/170)

퀘스트로 스텝 업 (2)

가이아의 모든 NPC, 사람이건 짐승이건 이 세계를 구축하는 생명체들은 유저의 존재와 상관없이 제 알아서 움직이는 존재다.

인간형 NPC만 따져도 족히 수천만 명은 될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숫자지만 웬만해선 유저가 NPC와 드잡이질할 일은 없다.

유저라면 대부분 보상이 없는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

성문을 지키는 가드, 가끔 바가지를 씌우는 상점 주인, 이런 캐릭터와 승강이 벌여봐야 시간만 날리고 얻는 건 하나도 없다. 아니, 오히려 손해다.

가이아의 오픈 구역은 PK금지다.

맘에 안든다고 서로 욕은 할 수 있어도 치받고 싸우진 못한다. 물리력을 행사하려들면 규정에 따라 감옥으로 이동해 벌을 받는다.

NPC괴롭히려고 주먹이라도 뻗었다간 꼼짝없이 시간 죽이는 셈이 된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면 특정 트리거가 발동되었을 경우, 가이아의 AI가 유저의 일방적인 무력행사로 판별하지 않을 땐 감옥에 가지 않는다.

지금이 바로 그런 예외였다.

마차에 실린 물건을 노리는 도적 떼가 말을 몰고 초원 너머 언덕을 내려오는 게 보인다.

“제리. 올 때까지 안 기다려도 돼. 저거 달라붙으면 성가셔.”

마차는 열 대나 되는데 지키는 인원은 파티 인원 넷을 제외하면 고작 열 명 남짓이다.

그에 비해 달려드는 도적들의 숫자는 족히 쉰 명을 넘었다.

프로선수가 고작 도적한테 질 리 없지만 마부는 예외다.

마부가 죽으면 마차를 직접 몰던지 다시 도시에 가 새로 인원을 충당해야 한다.

금쪽같은 시간 낭비하기 싫으면 선공이 필수였다.

“저거 쏘라고?”

“우리 죽이려고 달려드는 도적한텐 마법 쏴도 감옥 안 가.”

“가기만 해 봐라.”

감옥을 갈 바엔 차라리 데스패널티가 낫다.

적어도 필드사(死) 했을 땐 콜로세움이라도 뛸 수 있으니까. 감옥에 갇히면 그조차 못한다.

제리의 지팡이 끝이 빛나더니 주먹만 한 불덩이를 길게 끌며 요격마법 수십 발이 쏟아져 나간다.

수준급 마법이 우수수 날아들자 도적들은 좌우로 산개해 외곽을 돌았다.

이만하면 겁을 먹고 도망갈 만 한데 저쪽도 생계가 궁한지 어떻게든 승부를 볼 기색이다.

유저와 달리 NPC는 기본적으로 목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한 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마차를 몰던 마부들은 죄다 마차 아래로 숨어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우리가 질 것 같으면 당장 묶인 말을 풀어 도망가고도 남을 녀석들이다.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마법을 뚫고 들어오는 도적을 검지로 가리켰다.

도넛 모양으로 가운데가 뻥 뚫린 흑색 고리가 총알처럼 날았다.

초월급 스킬인 마환지는 항마장에 비해 위력은 낮지만 마력효율이 탁월한 스킬, 소를 잡긴 좀 그렇고 닭잡는 덴 딱 맞았다.

“못보던 스킬인데?”

체력 회복마법을 준비하고 사방을 게 눈깔로 요리조리 살피던 케빈이 흥미를 보였다.

“원거리 견제 수단이 부족해서. 쓸만한 거 하나 달았지.”

그간 원거리 대응책으로 백보신권, 열양장 같은 전설급 스킬을 염두에 뒀는데 요즘 무도가 주가가 퍽 올라서인지 LGE마켓에도 전설은 고사하고 초월급 스킬도 거의 씨가 말라 가격이 미쳐 날뛰었다.

프로리그를 호령하는 부동의 1등, 내가 클래스간 밸런스를 무너트린 탓이었다.

자연의 기운으로 뽑기 운에 기대려 해봐도 박스 오픈만큼은 레어리티만 높여줄 뿐, 직업을 저격하지 못해 선뜻 손대기 애매했다.

기운을 불어넣기만 하면 전설등급을 뽑아낼 수 있으니 계속 돌리다 보면 언젠가 원하는 스킬이야 나오겠지만 단기간에 전설급 스킬을 수십개씩 뽑아내면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NPC가 스탯 숙련도는 생각보다 많이 주나?”

마차에 들러붙기 전에 적을 정리한 제리가 숙련도를 살피며 말했다.

광채의 신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부족한 숙련도였으나 양쪽에 드는 시간과 노력이 달랐다.

도적은 마법 몇 번 휘저으면 끝나는 상대고 신전 마법사들은 항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태로 여덟시간 가까이를 돌아야 하니 성가신 점에서 비교 불가였다.

“도적도 아이템을 주네.”

등급은 그리 높지 않았다.

C급 장비도 안 되는 물품을 들고 다니면 무겁기만 하다.

쓸데없이 남아도는 잡화를 마부에게 넘기자 마차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

밤이 깊었지만 마차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라 말도 지치지 않았다. 지친 건 사람뿐이었다.

제리는 이따금 하품을 했다. 혹시나 불청객이 찾아올까 아무런 불빛도 내지 않았는데 달빛에 비친 치아가 반짝인다.

새벽 2시, 골수 폐인 유저거나 밤낮이 바뀐 사람을 제외하면 다들 자는 시간에 우린 국경 근처를 넘고 있었다.

이대로 목적지에 도달하나 싶던 찰나,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멀리서 어둠을 타고 날아들었다.

“뭐야. 이건.”

“국경수비대.”

나는 짧게 답했다.

글로리아 왕국 퀘스트는 내가 깬 게 아니지만 당시 적을 두고 있던 프로팀이 직접 깼던 퀘스트여서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달빛에 비친 백금색 플레이트 메일이 반짝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무장기마를 타고 달려오는 기사는 오전에 몇 번 쓸어낸 도적과는 전혀 다른 기세를 풍겼다.

“저것도 잡아?”

“여기서 멈추면 오늘 한 거 전부 무효야.”

제리는 혀를 차며 불폭탄을 터트렸다.

“차징!”

쐐기 대형을 이룬 기사들이 푸른 벽을 두르자 마법이 허무하게 증발했다. 그 광경에 일행 모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저것들 기껏해야 마스터 레벨 수준도 안 돼.”

“미친···.”

케빈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날 쏘아봤다.

프로의 눈높이에서 볼 때 마스터 등급은 한참 모자란 게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일대일 대결일 때 이야기다.

당장 각직업 마스터를 모아놓고 일대다 전투를 치르면 땅에 벌렁 누울 프로가 부지기수다.

심지어 지금은 1:4도 아니다. 이쪽은 단 넷, 저쪽은 마흔 명에 달하는 정규군이다.

“어쩐지 네가 가져오는 일치고 너무 쉽다 했다.”

한숨을 쉰 제리는 그 자리에서 마법 캐스팅을 준비했다.

주변 공기를 훅 빨려들어가더니 푸른 빛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만한 기세면 드래곤 웨이브를 웃도는 물건이다.

“삼십초!”

저 외침은 완성까지 삼십초가 필요하단 뜻, 이대로 두면 그전에 랜스 차징으로 골로갈 판이라 미리 나서 기사들을 맞이했다.

풀을 밟고 뛴 내 몸에 정확히 랜스가 꽂힌다. 도적떼와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의 정확성, 체력이 후두둑 깎이는 걸 느끼며 투구 틈 사이로 비친 면상에 드래곤 테일을 먹였다.

콰당 소리와 함께 기사가 낙마했고 말 머리를 지그시 누르니 말이 넘어져 대번에 대형이 꼬인다.

선두가 땅을 구르니 뒤도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 아니면 전부 낙마를 면치 못하니까.

속도가 확 죽은 기사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기사들은 고삐를 당기며 투레질하는 말을 달래다 말고 내 공격을 받아야 했다.

항마장이 사방으로 터지며 플레이트 메일을 때렸다.

그러나 혼란도 잠시, 평소 훈련을 열심히 했는지 열 명씩 짝지은 기사들이 날 원형으로 포위해 창을 찔렀다.

아무리 내가 날고 기어도 위아래를 전부 막고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전부 막진 못한다.

그림자 서곡의 은신효과를 이용해 간신히 자리를 피하자 하늘의 먹구름이 열리더니 불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캬! 숙련 경험치 미쳤네!”

제리는 불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는 기사를 보며 시시덕거렸다. 누가 보면 완전 사이코 그 자체였다.

케빈의 힐이 칼같이 들어온 덕에 난 죽음을 면하고 불구덩이 속을 빠져나왔다.

“이놈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코린트 왕국의 칼날이 너희를 끝까지 쫓을 것이다.”

“한솔아. 여기서 좀 더 비비고 있으면 이런 애들 더 오지 않을까?”

용의 충격으로 기사를 두들겨 패던 내게 제리가 물었다.

“안돼. 그땐 국경수비대 수준이 아니라 정규군이 들이닥칠 텐데 우리 넷이서 국가랑 전쟁할래?”

실제로 오랜 가이아 역사속에 국가를 상대로 또라이짓을 한 유저, 단체는 종종 있었는데 전부 결말이 좋지 못했다.

일단 그런 일을 벌이면 서버 리셋 전까진 그냥 숨도 못 쉬고 도망만 다니는 경우가 허다했다.

국가단위 추격 명령이 떨어지면 유저가 유저를 쫓는 일도 벌어지니 사실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마지막 남은 기사를 발로 밟아 처리한 후 숙련도를 확인하니 확실히 많이 오르긴 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연계퀘스트, 과욕은 금물이었다.

“게임이 너무 실감 나는 것도 문제네.”

케빈은 불탄 기사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던전 몬스터처럼 죽는 즉시 빛가루로 변해 사라지면 좀 덜할 텐데 피가 잔뜩 묻어 사방에 널브러진 모습은 거부감이 들만 했다.

제리에게 부탁해 커다란 구덩이를 판 뒤 기사들을 모두 한자리에 묻었다. 추격대가 우릴 쫓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해안가를 끼고 지어진 성채는 오랜 풍파를 맞아 색이 바랬다. 글로리아 왕국 수도의 인구는 약 10만, 그 10만 인구 대부분이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다.

날이 밝을 즈음 맞춰 성에 도착한 우린 곧장 대소사를 책임지는 궁정마도사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왕국에 이걸 전부 기부하시겠단 말입니까?”

“예.”

퀘스트를 시작한 지 어느새 20시간째, 우리의 목소리엔 살짝 피곤함이 묻어났다.

마차 열 대 분량, 성에 있는 병사를 전부 지급하기엔 부족하겠지만 일개 파티가 가져오기엔 엄청난 물량이었다.

지금까지 왕국 방문 퀘스트를 수행한 이들 중 병장기며 갑옷을 들고 온 이들은 없었다.

구호물자라고 적혀있으니 기껏해야 빵과 곡식류 식량들. 그쪽이 무기보다 훨씬 싸지만 그마저도 수레 열 대 분을 가지고 온 사람은 없었다.

헤르메스에 올라오는 정보는 모두 헤르메스 측에서 사비를 들여 들어가는 품삯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수치를 써넣는데 당시에 그들이 가져온 구호물자도 식량 세 수레에 지나지 않았다.

고작 실버 퀘스트.

우리가 들고온 물자는 이게 연계 퀘스트의 발단이며 그 끝에 좋은 보상이 있다는 확신이 있지 않다면 준비할 수 없는 물량이었다.

“그간 많은 모험가들이 우리 왕국을 불쌍히 여겨 도움의 손길을 건넸지만 병장기는 처음입니다. 굳이 이걸 고른 이유가 있습니까?”

궁정마도사의 질문에 팀원들이 전부 날 바라본다.

우린 답을 모르니 네가 대답하란 재촉이다.

“글로리아 왕국은 비록 지금은 잠시 몸을 낮췄지만 언제든 일어설 저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걸 위한 도구입니다.”

마도사가 눈을 깜빡인다.

“물고기를 잡아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오. 유식해 유식해.”

추임새를 넣던 제리의 입을 데니스가 붙잡았다.

마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드립니다. 아직 정의가 죽지 않았음을 신께서 증명하시는군요. 여러분은 우리 글로리아 왕국의 은인입니다. 부디 저희 왕국을 조금만 더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이펙트가 터지며 업적이 달성됐다.

[백경해안 글로리아 왕국 방문 퀘스트 완료]

[업적 왕국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를 달성했습니다]

[비밀 퀘스트 글로리아 왕국 재건을 시작합니다]

숨겨진 퀘스트라는 이야기에 눈빛을 반짝인 팀원들은 퀘스트 등급을 확인하고선 헉소릴 냈다.

“플래티넘이라고!”

<백경해안 글로리아 왕국 재건 비밀 퀘스트>

등급 : 플래티넘

해안가에 웅크려 있던 왕국은 그대들의 도움으로 다시 눈을 떴다. 이제 이 작은 왕국을 도와 본래의 영광을 되찾을 때다.

왕국을 도와 재건 작업을 시작하라.

골드 등급 퀘스트만 해도 희귀한 편, 플래티넘은 지금 가이아에 등장한 등급 중 최상위였다.

보상도 하나 같이 대단하고 그에 걸맞게 지랄 맞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퀘스트 뿐이었다.

“업적도 확인해봐.”

나는 웃으며 팀원들에게 방금 달성한 업적을 상기시켰다.

“홀리 쉣!”

◆초월급 업적 - 왕국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글로리아 왕실이 필요로 하는 대량의, 진실된 도움을 선사했습니다. 왕국은 그대를 귀빈으로 대우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보상 : 강화효과 글로리아의 귀빈 부여. 클래스 주력 스탯 +20%

암살계의 주력 스탯은 민첩. 업적을 통해 강화를 부여한 순간 곧바로 민첩 스탯이 20퍼센트가 추가로 적용 됐다.

단숨에 체력이 늘어난 데니스나 마력 보정을 받은 제리는 어깨를 흔들며 리듬을 탔다.

“진정해. 이제 시작이야.”

난 흥분한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이제 시작이었다.

글로리아 재건 퀘스트는 내가 겪은 7년의 가이아 역사 속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에도 프로선수 개인 재량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규모여서 구단이 직접 달라붙어 서포트를 해야 했다.

그렇게 돈을 쏟아 붓고도 실패할 뻔 했다. 만약 실패했으면 게임단이 공중분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크다.

일감은 성공적으로 잡았는데 혼자 소화해낼 수 있는 크기가 아니기에 난 열심히 머릴 굴렸다.

과거 한국 게임단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조만간 회장님하고 식사를 또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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