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리그 개막 (1)
오래간만에 모습을 드러내 가이아 유저들에게 나의 존재를 제대로 각인시킨 날, 나는 랭크 76위로 플레이를 마무리 지었다.
본래 계획은 연승으로 1위를 달성하기였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도중에 접기로 했다.
랭크 매칭에 걸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문제도 있었다. 상위권 선수들은 가이아에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내 연승 행진이 모든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으니 자신 없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발을 빼 점수를 유지하길 선택한 것이다.
레드불스 1군 4인 팀을 이긴 뒤엔 이 현상이 더욱 심해져 게임을 한 번 잡는 데 걸리는 시간이 10분이 넘었다.
운영 측에선 이런 매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 대기시간에 걸린 유저에게 점수와 코인을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장치를 마련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상위권 유저들이 나와 제리 듀오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고 있단 뜻이었다.
“오늘 수고했어.”
“왼손은 거들뿐이지. 덕분에 코인 잘 벌었어!”
제리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연승 보정이 상당했는지 오늘 번 코인으로 한 달은 충분히 버프를 사고도 남았다.
“아까 보니까 불스 마법사 둘을 상대로도 거의 밀리지 않던데?”
“그 정돈 아니고 버틸만은 했지.”
“불스가 불쌍하다.”
잠시 접속을 해제하고 간식을 먹고 있을 때 팀원들이 다가왔다. 내 강력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팀원들이다.
S.솔리드의 팀원들은 스탯을 담금질하기 위해 사흘 전부터 광채의 신전 클리어에 도전 중이었다. 하지만 성적은 썩 저조한 편이었다.
“신전 도전은 잘 돼 가?”
“잘 될 리가 있나.”
“진심 토 나오더라.”
사이클론을 비롯한 팀원들은 나와 케벤, 제리의 첫 트라이 영상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새기고 공략법을 숙지했지만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었다.
팀원 일부는 데스 패널티로 성장 후유증까지 앓고 있는 상황, 나는 변화를 줘야할 때라 판단했다.
“제리. 오늘은 사냥 따로 하자.”
내 제안에 우유를 마시던 제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설, 설마 날 버리려는 거야?”
“그게 아니고 리그 시작 전까지만 따로 움직이자.”
현재 각 프로팀에 리그 일정과 룰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 엔트리 구성에 필요한 1군 12인을 전부 마감한 상황.
현재 S.솔리드에 마법사 클래스는 총 네 명.
가이아는 필드 사냥으로 캐릭터를 육성하는 작업을 빼놓을 수 없기에 같은 팀원이래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웬만하면 파티를 구성할 때 직업이 겹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팀 내 육성도는 너무 나와 제리, 케빈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걸 어떻게든 손봐야 하는 시점이었다.
리그 시작까진 아직 한 달 정도가 남아있는 상황.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에 제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내가 뭘 잘못한 거야!”
“그게 아니라 지금 너하고 나랑 케빈이 신전 클리어 경험이 많잖아. 우리가 친구들을 좀 도와주자는 말이야.”
“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파티에 제리나 케빈이 투입되면 클리어 확률은 상당히 올라가게 된다. 이미 저 둘은 스탯은 물론이고 장비 면에서도 독보적인 레벨에 올랐다.
내 계획은 남은 한 달 동안 우리 셋이 찢어져 잠시 성장이 늦어지고 있는 팀원들을 돕는 것이었다.
“그럼 한솔이 너는 누구랑 가게? 제리가 빠지면 마딜 클래스 한 명 정돈 필요 하잖아?”
슬쩍 보니 다들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대하는 눈치다.
나랑 함께하는 파티가 더 좋은 레어리티 장비를 구할 확률이 높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했다.
팀원들의 기대는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선약이 있었다.
*
-너 오늘 시간 된다고 했지?
-주말엔 저도 쉬거든요. 하루 종일 게임할 수 있어요. 그나저나 형 영상 봤는데 쩔던데요. 가이아 아는 사람들은 죄다 형 얘기밖에 안 해요.
-내가 게임 좀 하는 편이지. 아무튼 보내준 좌표로 와. 텔레포트 있지?
오늘 내가 제리 대신 섭외한 일일 딜러는 김민준이었다.
한국이 배출한 세계 최강의 마도사 레이저. 향후 한국으로 복귀해 정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미리미리 인맥을 닦아둘 필요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이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어린 레이저는 예의 바르게 솔리드 팀원들에게 인사했다.
“어, 어 반갑다.”
어딘지 어색하게 웃는 팀원들. 왜 아니겠는가.
리그 개막 한 달을 앞두고 스탯을 담금질하는 중요한 시기에 외부인을 끌어들였으니 말이다.
광채의 신전은 아직까지 공략법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상위 랭커들 사이에서도 발길이 뜸한 장소, 어려운 만큼 스탯 숙련도를 올리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인데 그런 좋은 기회를 외부인과 나누는 격이다.
아마 코치도 이 광경을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을 텐데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어쩌면 한소리 들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반응이 없었다.
그만큼 팀 내에서 보이지 않는 내 파워가 크다는 뜻이리라.
대표와 식사를 하며 의견을 나누는 팀의 에이스에게 나무랄 사람은 현재 숙소에 없었다.
‘팀에 좀 미안하긴 해도 어쩔 수 없지.’
S.솔리드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니고 길어야 2년이다.
미리 나중을 생각해두지 않으면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극단적인 예로 당장 솔리드에서 쫓겨난다 한들 이제 평범한 상위 랭커가 아니기에 얼마든지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합류할 한국 팀에 레이저가 없다면 그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이 어린 친구는 향후 3년 뒤, 내 피지컬에 준하는 실력을 갖춘 천재 게이머가 된다. 반드시 잡아둬야 할 영입 인재 1순위였다.
오늘 하루라면 팀에서도 달리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진 않았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
최종 성장을 위한 한 달의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났다.
5월 2일, 마침내 가이아 1차 시즌 북미 프로리그 개막일이 도래했다.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국내에선 경기 날마다 용산 스타디움에 모여 오프라인 경기를 했는데 북미는 온라인으로 경기를 치렀다.
워낙 북미 땅덩어리가 크지 않은가. 하루에 한 번씩 경기를 치르는 가이아 프로리그 특성상 북미 전역에 위치한 팀들이 매일 모이는 건 힘든 일이다.
물론 이 방식은 임시로써 1년 간만 유효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실제로 내가 알던 미래에선 그렇게 진행됐다.
내년부턴 지오 본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경기장에서 정규 시즌을 치르게 된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인데 이 1년간 온라인으로 대회를 진행하며 지오는 같은 대륙내 플레이 지연시간을 줄이는 테스트를 병행중이었다.
숙소의 분위기는 오전부터 무척 부산했다.
온라인 경기라고 해도 촬영, 송출을 위한 방송국 인원이 방문했고 인터뷰를 위한 간이세트가 세워졌다.
ESBN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방송차량과 인원은 현재 리그에 쏠린 관심도를 증명했다.
가이아 단독 채널 설립됐고 유료 예매 수입도 예상치를 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프로리그 경기는 실시간 관전 기능이 막히기 때문에 유료채널을 통해 시청하거나 권한을 주고 콜로세움에 입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지표가 리그의 흥행을 점치고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몸을 풀고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달란 요청이 들어왔다.
“유니크 선수. 여기요.”
시합 시작 30분을 앞두고 우리 팀 인터뷰 대표로 내가 당첨됐다.
연한 갈색의 머리칼을 찰랑거리는 인터뷰어가 살포시 마이크를 건넸다.
“제가 질문 드리면 편하게 답변해주시면 돼요. 편하게.”
“네.”
처음 인터뷰를 했을 땐 어찌나 떨었던지, 주목받을 일이 거의 없는 탱 포지션인데다 팀 리더도 아닌지라 마이크를 잡을 일은 거의 없었지만 첫 인터뷰만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상태였다.
“가이아 프로리그 개막 라이브 인터뷰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최고의 랭커! 유니크 선수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제 조금 있으면 첫 경기가 시작되는데요. 라이징 게이밍 클럽과 상대하게 됐어요. 기분이 어떠세요.”
“조금 긴장 되고요. 어서 게임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뭐 그렇죠.”
사실 긴장은 터럭만큼도 안 됐지만 너무 재수 없어 보일까 봐 적당히 첫 경기에 나서는 신입의 모습을 그렸다.
“사실 한 달 전에 굉장한 사건을 만드셨잖아요. 팀 내 동료인 아그니 선수와 같이 그랜드마스터 21연승이란 대기록을 달성했는데 그 이후로 찾기 쉽지 않았거든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다른 팀도 최근 콜로세움 경기 빈도가 제법 줄었다고 들었는데요. 비슷한 이유 아닐까요.”
콜로세움 경기를 너무 자주 뛰다 보면 전력노출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각 팀의 분석관들은 어떻게든 자료를 모아 작은 단서까지 파악해내는 매의 눈을 가지고 있다.
이 선수가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떤 패턴으로 움직이는지, 확률은 어떻게 되는지 인간을 부품단위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때문에 상당한 비율의 프로 선수들이 시즌 도중 랭크 매치 횟수를 줄이는 편이었다.
“S.솔리드 선수분들 모습을 보기 워낙 힘들다보니 다시 1위 예측 여론이 팽팽해졌는데요. 지금은 레드불스나 슈퍼호넷이 우승할 거란 의견도 제법 회복했거든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람들이 이렇다. 잠시만 얼굴을 안 비쳐도 금세 잊어버리길 반복한다.
어쩌면 그걸 노리고 불스나 호넷이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콜로세움을 점거한 걸지도 모른다.
불스, 호넷 팬들은 한 달 전과는 또 달라졌다며 팀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돌아서면 패배를 잊어버리는 뇌를 가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직 응원 팀을 정하지 못한 분들이 계시면 꼭 S.솔리드 팬을 하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굳이 지는 경기를 보며 즐거워하시는 취미가 있지 않으시다면요.”
본방에 인터뷰가 나가면 반응이 볼만하지 않을까.
문화 차이겠지만 북미는 도발성 쇼맨십을 더 호의적으로 봐주는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멘트를 좀 세게 쳐도 아무 문제 없었다.
실력만 뒷받침되면 오히려 스타성이 올라가는 무대다.
“자신감이 참 보기 좋은데요. S.솔리드를 응원해주시는 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희가 정말 준비를 많이했거든요. 만족하실만한 경기력으로 멋진 경기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솔리드의 승리를 기대하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S.솔리드 유니크 선수였습니다.”
*
“얘들아. 모여!”
평소엔 목소리를 크게 내는 법이 좀처럼 없는 브라이언 코치가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두드리며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오늘 엔트리다.”
선수들의 손에 프린트 용지가 전해진다.
전세계 가이아 리그는 공통의 룰이 있다. 한 시즌 동안 최대로 계약해 보유할 수 있는 선수의 숫자는 12명.
당일 제출할 수 있는 출전 엔트리엔 6명까지 등록이 가능하다.
1. 피닉스 (데니스 트란) - 실드나이트
2. 사이클론 (마커스 딘) - 웨폰마스터
3. 유니크 (정한솔) - 무도가
4. 오디세이아 (마이클 롱) - 엘레멘탈 마스터
5. 아그니 (제리 우드) -아크 위자드
6. 티르윙 (케빈 스미스) - 비숍
엔트리에 들지 못한 팀원들의 눈빛에 찰나 아쉬움이 스쳤지만 잠깐뿐이었다.
코치 앞에서 대놓고 싫은 기색을 했다간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니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다.
나는 저 친구들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나도 붙박이 말석이었으니까.
경기에 나가고 싶어도 묵묵히 연습 경기를 해내는 것 말곤 방법이 없을 테니 앞으로 많이 답답함을 느끼겠지.
그 과정을 못 견디고 떠나는 친구도 있을 거고 끝까지 살아남아 빛을 보는 선수도 나올 터였다.
“우리 팀 1라운드는 마이클이다.”
마이클, 엘레멘탈 마스터를 잘 다루는 제법 괜찮은 선수다.
다른 팀원보다 조금 더 늦게 숙소에 합류했지만 기본적인 센스가 있었다.
현재 코치가 명단에 올린 6인의 엔트리는 객관적으로 봐도 팀 내 상위 여섯 명을 추린 것이다.
실력이 좋은 선수일수록 1라운드, 4라운드에 내보내는 게 가이아의 보편적 전략이다.
맵을 모르고 나가는 경기이기 때문에 실력밖에 믿을 게 없다.
그러나 브라이언 코치는 여기서 한 번 엔트리를 꼬았다.
지난번 콜로세움 연승 당시 내가 끝까지 1번을 고집했고 그 인상은 많은 가이아 유저들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상대 팀이 날 저격하고 제일 약한 카드를 내보낼 걸 염두에 두고 4번 옵션쯤 되는 마이클을 내보냈다.
순서 결정으로 코치의 속내를 어렴풋이 들여다본 셈인데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S.솔리드의 6인 엔트리, 내가 추천해 모은 선수들이 절반이나 들어있는 이 명단은 의심할 여지 없는 북미 최고 레벨이다.
다들 크건 작건 어느 정도 긴장한 와중에 나만이 여유로운 얼굴로 마이클을 응원했다.
“자 하나둘셋 구호 외치고 게임 들어가자.”
“하나, 둘, 셋.”
“S.솔리드 GO!”
다시 태어난 이후 첫 프로 무대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