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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31화 (31/170)

퀘스트로 스텝 업 (1)

“정말 수고 많았···.”

브라이언 코치는 어깨 위에 손을 얹으려다 말고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의 MVP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정한솔이었다.

경기를 터트리고 여유로운 태도로 인터뷰까지 마친 그는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는 얼굴로 팬들에게 응원해주셔서 고맙다고 말하던 녀석이기에 코치가 느끼는 감정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무슨 문제 있어?”

“문제요? 아니요.”

그리 말하는 한솔의 표정이 빠르게 누그러졌다.

코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몇 초 전의 표정은 사람 하나 죽일 기세였다.

상황을 모르고 간식과 들고 돌아온 선수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한솔을 칭찬했다.

“우리 에이스가 최고다!”

“자자, 모두 박수!”

제리가 운을 떼자 다들 즐거운 기색으로 박수를 쳤다.

한솔은 고맙다며 동료들의 인사를 받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표정, 급격한 변화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코치만이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다 자리를 떴다.

*

게임은 끝났는데 내 뇌는 여전히 화학반응이 한창인지 좀처럼 식을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드레날린이 돌아 전투태세에 막 들어갔는데 싸울 상대가 없어진 그런 기분이다.

경기에서 이겼음에도 이런 엿 같은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멍청한 자식. 오만한 자식.

나는 자책하며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바깥에 물이 가득 찬 풀장에 몸을 던지면 효과가 좀 있겠지만 누가 보면 저새끼 약 잘못 먹었냐고 할 거다.

근데 풀장에 물은 받아놨던데···.

풀장 다이브대신 냉장고 문을 열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통째 잡고 퍼먹으니 속이 좀 낫다.

내가 스스로에게 화난 이유는 간단했다.

남들과 비교해 절대적인 시작우위를 지녔음에도 질 뻔했다는 것, 매일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프로를 상대로 대충 손대중할 생각에 더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3일을 쉰 여파로 이미 팀 전승이 깨지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참가한 경기는 지는 일 없이 무패을 노리던 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3, 4년 후에도 충분히 통할 리그 최정상 피지컬에 손만 댔다 하면 터지는 전설 스킬 박스, 레어리티 장비를 뽑아내는 신의 손까지 가지고 있는 놈이 리그 시작 한 달 만에 1패?

물론 5라운드는 4:4 게임이니 그럴 수 있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다.

···아니, 그건 변명이지.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면 팀 단위 레벨을 끌어올리면 된다.

제리와 케빈을 키우고, 장비를 맞춰주는 작업도 다 그런 일의 연장선이다.

다만 그 준비가 부족했을 뿐이다. 그간 나태했음을 받아들이자 냉정함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진 게 아니니까.

전승 우승은 아직 사라진 꿈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 주 마지막 경기였기에 이틀 하고도 반나절의 시간을 벌었다.

아이스크림 통을 옆으로 치운 나는 폰으로 경기 반응을 검색했다.

홀로 경기를 캐리한 무도가를 칭송하는 반응을 보고 싶어서 뒤적거린 게 아니다.

혹시나 오늘 경기로 여론이 뒤집혔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오늘 경기에서 유니크는 여전히 날아다니더라.

지오의 밸런스 패치, 생각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했다등의 의견이 올라오면 내 입장에선 심히 곤란하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새로 캐릭터를 키우는 방법도 있지만 스탯이 문제다.

당장 프로레벨급 스탯을 지닌 타 클래스 계정을 영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계정 매매가 자유롭다곤 하나 매물이 없다.

다행히 패치를 옹호하는 의견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경기도 유니크니까 캐리했지 암살클래스는 쓰레기 맞단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유저들 의견에 큰 변화가 없다면 지오도 오래 버티진 못할 터였다. 해링턴 대표 쪽에 출전 압박을 넣을 정도면 저쪽도 상태가 좋진 않단 뜻이다.

“코치님.”

코치는 이제 기분 좀 풀렸나 하는 눈치로 내 안색을 살핀다.

“오늘 레전드 크루에서 짠 조합이요. 누구 아이디어로 만든 건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조합의 구성, 스펙은 어느 팀이건 대외비다.

리그가 한창 진행돼 이미 다른 팀에 팔릴 대로 팔린 조합이 아니라면 승리를 가져다줄 비장의 무기니까.

그러나 브라이언 코치는 어렵다는 말 대신 왜냐고 물었다.

원래 스나이퍼 조합이란 게 지금 등장하면 안 되거든요. 어떤 놈이 미래에서 보고 베낀 건 아닌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면······또라이 확정이니 적당히 둘러댔다.

“확실히 참신한 조합이더라. 포격사 낀 구성으로 그런 위력을 낼 줄 누가 생각했겠어. 힘 닿는 데까지 알아볼게.”

전생의 내가 본격적으로 가이아를 시작한 건 내년부터다. 당연히 이 시기의 북미 팀들이 어떤 전략을 썼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정보가 전혀 없는 구간이기에 어쩌면 정말 스나이퍼 조합이 이 시기에 반짝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오늘 경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레전드 크루가 들고 나온 스나조합은 약점을 보완한 완벽한 구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감은 분명 전생과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켰다.

반 년 뒤에나 있을 암살 클래스 너프가 당장 적용된 것만 봐도 내가 쥐고 있는 정보 상당수가 조만간 쓰레기통으로 갈 확률이 높다.

“뭐 봐?”

선수는 대게 경기가 끝나면 배가 고프다. 특히 오늘처럼 마지막 경기에 걸리면 1경기부터 쭉 대기하고 있어야 하니 더욱 그런 편이다.

1층으로 내려가 배를 채운 케빈은 손에 피자조각을 들고 흥미롭게 내 모니터를 바라봤다.

“헤르메스?”

“정보사이트야.”

“이거 그 돈 내고 보는 거 맞지? 비싸다던데.”

케빈이 흥미를 보이며 소파에 앉았다.

“우리 에이스가 또 뭔가 준비하고 있었네! 그래서 뭐 좀 좋은 소식 있어?”

“글쎄.”

헤르메스에선 비색의 동굴, 광채의 신전 위치 같은 가이아에서 가치 높은 정보를 제일 빠르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찾는 건 난도 높은 던전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다.

광채의 신전 던전 등급은 현 최상급 난도인 A, 더 큰 보상을 원한다면 S급 던전 뿐인데 S급은 지금 개방될 시기가 아니다.

내가 찾는 정보는 퀘스트였다.

스탯 단련에만 몰두해 초반 퀘스트를 전부 건너뛰긴 했지만 일반 유저들에게 퀘스트는 필수였다.

마을과 필드를 바삐 오가며 낭비되는 시간이 더 많아도 유저들은 퀘스트를 좋아했다.

그게 게임답고 재밌으니까.

나처럼 그저 스탯에만 몰두해 초반 퀘스트를 전부 거르고 오직 사냥에만 집중하는 유저는 흔치 않았다.

스탯도 아니고 초보용 장비 몇 개 건지자고 마을과 필드를 쓸데없이 오갈 생각은 없어 퀘스트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제는 시기가 무르익었다.

슬슬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상회하는 특급 퀘스트들이 뜰 시기였다.

<혈제의 열쇠 업적으로 시작하는 퀘스트 단서>

이건 뱀파이어 로드 처치였던가.

품은 품대로 팔고 보상은 별거 없는 쓰레기 퀘스트였던 거로 기억한다.

<동방신전 수호자들의 기록 퀘스트 단서>

이것도 아니고···.

고위 퀘스트는 하나 해결하는데 짧아도 일주일, 길면 한 달 이상의 시간이 드는 것들이다. 신중하게 고를 수밖에 없었다.

애매하게 좋은 것들은 일단 미뤄두고 당장 팀 전체 전력에 도움이 되는 퀘스트를 먼저 찾았다.

<백경 해안 글로리아 왕국 방문 퀘스트 단서>

등급 : 실버

이제는 황무지가 된 백경 해안을 낀 왕국을 방문하라.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구호물자를 넉넉히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하나를 건졌다.

실버 등급이면 브론즈보단 어렵지만 게임에 익숙해졌으면 도전해볼만한 수준이다.

헤르메스 자체 평가에 의하면 품이 나빠 도전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저 구호물자 해결을 위해 드는 돈은 상당한데 보상은 형편없는 탓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걸 고른 이유는 퀘스트에 숨겨진 정보를 꿰고 있는 덕이다.

왕국 방문 퀘스트를 시작으로 스케일이 점점 커져 나중엔 저주받은 세력을 상대로 전쟁까지 벌이게 된다. 족히 한 달은 걸리는 여정이다.

여느 게임이건 마찬가지지만 유저를 골탕먹이려는 계획이 아니라면 고된 만큼 보상은 좋기 마련이다.

글로리아 연계 퀘스트를 모두 마치면 스탯창에 비어있는 강화효과가 채워진다. 스탯 10에도 눈 돌아가는 프로선수들인데 퍼센트 단위로 뛰는 스탯이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케빈. 같이 일 하나만 하자.”

“응?”

***

가이아는 하나의 잘 짜여진 세계다.

어느 게임평론가가 남긴 말이다. 가이아 유저라면 누구나 인정했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워지는 NPC의 행동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시즌 초기 NPC들은 어딘지 딱딱한 구석이 있었는데 서버 가동 120일이 훌쩍 넘은 시점에선 머리 위의 마크를 가리고 대화하면 이게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슈퍼 AI가 유저의 말과 행동을 전부 습득 중이라는 이야기가 제법 그럴싸했다.

“날씨 좋네.”

케빈, 제리, 데니스.

레전드 크루와의 일전을 함께 끝낸 동료들과 함께 나는 초원에서 짐 나르는 일을 감독 중이었다.

본래는 마커스(사이클론)와 함께할 참이었다.

연패 이후 엔트리에서도 빠진 게 충격이었는지 요즘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였다.

그러나 나의 권유에도 그는 컨디션이 말이 아니라며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마커스대신 데니스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짐을 잔뜩 실은 마차가 삐걱거리는 소릴 내며 열심히 움직인다. 바퀴를 땅에 가라앉게 만들 정도로 수레를 가득 채운 건 검, 창, 갑옷 등의 전쟁물자였다.

“난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제리는 마차 지붕에 앉아 투덜거렸다.

다른 선수들은 스탯 육성을 하기 위해 일분이라도 더 던전을 구르고 있을 시간이다.

그런데 한가롭게 초원을 가로지르는 마차 감독이라니.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이건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린 격이었다.

“진짜 너 아니었음 던전 돌러 갔다.”

“우리 놀러 가는거 아니야. 퀘스트야. 퀘스트.”

“그래 퀘스트. 그것도 실버 퀘스트.”

제리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죽 늘어선 행렬을 훑었다.

마차 열 대 분량이 넘는 전쟁물자를 구입하는데 드는 돈은 유저의 예상을 훌쩍 넘었다.

스킬은 결투장 코인으로 구하고 레어리티 아이템은 던전 파밍으로 구하는 게임이라 화폐 가치가 높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많이 들어가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다 좋자고 하는 일이기에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팀원들에게 돈을 걷었다. 그러고도 모자란 금액은 달러를 주고 얻어왔다.

“설명을 좀 해주지 그래?”

침묵을 지키고 있던 데니스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어차피 알게 될 거 조금 정보를 풀기로 했다.

“백경 해안에 왕국이 하나 있어.”

“어? 백경 해안? 거기 연인 스폿이잖아!”

안 그래도 나쁜 제리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간다.

가이아의 모든 유저가 레벨업과 장비 파밍에만 치중하는 건 아니다. 현실보다 더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 위해 게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유저도 많다.

백경 해안, 흰 고래가 물을 뿜으며 숨고르기 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해서 유저들이 제법 많이 모이는 장소였는데 입소문이 난 뒤론 연인들이 득시글대는 장소가 됐다.

“조용히 해 봐. 그래서?”

“그 왕국이 상태가 안 좋아. 연달은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지고 외부의 도움없인 재건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

본래는 퀘스트를 나눠주는 궁정마도사가 들려줄 이야긴데 내가 먼저 풀었다.

“글로리아 왕국 재건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의 시작에 불과해.”

“연계퀘스트? 가이아에도 연계 퀘스트가 있나?”

“단발 퀘스트밖에 없을걸?”

“아냐. 글로리아 퀘스트는 연계 맞아. 내가 정보사이트에서 봤어.”

헤르메스에도 없는 내용이지만 의심하는 친구는 없었다.

“오호라. 그 이야길 진작 해야지. 뭔가 대박 냄새가 나잖아. 안 그래?”

제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연계퀘스트라니, 시간과 노력을 쏟는 일일수록 보상이 좋은 건 이 바닥 불변의 법칙이다.

“근데 이 속도로 언제 도착해. 텔레포트 못 타나?”

“이 물자를 전부 전송진으로 옮기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걸. 연봉을 전부 금화로 바꿔도 될까 말까 하겠다.”

도시간 텔레포트 기능은 대인 전용. 대규모 물자 수송용으론 부적합한 물건이다.

퀘스트 장소 근처에서 물자를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인근 왕국 물자는 전부 통제된 상태였다.

멀쩡한 왕국 하나 망하면 영토가 넓어질 거로 생각해 삼엄한 감시가 이뤄진 탓이다.

“심심할 틈은 없을걸?”

오히려 연계퀘스트 중엔 던전 뺨치는 수준으로 어려운 것들이 많다.

던전은 아무리 길어도 플레이 타임 8시간 안쪽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퀘스트엔 그런 제한이 없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 사이에 도적 떼의 습격이라도 당하면 수레에 들어간 돈은 그냥 눈 녹듯 사라진다.

우리가 밥먹으러 간다고 마차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제리가 날 쳐다보는데 흙먼지와 함께 언덕 너머에서 땅을 울리며 뭔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손님들 오신다.”

“···?”

나는 장갑을 끼며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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