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9화 (9/170)

제안을 하는 자, 받는 자 (4)

가이아에서 홀로 적을 상대할 때 상정할 수 있는 가장 큰 수는 4다.

그런 상황이 언제 나오느냐.

팀이 동률에 걸려 5라운드까지 몰렸는데 맵, 선수들의 컨디션, 잘못된 전략, 이 모든 게 어우러져 팀원이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혼자만 남는 경우다.

나 혼자만 남아본 적은 없었지만.

보통 마지막으로 남는 직업은 딜러 혹은 힐러다. 전열에 서는 탱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에 전생의 나는 그런 상황을 겪어볼 일이 없었다.

팀 내 에이스를 맡았던 선배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주 x같은 상황이라고들 표현하곤 했다.

특히나 포스트 시즌에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부담감으로 똥구멍이 오그라들 지경이라나.

아마 경기를 보고 있는 팬 입장에선 누구도 혼자 남은 선수가 이길 거로 생각하는 경우는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잘 보면 그런 기대를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왜냐? 상대 역시 아군 셋을 죽이며 체력이 많이 깎였을 테니까.

즉, 내가 지금 능력 증명을 위해 펼치는 일대다 전투는 프로리그 무대라면 거의 나올 일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이가 없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윌리엄이란 닉을 쓰는 암살자다.

아마 현재 가이아에서 줄을 세우면 50위 안엔 들어갈 만한 실력이다.

아직 게임 초기라고 해도 가입자 수가 50만 명이 넘었단 기사를 봤다. 0.0001의 재능인 셈이다.

“네가 잘하는 건 인정하는데 이런 식으로 우릴 완전히 무시하면 기분 나쁘지.”

“다른 사람들도 이 친구랑 같은 생각이야?”

“솔직히 좋다곤 말 못하지.”

네 명 모두 비슷한 생각인 모양.

나는 잘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난 이 팀에 필요 없을 것 같은 사람들 넷을 꼽았는데.”

같은 팀 소속으로 한솥밥을 먹을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이런 쇼에 이용당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프로생활을 해 본 자로서 팀 케미를 해치는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난 처음부터 팀에 필요 없다고 여긴 인원 넷을 골랐다.

이 테스트가 무사히 끝난다면 명예회장님의 마음속에 나의 주가가 조금은 오를 테니 저들은 영 아니던데요 하고 의견을 전하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이딴 말도 안 되는 짓에 시간 낭비할 것 같아!”

“결정은 네가 하는 게 아니라 저기 계신 회장님이 하는 건데.”

“회장님께선 유니크씨의 제안을 보고 싶으시다고 하시네요.”

“들었지?”

상관이 까라면 까는거지 지들이 어쩔 거야.

얼굴을 붉히는 녀석들을 놔두고 난 재빨리 의견을 타진했다.

“맵은 제가 골라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아직까진 관계자들이 내게 호의적인 반응이다.

이 시합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더 좋아지겠지. 실패하면 똥 쳐다보듯 할 테고.

맵 선택창을 한 바퀴 돌리고 나서 고른 맵은 잊혀진 사원.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복층 구조 맵이다.

사원은 바닥이 무너지는 걸 빼면 특별한 점이 없는 밸런스 맵, 상대 역시 맵 선정에 불만스런 기색은 없었다.

[경기가 곧 시작됩니다.]

팀전은 개인전과 다르게 10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시스템 보이스 다음엔 카운트다운. 3, 2, 1을 세고 전광판에 600이란 숫자가 새겨지는 순간 내 몸이 지면을 박차고 새처럼 날아올랐다.

“저 새끼 죽여!”

열 받은 적의 공세가 쏟아져 들어온다.

적 구성은 모든 직업이 사이 좋게 하나씩, 그중 백색과 적색은 전직을 마쳐 버서커와 아크위자드였다.

둘다 전직 클래스 중에서도 공격력을 중시하는 계열이니 한 대 잘못 맞으면 우스운 사람이 되는 상황이다.

호기롭게 일대다 전투를 제안해놓고 승리하지 못하면 꼴이 우습지 않은가.

그런 상황은 절대 안 된다는 일념하에 내 몸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담쟁이 넝쿨이 올라온 기둥 뒤로 몸을 피하기가 무섭게 사람 몸을 뒤덮고 남을 만한 큰 불이 터진다.

한 대 맞으면 체력이 절반은 사라질 강공이다.

어찌나 뜨거운지 열기만으로도 내 체력이 조금씩 깎여나갔다. 기둥이 그리 크지 않아서 스플래쉬 데미지를 입는 상황, 녀석들은 한창 흥분해 있었다.

“별 것도 아닌게!”

고개를 내밀만 하면 마법이 날아든다. 그러면서도 용케 달려들진 않는다. 간혹 수적 우위를 믿고 안 해도 될 짓을 하는 유저들이 있다.

이들은 적어도 그 레벨을 벗어났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숫자도 많은데 그렇게 플레이하면 재미없잖아.”

“그런 수준 낮은 도발에 넘어갈 줄 알···어어.”

기둥 밖으로 튀어나온 내가 제일 먼저 노린 건 힐러였다.

팀전에서 목표 선정은 힐러냐 아니냐로 갈린다.

가이아의 배틀은 오로지 체력의 퍼센티지로 갈리기 때문이 팀전에서 힐러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상대가 회복할 시간을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체력바가 꽉 차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탱커나 딜러를 단숨에 쓰러트릴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할 땐 힐러를 노리는게 정석이다.

내가 던진 비수가 투척 스킬의 보정을 받아 번개처럼 힐러의 어깨를 찔렀다.

곁을 지키던 탱커가 황급히 옷자락을 잡아당기지만 않았어도 목을 맞췄을 터였다.

“녀석이 힐러를 노린다. 견제해!”

“나만 지켜! 나만!”

힐러는 빼액 소리를 지르고 암살자는 마법사를 닦달한다. 알아서 한다고 짜증을 내는 마법사와 힐러를 등 뒤에 숨기며 나를 노려보는 탱커. 생각보다 뚫기 쉽지 않다.

발에 불붙은 것처럼 전장을 뛰어다닐 때 관중석에선 전력분석팀과 회장님이 의견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저 친구 빠르긴 빠르군.”

“원래 팀 영입 1순위였습니다. 오늘 테스트 결과만 보더라도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요.”

“나도 공부를 좀 했는데 이 게임은 이런 일대다 전투가 거의 없다면서?”

“보기 드물죠. 격투게임은 기본적으로 일대일을 상정하고 밸런스를 맞추니까요.”

자신의 힘을 잘 모르면 그것은 만용으로 이어진다.

“아쉽긴 하지만 이 시합, 저 친구가 지면 영입은 없던 거로 하지.”

“···알겠습니다.”

1:4라니,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시합이었다.

전력분석팀은 유니크가 설령 이기지 못하더라도 유의미한 결과만 내면 영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려 했으나 결정권자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해링턴 명예회장은 한 번 입 밖으로 낸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는 대쪽같은 성격, 분석팀은 아쉬움에 침만 삼켰다.

저만한 재능이면 다른 팀 어디서든 자리가 있을 거고 프로리그가 시작되면 저 매서운 공격력이 우리 팀을 향할 테니까.

차선책으로 사이클론이라도 잡아야겠다 생각할 때 탱커의 방패가 쇳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기어이 녀석이 아크위자드의 견제를 뚫고 거리를 좁힌 것이다.

공방을 주고 받는 아크나이트의 얼굴은 질린 기색이다.

왜 아니겠는가. 랭크 게임에서 적으로 마주치면 패배한 기억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좀 비켜봐!”

“닥쳐!”

공격하기 힘드니 비켜달라는 딜러, 모르면 닥치라고 짜증 내는 탱커.

이 경우엔 탱커 말이 맞다. 비키면 뒤쪽 힐러가 박살 날 테니까.

몸을 바닥에 닿을 듯 낮춰 아크나이트의 다리를 두들겼다. 탱커들이 쓰는 방패는 상체를 가릴 정도로 크지만 전신을 가리기엔 작다.

노련한 탱커라면 내가 몸을 숙이는 즉시 방패를 내림과 동시에 검을 내려쳐 내 골통을 쪼개놨을 테지만 그런 실력을 갖춘 탱커는 아직 게임에 없었다.

애초에 그런 무서운 놈이었으면 내가 이런 이벤트를 제안하지도 않았겠지.

순식간에 깎여나가는 체력바에 기겁한 나이트가 방패를 내리는 순간 전갈 꼬리마냥 휘어진 다리가 면상을 빡! 소리 나게 후려쳤다.

자세가 무너진 탱커는 더 이상 든든한 방패가 아니다.

틈새 사이로 보이는 적들을 향해 나는 허리춤에 달고 있던 비수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쾅쾅 소릴 내며 폭발하는 비수의 데미지는 그야말로 살벌했다.

그것이 진형 붕괴의 신호탄이었다.

상급 투척스킬에 담아낸 공격력을 참지 못한 적들이 좌우로 펼쳐졌다.

이제는 짐덩이나 다름없는 탱커를 방패 삼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날 잡기 위함이다.

“블러드 스트라이크!”

붉은 빛 꼬리를 달고 들어오는 가공할 속도의 지르기, 클러끼리의 충돌로 불꽃이 튄다.

“파이어웨이브!”

동시에 왼쪽에서 불의 파도가 덮쳐왔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암살자 녀석이 부모 죽인 원수 보듯 달라붙어서 완벽하게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연히 나와 힘을 겨루고 있던 암살자도 피해를 입었지만 누구도 아랑곳하는 녀석이 없었다.

정공법으론 안될 것 같으니 한 명이 발을 붙잡고 공격을 때려넣자고 합의를 본 것이다.

전투 시작 이후 하향곡선을 그리던 내 체력이 절반 아래로 내려가자 저들의 눈이 빛난다.

한 놈은 같이 죽자고 끈질기게 엉겨 붙고 마법사는 이 때다 싶어 헉헉 거리며 마법을 쏟아낸다.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는 모양새다.

처음부터 강공을 쏟아냈으니 슬슬 마력이 바닥 칠 때도 됐다.

만약 이게 게임이 아니라면, 체력이 떨어짐에 따라 동작이 서서히 느려졌겠지만 콜로세움은 체력이 단 한 틱만 남아있어도 똑같이 움직일 수 있다.

절반을 지나 천천히 떨어지던 내 체력은 어느 순간 완전히 멈춰 섰다.

드디어 아크위자드의 마력이 동난 것이다. 꽥꽥거리며 공세를 퍼붓는 암살자는 내게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아까부터 스킬 명을 자랑이라도 하듯 외치고 있으니 맞아주고 싶어도 무리였다.

가이아에서 스킬을 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투로를 몸에 익혀 자연스레 발출하는 방법, 아니면 지금처럼 입으로 스킬 명을 외치는 방법이다.

둘중엔 당연히 후자가 쉽지만 상대가 막기도 그만큼 쉬울 수밖에 없다.

프로라면 잘 쓰이지 않는 마이너 스킬까지 두루 꿰고 있으니 이름을 알려주면 나 이렇게 공격할 테니 맞춰 피하란 소리밖에 안 된다.

퍽 소리와 함께 날을 세워 관자놀이를 때리자 상대 눈이 풀린다. 순간 치명적인 일격이 터지면 캐릭터가 그로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기회다 싶어 일단 한 놈을 끝장 내려는데 곰같은 소릴 지르며 정신 차린 탱커가 달려들었다.

힐을 받고 회복한 녀석이 검을 앞세우고 들어온다.

아크나이트는 공방 밸런스를 중시하는 클래스라 공격도 얕볼 수 없다.

물론 나랑 실력이 비슷할 때의 얘기다. 보통은 뒤로 물러나 검의 거리에서 벗어나겠지만 나는 되려 녀석의 품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지자 나는 손목을 낚아채 그대로 녀석을 바닥에 꽂았다. 달려들던 힘이 있으니 슬쩍 어깨만 빌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쿵 소리와 동시에 내 발이 땅을 구르자 오래된 신전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우르릉 하며 무너져 내리는 틈을 타 나는 탱커의 몸을 밟았다. 아래 층 바닥까지 대략 5미터를 넘는 높이, 낙법이라도 치지 않으면 체력 손실이 상당하다.

내 발에 밟혀 아래서 나를 쳐다보는 탱커의 눈빛에서 진한 욕설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인이었다면 시발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탱커는 그대로 박살이 났다. 그냥 추락만 해도 체력이 크게 깎이는데 내가 클러로 몸을 두들겨 놨으니 버틸 리가 있나.

그로기 상태에서 잘못 떨어져 다 죽어가는 암살자, 마력이 바닥나 할 게 없는 마법사, 오들오들 떠는 힐러까지.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눈인사를 해주며 나는 남은 녀석들을 냉큼 쓸어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