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23화 (23/170)

킹 오브 몬스터 (2)

두 달 사이, 상위 랭커들의 실력은 비약적인 상승을 거뒀다. VR 게임에 익숙하지 않던 그들의 몸놀림은 현실의 격투기 선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날렵해졌고 현실에선 낼 수 없는 힘에 적응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내게 경각심을 심어주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나름 인상적인 선수는 몇 명 있었지만 패배를 떠올리게 만들 정돈 아니었다.

S.솔리드 행을 결정했을 때 나는 이 바닥의 레벨이 상향 평준화되는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 1년으로 잡았다.

예상보다 선수들의 성장세가 살짝 빠르긴 했지만 이 정도면 아직 오차 범위내에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아마 올 시즌이 끝날 때쯤이면 더는 원패턴으로 경기를 풀 수 없으리라.

쩍 하고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10연승을 거뒀을 때 내 랭킹은 252위를 가리켰다.

“위에 계급 하나 새로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슈퍼 그랜드 마스터 같은 거로.”

제리는 게임이 이렇게 쉬울 수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케빈과 함게 제리 역시 내 덕을 상당히 많이 본 친구였다. A급 던전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며 스탯을 단련하고 호화 장비를 둘렀으니 상위 랭커를 상대로도 여유를 보였다.

무엇보다 숙소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하면 움직임이 상당히 좋아진 상태였다.

내가 S.솔리드에 직접 추천한 선수는 셋, 제리는 그중에 없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현역 최상위 레벨을 노려볼 만했다.

“게임을 더 돌릴까 하는데 어때.”

“그래? 안 그래도 조금만 더 하자고 하려던 참인데.”

내 말에 제리가 반색했다.

제리도 오랜만에 콜로세움을 돌리니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던 모양이다.

“내친김에 1위 한 번 찍어보지그래?”

“글쎄, 어떻게 할까.”

나는 고민하는 척하며 다음 경기 탐색을 눌렀다.

오늘 1위를 찍으면 커뮤니티엔 어떤 이야기가 올라올 것인가. 두 달 동안 잠잠히 소문만 무성하던 유저가 단숨에 랭킹 1위 자리에 오르면 반응이 뜨겁다 못해 활활 탈 정도가 되지 않을까.

누구도 이루지 못할 업적을 쌓아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고자 했던 목표. 그 첫 발걸음으로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1위는 안 되지.”

“무슨 말이야?”

“게임 수 늘려서 1위 찍는 건 아무 의미 없다고.”

게임 수 늘려서 정상에 오르는 건 각 팀 에이스급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나는 시시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덴 관심 없었다.

“연승으로 가자.”

***

“저 녀석이 그 친구지? 유니크?”

가죽의자에 삐딱하게 턱을 괴고 모니터링 영상을 지켜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S.솔리드 소속의 랭커가 경기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바닥에 퍼졌고 4시간이 흘렀다. 남자가 보는 영상은 수만 관중석 중 한자리를 차지한 분석팀이 보내오는 영상이었다.

“이거 더 가까이서는 못 보나?”

“관중석에 있는 유저 시점에서 영상만 따오는 거라서요. 가까이서 보려면 선수 본인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그래.”

북미 프로게임단 슈퍼호넷 단장.

베릭은 수염이 자라 까칠한 턱을 만지며 계속 경기를 주시했다.

4시간 동안 열아홉 경기를 치르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괴물 선수. 팀을 지휘하는 단장으로서 참 탐나는 재목이었다.

“이봐. 우린 왜 저런 선수가 없을까.”

노스캐롤라이나에 적을 두고 있는 슈퍼호넷은 제법 좋은 연습경기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

현재 북미 게임단의 판도는 3강 주도하에 이뤄졌는데 S.솔리드, 레드불스, 슈퍼호넷이 그 주인공이었다.

“조금만 더 지켜봐 주시면 애들도 성적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겁니다.”

“아냐. 아무리 기다려도 저만한 물건은 안 나올 것 같아서 그래. 애초에 3강이란 말도 궁색하지. 세상에 이렇게 균형이 안 맞는 3강이 어딨다고.”

3강으로 불렸으면 세 팀 간 승률이 비슷해야 하는데 S.솔리드는 세 팀 중에서도 독보적인 승률을 자랑했다. 선수 개인 평균 승률로 따지면 호넷이나 불스도 꿇릴게 없지만 결국 승패는 최종 라운드를 따내는 팀이 이긴다.

승률은 저조해도 선수 평균 레벨은 높은 편이다 같은 이야긴 그저 변명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단장님. 가이아는 팀 게임입니다. 저 친구가 날고 기어도 개인전 3패가 되면 그 게임은 패배로 끝납니다.”

“그래서 솔리드 상대로 개인전 3승을 딸 수는 있고?”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충분히···.”

“저 녀석 말고 잘하는 녀석이 또 있다며.”

“예···.”

슈퍼호넷이 솔리드에게 패배하는 루트는 개인전 2:2 동률로 팀전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건 비단 호넷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팀으로 치러지는 5라운드에서 S.솔리드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고 에이스가 출격하면 쉽게 무너지는 법 없이 반드시 5라운드까지 갔다. 그만큼 에이스의 힘이 막강했다.

“자네뿐만이 아니야. 코치들도 똑같은 말을 해. 시간을 달래. 이게 시간을 가지고 될 일 같으면 내 말 안 하지. 더 좋은 선수를 물어오기 전까진 이거 극복 못 해.”

그 사이 화면 속의 무도가는 또 한 명의 희생자를 바닥에 드러눕혔다. 카메라가 잠깐 흔들거리며 우와아 하는 함성이 어지럽게 전해졌다.

“아주 날아다니는구만.”

“양쪽이 에이스 끼고 스크림 뛴 게 벌써 한 달 전입니다. 그동안 팀 전력도 많이 올라왔습니다. 애들한테 기회를 한 번 주시죠.”

호넷 감독은 눈빛을 반짝이며 기회를 요청했다.

저 괴물같은 자식 뛰는 폼을 보니 오늘 랭킹 1위 찍기 전엔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자신 있어?”

“저희 에이스 애들로 4명 추려서 매칭 저격 해오겠습니다.”

“이기면 좋지. 근데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내가 나이 먹었어도 알 건 다 알아. 지금 저녀석들, 둘만 협동이고 나머진 그냥 아무 놈이나 주워다가 게임하는 거잖아. 그런 애들 상대로 우리 팀 네 명이 나가서 깨지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야?”

“유니크는 자신 없지만 저 마법사 잡고, 나머지 둘 깨부수면 승산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진행해 보라고 하려는 찰나 문에서 딱따구리 두들기듯 노크소리가 났다.

제법 다급한 기색인 게 소리에서 느껴졌다.

“들어와.”

다급히 들어온 남자는 호넷 1군 코치였다.

“저, 지금 불스가 매칭 잡혔는데요.”

“앞뒤 자르지 말고 설명을 제대로 해 봐.”

“그···지금 모니터링 하고 계시는 영상 말입니다. 유니크요. 상대 팀에 레드불스 4인 팀이 들어왔습니다. 알려드리려구요.”

“그래?”

호넷 감독은 잽싸게 반응해 무릎 위에 놓여있던 모니터를 주시했다.

“정말이네?”

레드불스는 호넷하고 승률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강팀. 불과 엊그제 스크림을 붙어서 이들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불스도 전력을 놓고 봤을 때 결코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이거 불스도 우리랑 같은 생각하고 내보냈다고 봐도 되겠지?”

“예. 단장님.”

“일단, 얘네 하는 거 보고 생각하자고.”

선수들이 얼마나 성장했을지 보여주려고 했는데 기회는 불스가 먼저 잡았다.

지금 관중석을 가득채운 유저 숫자는 어림잡아도 7만은 돼 보였다. 만약 이 연승을 끊어낸다면 지금 이곳에 쏠린 모든 집중과 관심은 불스에게로 이동할 것이다.

“그래도 불스가 이겼으면 좋겠군.”

“동감입니다.”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한발 늦어 주목받을 기회를 날리면 배는 좀 아프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할 터였다.

적어도 S.솔리드에게 약점은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단장과 감독, 코치는 진지한 얼굴로 경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

“안녕하세요. 미카엘입니다.”

“반갑습니다. 레전드 크루에서 뛰고 계시던가요?”

“예.”

순위가 오르니 슬슬 낯이 익은 프로들이 눈에 띄었다.

“저쪽은···레드불스 1군이네요.”

“네 명 전부요?”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상대 얼굴들이 익숙했다. 특히 비프로스트는 나름 실력자여서 확실히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솔아. 이번에도 네가 1라운드 나갈래?”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몇 번째로 나가든 상관이야 없지만 팬들의 기대감이란 게 있다.

관중석을 가득 채운 유저들은 내가 1번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저쪽에선 비프로스트가 나오겠지?”

“아마도.”

“제가 저 사람들 얼굴 다 알거든요. 실드, 엘마, 아위, 하프 하나씩이네요.”

실드나이트, 엘레멘탈 마스터, 아크위자드, 하이프리스트.

클래스를 고루 가져왔다.

특히 엔트리 여분을 가동할 수 없는 랭크 매치에서 힐러를 대동했단 점으로 볼 때 처음부터 연장전을 염두에 두고 있단 계산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하이프리스트가 있다고? 그럼 1라운드에 힐러 나올지도 모르는데?”

적 에이스를 상대로 힐러를 던지면 손해 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연장전에 갈 생각이면 제일 약한 카드로 상대의 에이스 한 장 막는 건 전술적으로 이득이다.

제리는 차라리 일반인 친구를 1라운드에 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레드불스는 네 명 전원 프로, 이쪽은 세 명이 프로, 한 명은 일반인이다. 힐러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가 나서든 이길 수 있는 상대니까 제리의 말은 타당했다.

우리팀 일반인 랭커는 버서커 클래스였는데 꼭 좀 그렇게 해달란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프로한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수만 관중 앞에서 매타작 당하긴 싫겠지.

게다가 팀이 이기든 지든 일단 개인적으로 1승을 올리면 랭크 점수에 반영되니 꽁승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한다.’

오늘 제리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상대 조합을 보니 제리의 상성 클래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잠깐 고민한 나는 쭉 해왔던 대로 1번 엔트리를 고집했다.

“제가 1번 할게요. 괜찮으시죠.”

“예.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성큼 걸음을 내딛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석양의 붉은 빛이 공중 광장에 빛을 뿌렸다. 유일하게 장외패가 가능한 유구의 천칭.

노을에 눈이 부셔 눈썹 위를 손으로 가리니 상대 모습이 들어온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힐러였다. 버림패로 저격했다는 사실에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이제 그냥 저격으로도 모자라서 엔트리저격을 하네

-좀 추하자너

-힐러 던지고 3승 챙기겠다는거 다 보임.

-저러고 지면 불스 이미지 나락간다

“제가 갈까요. 아니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힐러는 제 발로 외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최근 본 패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광경이었다.

-ㅋㅋㅋ 이제 노려보기만 해도 승리임?

-20연승이 상대 자살;;

-불스 프로팀 1위 아님?

-응 2위.

-응 3위. 솔리드 다음 호넷 다음 불스.

수만 관중이 비웃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변함 없었다. 그 모습에 나는 불스를 강팀으로 인정했다.

이기기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게 프로다. 불법을 저질러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저들은 승리를 위해 자존심을 꺾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했다.

“드디어 내 차롄가.”

나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제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해줘.”

내 얼굴에서 다른 때와 다른 무언가를 읽었는지 제리는 웃음기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2라운드 맵은 십만 대산.

암살 클래스에 유리한 맵이지만 저쪽 구성은 처음부터 5라운드를 염두에 두고 나왔고 구성원에 암살은 없었다.

십만 대산은 발을 디딜 공간이 한정적이라 움직임이 둔한 탱커계열은 거의 나서지 않는다.

[2라운드 - 십만 대산]

[블루팀 아크위자드 vs 레드팀 아크위자드]

난 불스에서 누가 나오든 제리가 이길거라 확신했다.

서버 최상위 스탯에 A급 장비를 두 개나 보유한 마법사가 동 클래스 대결에서 패할 리가 없잖은가.

-헐

-같은 스킬이다!

-저 스킬 이름 뭐임?

순간 관중석이 들끓었다.

기암괴석을 밟고 선 두 마법사가 정확히 같은 마법을 시전하며 거대한 불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제리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쿠구궁-

회전하는 불덩어리를 먼저 쏘아낸 건 당연히 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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