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림도르 (3)
5라운드는 팀전, 여러 명의 선수가 얽히기에 소규모맵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180초짜리 개인전과는 달리 10분으로 60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
나는 부디 엄폐물이 많은 맵이 걸리길 바랐다.
팀에 암살이 두 명이나 있는데 초원이라도 걸리는 날엔 마법사의 포화를 받아내며 거리를 좁혀야 한다.
[5라운드 - 환영 도시]
5라운드 맵이 공개되는 순간 팀원들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환영도시는 오직 팀전에서만 등장하는 대규모 맵으로 대규모라는 이름답게 크기가 상당했다.
시민들이 모두 빠진 텅 빈 도시를 배경으로 싸우게 되는데 빌딩이며 버려진 차량이 많아 몸을 숨길 곳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엄폐물이 상당히 많은 맵임에도 기분 좋은 티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경험치 부족이었다.
오직 팀전에서만 등장하는 맵이기에 4인 랭크 매치를 하면서 볼 일도 거의 없었다.
그간 S.솔리드는 연습 게임을 치를 때마다 5라운드가 오기 전에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환영 도시 맵을 연습하려면 커스텀 게임으로 팀 내 자체 평가전을 할 때나 볼 수 있었는데 이제 겨우 숙소생활 한 달 차, 자주 등장하는 맵 위주로 훈련하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긴장하지 말자. 하던 대로 하면 이길 수 있어.”
나는 손뼉을 가볍게 부딪쳐 팀원의 정신을 다잡았다.
엄폐물이 많은 편이니 적과의 거리를 좁히긴 유리했다.
“일단 거점으로 뛰자.”
환영 도시엔 다른 맵엔 없는 또 다른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맵 중앙의 거점 유무였다.
워낙 맵이 크기 때문에 서로 숨어있으면 결판이 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맵 중앙의 커다란 녹보석 조각 발판을 밟고 있으면 추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거점 시스템이 존재했다.
나는 사이클론에게 팀원들을 호위해줄 것을 부탁하고 제일 먼저 거점을 향해 치고 나갔다.
암살계열의 이동속도는 전 직업 중 가장 빠른 편이다. 캐릭터의 움직임을 관여하는 민첩스탯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내 민첩 수치는 케빈과의 비색의 동굴 레이드로 크게 높아져 어느덧 600을 돌파한 상태였다.
아마 북미 서버 전체 캐릭터 중 1위일 것이다.
워낙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간 터라 발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내가 거점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1분, 재빨리 발판 위에 서자 윙윙 거리는 석판의 진동과 함께 푸른 불빛이 차올랐다.
원판에 푸른 불빛이 가득 차자 땡하고 작은 신호와 함께 400으로 표시된 체력바 위로 추가 점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 그럼 마중을 나가볼까?
가만히 10분을 버티면 우리 팀이 큰 차이로 이기기 때문에 PG는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다.
나는 가만히 이곳에 숨어 기다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발소리를 죽인 나는 은밀히 주변 건물로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 위를 뛰기 시작했다.
염탐의 시작이었다.
***
“속도 한 번 겁나게 빠르네.”
하필 환영 도시가 걸릴 줄은 몰랐다.
진즉 한솔이 1분만에 거점을 찍고 좋은 자리를 잡을 동안 PG선수들은 열심히 중앙을 향해 뛰는 중이었다.
열심히 뛰는 거에 비해 영 속도가 나질 않았는데 조합 때문이었다.
이들이 준비한 조합은 1탱과 3마딜의 극단적인 조합이었다.
만약 환영도시가 아니라 천칭, 라플라타 같은 사이즈의 맵이었으면 시작과 동시에 마법사들의 폭격으로 S.솔리드는 전멸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하필 잘 나오지 않는 대규모 맵이 걸렸고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지 1분만에 중앙 거점을 점령했다는 시스템 안내 멘트가 울렸다.
“유니크 그 자식이지?”
“그 녀석 말고 누가 1분 만에 벌써 중앙 거점을 밟겠어.”
“사이클론은?”
“내가 콜로세움에서 최근에 붙어봐서 알아. 사이클론은 절대 유니크 급 아니야.”
3라운드에서 이지선다만으로 처참하게 깨진 블랙실드가 퉁명스레 말했다.
솔직히 암살계 원패턴에 당한 건 치욕스런 일이긴 했지만 상대 레벨이 너무 높아서 생긴 일이라고 인정하니 맘이 편했다.
분석팀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현재 랭커 레벨에서 유니크의 전략은 카피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근데 거점에 벌써 도착했으면 우리가 오는 것도 기다리고 있을 수 있잖아?”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자 PG팀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팀원들이 내는 소릴 제외하면 작은 소음 하나 없는 유령 도시. 어쩐지 싸늘한 기운이 몸에 스미는 것 같았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고갤 들어 주변 건물을 바라보지만 작은 그림자 하나 없었다.
“긴장 풀어. 그놈 무도가야. 다크레인저가 아니라고. 지가 매복하고 있어 봐야 뭘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무도가라고 원거리 공격 스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근접 클래스이기 때문에 위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건물 위에서 툭툭 쳐대봐야 치명적인 위력은 아니란 소리다.
바로 그때, 투둑하는 소리와 함께 전방에 돌 굴러가는 소리가 울렸다. 워낙 조용한 곳이다 보니 그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수 없었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마법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뻗어 마법을 쏟아냈다.
불과 벼락이 거리를 휩쓸며 도로를 헤집었고 길을 따라 깔렸던 차량들이 충격으로 쓸려나갔다.
가공할 진동과 폭음, 세 명의 마법사를 호위와 오더를 보던 블랙실드가 손을 번쩍 들고 정지 명령을 내리던 그 때 허공에서 푸른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퍼퍼퍼퍽!
체력 깎이는 소리가 폭죽처럼 울리더니 아크위자드가 휘청거린다.
벼락처럼 떨어진 건 교룡뇌조를 앞세운 한솔이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 작은 돌을 던져 적의 주의를 끈 것은 한솔의 의도였다.
이 정도로 마법을 쏟아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아마 돌이 아니라 진짜 본인이었으면 얼굴을 마주 보기도 전에 고깃덩이로 리타이어 당했을 정도의 화력이다.
워낙 조용한 도시지만 마법이 일으킨 충격과 굉음은 암살자의 움직임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그와 동시에 한솔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벽을 밟았고 교룡뇌조를 앞세워 아크위자드 머리 위에 터트렸다.
첫 목표는 1티어 스킬 드래곤 웨이브를 지닌 녀석이었다.
안 그래도 강력한 전설급 스킬에 낙하데미지까지 더해지니 방어가 약한 마법사로선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런 미친놈. 물러서!”
한솔의 기습에서 제일 먼저 몸을 움직인 블랙실드는 아직 멀쩡한 마법사 둘의 몸을 낚아채 뒤로 던지며 실드를 앞세웠다.
“실드 어택!”
방패가 빛을 받아 번뜩인다. 체력을 전부 소진해 빛으로 사라져 가는 동료의 몸을 밟으며 치고 들어온 녀석이 커다란 방패로 한솔을 후려쳤다.
5미터도 넘는 고공 낙하를 한 터라 블랙실드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인피니트 슬래셔!”
한솔은 추락의 영향으로 몸이 굳은 상태, 확실히 끝내겠단 기세로 검격이 쏟아지는데 한솔의 몸이 둘로 나뉘었다.
“이건 또 뭐야!”
처음으로 선보인 이형환위 스킬에 블랙실드는 공중을 헛치고 말았다. 검이 벽을 긁어 불꽃을 튀기는 틈에 한솔은 몸을 굴러 가장 가까운 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이어 웨이브!”
“라이트닝 볼트!”
쿠구구궁-
벽이 허물어지며 온갖 마법이 쏟아졌다. 아크위자드 둘이 마법을 난사하니 멀쩡하던 건물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마력을 몽땅 쏟아낼 기세였다.
‘절대 놓치면 안 돼!’
아무리 기습이라곤 해도 네 명이 뭉쳐있는 곳에 단독으로 들어와 딜러 모가지를 따는 녀석이다. 살려 보내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조용했던 도시는 마법의 난사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
이 자식들은 왜 이렇게 늦어.
무너진 건물이 일으킨 먼지 무덤을 빠져나온 나는 체력 바부터 확인했다.
19퍼센트. 제법 아슬아슬한 생존이었다.
적 아크위자드를 일격에 자른 것까진 좋았는데 블랙실드의 반응이 생각보다 빨랐고 마법사들이 후방에서 쏘아댄 마법에 체력이 크게 나갔다.
하지만 우리 팀엔 힐러가 있지 않은가. 살아있기만 하면 충분했다.
5라운드 팀전에서 힐러가 없는 조합은 변칙 조합 취급을 받는다. 체력을 채울 수단이 마땅찮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에서 승리하려면 상대보다 체력을 많이 남겨야 한다.
팀전은 3분짜리 개인전의 세 배 이상 가는 10분짜리 경기, 내가 무사히 케빈에게 합류하기만 하면 19퍼센트였던 체력은 다시 풀로 찰테고 그간 입은 데미지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헉헉거리며 다시 거점으로 뛰어가는데 다가오던 사이클론과 마주쳤다.
“어떻게 된 거야? 체력바가 아주 요동을 치던데.”
“내가 한 명 끝장내고 오는 길이거든.”
내 말에 사이클론은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럼 지금 저쪽엔 누구 남은 거야?”
“실드 하나, 아크, 엘마 하나씩.”
“탱 하나, 마딜 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케빈과 합류하기로 했다.
사이클론이 도우면 이 한 줌 남은 체력으로도 승부를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이길 땐 확실하게 이기는 게 프로다.
그 뒤론 거의 원사이드한 흐름이었다.
케빈에게 힐을 받아 바닥인 체력을 다시 끌어올렸고 몸을 숨길만 한 건물이 많다는 장점을 이용해 사이클론과 좌우로 흔들자 PG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내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렇지 사이클론도 절대 어디 빠지는 딜러가 아니다.
웨폰 마스터는 공격력으로 따지면 무도가보다 더 극한에 닿아있는 클래스, 내가 블랙실드를 묶어놓은 사이 사이클론은 마법사를 훌륭히 요리했다.
[팀 S.솔리드 승리!]
400퍼센트였던 PG의 체력바가 0으로 꽂히는 순간 팀의 승리 메시지가 떠올랐다.
도시가 사라지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슬쩍 돌아보니 PG쪽은 나라잃은 표정이다.
조금 전 경기는 맵의 유불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속된 말로 그냥 완전히 발렸다.
그리고 그 패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게 바로 나였다.
내가 성격이 원래 좀 못된 구석이 있었나···.
고작 스크림 경기지만 상대가 나 때문에 울적해 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다. 어디 가서 티 내지 말아야지.
스크림 첫승 기념이라고 해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든지 하는 이벤트는 없었다.
애초에 우리 숙소 밥이 호텔식이라 더 맛있는 음식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불현 듯 생각나는 정크푸드라면 모를까.
파라다이스 게이밍과의 스크림을 기점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꾸준한 교류전이 이어졌다.
지오 측에서 가이아 프로리그에 대한 내용을 발표하자 각 게임단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PG전 이후 S.솔리드의 스크림 성적은 압도적이었다.
나와 사이클론, 더블 에이스의 전투력이 리그 평균을 크게 웃돈 덕도 있지만 내 조언을 받아들인 팀원들이 스킬 등급을 파격적으로 업그레이드한 것도 한몫했다.
계약금, 연봉, 고액 옵션, 모두 다 프로게이머를 지속하기 위한 원동력이 되는 것들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라이센스 같은건 부가적인 문제고 결국 본질은 돈이다.
충분한 수익을 내 그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과연 돈 한푼 벌 수 없다고 하면 프로를 하겠단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도 S.솔리드팀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중에 있는 돈을 모조리 온라인 마켓에 투자했다.
6년을 프로 판에서 굴렀지만 팀 전원이 계약금으로 모자라 사비까지 털어가며 장비와 스킬을 구했단 얘긴 난생처음이었다.
‘이거 내가 괴물 팀을 만든 거 아냐?’
3월이 끝나갈 무렵, 다른 게임단은 우릴 보고 몬스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괴물의 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