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24화 (24/170)

킹 오브 몬스터 (3)

헐리우드 영화에서 폭파씬을 잘 찍는다고 소문난 감독들이 연출하는 장면을 보면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크고, 화려하게. 뻥뻥 터지는 불길이 눈호강을 시켜준다.

제리의 마법이 그랬다.

상대보다 한 템포 빠르게 바위 기둥에 박힌 불덩이는 CG의 한 장면처럼 터지며 맵을 뒤흔들었다.

쿠구궁-!

같은 스킬도 스탯과 장비의 차이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발 밑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적 마법사는 다른 절벽으로 뛸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제리를 쳐다보며 무너지는 바위 산과 함께 구름 아래로 떨어졌다.

게임을 더 이어가겠단 의지가 마법 한 방으로 꺾였다.

그만큼 양측 무력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그래도 손을 계속 움직여야지.’

리그를 뛰다 보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상대의 강공이 터지는 경우가 왕왕있다.

정해진 캐릭터를 들고 싸우는 게임이 아니라 유저 스스로가 육성한 캐릭터를 상대로 하는 게임이다보니 변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 때마다 손을 놓으면 프로 생활을 계속 할 수 없다. 잠재력이 있는 프로라면 저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게임을 이어갈 생각을 했어야 한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적 마법사에게서 제리로 시선을 돌렸다. 너라면 다르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말이다.

가이아에선 시합을 말려줄 심판이 따로 없다. 있는 건 체력 바와 시간초 뿐이다. 아무리 유리한 상황을 점해도 자칫 방심하는 순간 상대의 송곳같은 노림수가 상황을 반전시키는 경우가 일어난다.

아니나다를까 제리는 손에서 벼락을 뿜어내 추락하는 상대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승리 메시지가 뜨기 전엔 공세를 멈추지 않겠단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바위산을 때리는 벼락줄기가 수십 번 떨어지자 팀의 승리를 알리는 메시지가 울렸다.

-킹이 독보적이라 그렇지 저 친구도 쌉괴물임

-유니크 원맨팀이라고 한새기 누구냐?

-방금 마법 두배 빠른듯

-두배는 무슨 두배임 ㅋㅋㅋ 막눈임?

관중에게 손을 흔들며 씩 웃는 제리에게 나도 엄지를 척 세웠다.

파죽의 2연승, 결승전까지 갈 필요도 없이 개인전 3승으로 게임을 쉽게 끝낼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잇달은 패배로 불스 선수들은 독이 바짝 올라있는 상태, 긴장한 일반인 랭커에겐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레전드크루 소속 미카엘은 같은 프로지만 불리하긴 마찬가지였다. 같은 탱커래도 미카엘과 비프로스트 사이엔 레벨이 최소 두단계쯤 차이가 났고 마법사랑 붙는다 해도 상성상 불리한 매치가 된다.

결과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미카엘은 비프로스트 상대로 분전했으나 체력바 40퍼센트 이상 차이로 패배했고 4라운드에 나선 일반인도 마법사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기죽어 내려오는 버서커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차피 이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매치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친구가 불스의 엘레멘탈 마스터를 상대로 이길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없다.

불리한 상성을 딛고 시합을 이기면 프로를 해야지 왜 일반인으로 남아있겠는가. 진즉 두각을 드러냈으면 스카우트들이 가만 안놔뒀을 거다.

“괜찮아요. 5라운드 잘 해봅시다.”

5라운드 시작 전 팀에 주어지는 준비시간은 3분.

프로무대에선 이 사이에 상대가 어떤 엔트리를 들고 나올지 예측하고 전략을 세우느라 바쁜 시간이다.

하지만 랭크매치에선 달리 할 게 없는 시간이다.

인원은 4명 고정이라 상대에 맞춰 유동적으로 팀원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양 팀이 정해진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 ok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맵이 결정된다.

[5라운드 - 원신의 수림]

울창한 삼림과 새소리가 울리는 순간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삼림 형태의 맵이라 적 마법사의 일격을 피하긴 좋은 맵이다. 다만 이 맵은 마력조성 레벨 3, 마법사를 둘이나 데리고 온 레드불스에 웃어주는 상황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장점 하나, 단점 하나이니 균형추가 맞는다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바람의 방향이 문제였다.

하필 역풍이라니.

원신의 수림은 불이 잘 붙는다. 우리쪽이 역풍이면 저쪽 입장에선 순풍, 마법사들이 불길을 적당히 때려 넣어주면 화공에 당할 판이다.

“뛰어!”

이 모든 판단을 눈깜짝할 새에 마친 내가 달리자 제리가 냉금 뒤따라왔다.

팀내 스크림에서 화공으로 재미를 몇 번이나 봤던 제리는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미카엘도 명색이 프로라 금방 뒤를 쫓아왔는데 버서커는 반응이 느렸다.

원신의 수림에서 화공을 일으킬만한 마법사와 싸워본 경험이 없어 생소한 탓이리라.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사방에서 매캐한 냄새가 났다.

수림의 바람은 방향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마법사를 둘이나 끼고 있는 팀에서 화공을 선택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서 흩어집시다.”

사방에서 번지는 불길이 우리의 체력을 서서히 좀먹으려 들자 나는 속사포처럼 말을 뱉었다.

먼저 실드나이트인 미카엘과 제리는 이대로 적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 마법으로 상대를 견제한다.

나와 버서커는 좌우로 찢어져 상대를 양 날개로 압박하는 전략이었다.

“먼저 갑니다!”

버서커는 재빨리 불이 더 번지기 전에 허리까지 치솟은 불을 뛰어넘어 내달렸다.

고통까지 느껴지는 캡슐형 접속기가 아닌 게 천만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버서커는 다리가 굳어 불을 뛰어넘을 엄두조차 못냈을 터다.

나는 제리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뒤 부동보를 밟아 불길을 뚫었다.

내가 맡은 쪽은 열기가 훨씬 강한 쪽이었다. 지글거리는 불길에 체력 바가 빠르게 깎여들어갔다.

암살계열은 속도가 빠른 직업이지 맷집이 좋은 건 아니다.

나는 지면에서 솟은 바위 하나를 밟고 뛰어올라 나무를 갈아차며 이동했다.

내 퍼포먼스가 맘에 들었는지 관중석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가이아는 게임이지만 유저의 실제 피지컬 역량이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나뭇가지를 밟고 숲 꼭대기를 이동하는 정돈 아니겠지만 민첩 보정을 받아도 어려운 동작임은 확실했다.

이 정도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랭커를 본 적 없는지 관중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유니크는 진짜다.

-ㄹㅇ 암살자처럼 움직이네

-민첩 스탯 극한으로 올리면 저런 동작 가능?

-ㅋㅋㅋㅋ 서커스 출신이냐

열기에 체력을 깎아가며 외곽을 빙 돌았을 때 아군은 불스측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버서커는 접근할 수단이 없어 밑동만 남은 나무 뒤에 웅크려 고개만 뺐다가 집어넣길 반복 중이었고 제리는 미카엘을 방패 삼아 무서운 기세로 마법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마력조성 3레벨 맵이라 그런지 양측이 주고 받는 마법의 기세가 아주 살벌했다.

콰르릉! 쾅!

공중에서 마법이 얽혀 크게 폭발, 굉음이 일대를 흔든다.

그 어지러운 틈을 놓치지 않고 나의 몸이 바닥에 붙을 듯 낮아져 바람을 갈랐다.

그 순간을 지켜보고 있던 관중의 함성이 벌떼처럼 일자 비프로스트의 고개가 휙하니 돌아갔다.

“맥스! 오른쪽!”

제리를 견제하고 있던 마법사가 매서운 속도로 손을 뻗더니 대마법을 뿜어냈다. 머릿털이 쭈뼛 설 것 같은 기세로 집채만한 푸른 구체가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든다.

성능 좋은 메모라이즈 스킬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저만한 대마법을 준비 시간도 없이 곧장 뿌리려면 미리 스킬을 충전 상태로 장전해두는 방법 뿐이다.

정면에서 맞으면 최소 사망 확정, 불길을 뚫고 오느라 내 체력은 이미 삼분의 일 이상 깎인 상태다.

나는 양손을 뻗어내 항마장을 쏘아냈다. 항마장이 전설급 스킬이긴 해도 정통 원거리 스킬은 아니기에 막는 건 역부족, 하지만 내가 원했던 궤적을 살짝 비트는 역할은 가능했다.

동시에 옆의 나무를 박차고 3미터 정도로 뛰어오르자 가까스로 마법을 피해낼 수 있었다.

괴물새끼. 나를 쳐다보는 불스 마법사 얼굴에 그렇게 써 있었다. 이제 거리는 고작 이십 미터, 비프로스트는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맘 같아선 내 쪽을 향해 방패를 돌리고 싶을 텐데 제리가 워낙 날카롭게 마법을 던지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항마장을 던지며 발을 굴렀다.

접근을 허용하면 안되겠다 생각했는지 불스의 아크위자드, 엘레멘탈 마스터가 동시에 나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뒈져버려!”

관중은 멀어서 못들었겠지만 내 귀엔 악을 쓰는 마법사의 외침이 고스란히 들렸다.

부동보의 방향을 꺾었을 때 마법사의 지팡인 여전히 나를 쫓아 움직였다. 내게 눈을 떼지 못하는 두 명에게 가벼운 웃음을 날렸다.

“헉.”

견제용 마법을 난사하던 두 마법사가 숨을 집어삼켰다.

내가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춘 탓이다.

[아이템 - 그림자 서곡]

등급 : A

종류 : 신발

특수 효과 : 2초간 모습을 감출 수 있다. 시간당 1회 제한.

[민첩 +105]

광채의 신전에서 파밍한 장비가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특수효과 설명은 짧지만 그 위력은 대단했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마법으로 맞출 순 없는 법, 엘레멘탈 마스터가 내가 있던 자리에 스캔 마법을 뿌려보지만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땅! 발자국을 봐!”

눈치 빠른 비프로스트는 미세하게 흙이 튀는 걸 보고 외쳤다. 그러나 늦었다.

일반인도 열심히 뛰면 2초에 몇 미터는 뛸 수 있다. 하물며 게임 캐릭터에게 2초는 일을 도모하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

오른손을 감싼 뇌전의 기운이 마법사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앱솔루트 실드!”

제대로 먹혔다고 생각했는데 두 손으로 지팡이를 번쩍 뜬 엘레멘탈 마스터가 전설급 스킬 방벽을 펼쳤다.

견고하기가 성벽을 연상케 했기에 내 주먹은 애꿏은 실드만 긁는데 그쳤다.

“슬로우!”

“그라비티!”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아크위자드의 디버프 스킬이 들어왔다. 날렵하던 몸이 순간 무거워졌다고 느낄 때 비프로스트가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이 녀석들과 마지막으로 붙은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그사이 밥먹고 합을 많이 맞춰봤는지 연계가 몰라볼만큼 좋아진 상태였다.

이거 지는거 아니야?

레드 불스 세 명이 순간 나만 보고 달려드니 공격이 아주 매서웠다.

비프로스트의 찌르기 스킬이 나의 몸을 스치자 체력이 빠르게 줄었다. 디버프 스킬만 아니었어도 검날을 쳐내며 반격을 들어갔을 텐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막는 것만도 한계였다. 비프로스트는 엘마의 버프까지 받아 몸놀림이 거의 암살자 뺨치는 수준까지 상승했다.

장갑을 낀 손과 실드나이트의 검이 격돌하며 불꽃이 튄다.

-공방 수준봐라 개미쳤네 ㄷㄷㄷ

-디버프 스킬 맞고 버티는거임?

-사람 아님 저거.

-비프로스트 버프 받은거까지 3대1임

“아이스 랜스!”

“소드 댄싱!”

팔뚝만한 얼음 기둥이 오른쪽에서 쑥 하고 밀려드는 걸 용의 충격으로 쳐내며 왼팔로는 항마장을 뿜어 검격을 방어했다.

외줄타기를 하는 듯 위태롭게 버틸 때 숨어있던 버서커가 이때다 하고 달려나왔다.

대검을 머리 위로 들고 언제든 내려찍을 기세로 달려온 그는 제일 먼저 힐러를 노렸다.

억하는 소리와 함께 땅을 구르지 않았더라면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졌을만큼 위력적인 공세였다.

쿵!

버서커의 대검이 주변을 흔들자 일대는 혼전 양상이었다. 여섯 명이 좁은 공간 안에 뒤엉켜 있을 때 제리의 몸이 불로 뒤덮여 하늘로 치솟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달은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LGE마켓에 경매가 붙어 가격이 크게 치솟은 걸 구단에게 융통까지 받아 제리가 따냈다.

파라다이스 게이밍이 랭크게임 중에 자주 써먹어 이제는 관중들에게도 익숙한 필살기. 드래곤 웨이브였다.

고오오오-!!

이윽고 불의 용이 지상을 강타하자 지진과 같은 진동이 일대를 강타하며 흙먼지가 수미터를 치솟았다.

***

“오래간만에 애들 데리고 나가서 회식이나 해.”

“네, 넵”

대표가 건네는 카드를 코치는 조심스레 받아들였고 지켜보던 감독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저희 애들 경기는 어떻게 할까요?”

“집어치워.”

“···예?”

“집어치우라고. 자넨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애들 병신 만들일 있어!”

슈퍼호넷 단장 베릭의 자리에 놓인 모니터엔 드래곤웨이브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붕괴된 처참한 수림의 잔재가 보였다.

레드불스는 혼전 양상 중이어서 미처 제리의 대마법을 피하지 못했고 탱커를 제외한 인원은 그대로 다운, 그나마 조금 체력이 남아있던 비프로스트도 순간 범위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유니크한테 턱을 얻어맞고 리타이어했다.

혼자 적진을 헤집고 다니며 신들린 묘기를 선보인 암살자. 기막히게 손발을 보조하는 마법사까지.

슈퍼 호넷이 아니라 그 누가 와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무슨 작전을 세우든 S.솔리드의 제물이 될 것 같았다.

“이제 리그 개막 한 달 남았다. 좋은 거 먹이고 우리 애들도 저렇게 움직일 수 있게 맹훈련 시키란 말이야! 할 수 있지! 자네만 믿는다.”

“예···.”

감독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고 코치는 혹여나 불똥이 튈까 냉큼 카드를 넣고 단장실을 빠져나갔다.

저 외계인 같은 수준을 요구하는 단장도, 오늘 붙어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감독도 제정신은 아닌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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