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을 하는 자, 받는 자 (3)
이번이 세 번째였다.
뭐가 세 번째냐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이 보인 게 말이다.
가장 처음은 사이클론을 만났을 때 가이아 최상위 스킬을 내가 선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다음은 아직 코흘리개인 레이저를 만났을 때 초특급 선수들과 같이 팀을 꾸릴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난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재능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지금이었다.
생각지도 않고 있던 프로팀 제안, 전생에선 내가 먼저 문을 두드려 테스트를 치르고 2군 생활부터 차근차근 시작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내 자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회귀하기 이전에도 1군 무대에 붙어있을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재능이란 게 어설퍼서 옥석 가리기를 해내고 난 다음에야 나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지금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번쩍번쩍 빛이 나는 상황.
최상위 프로게이머로써 더할 나위 없는 보석이 강렬한 광채를 뿌리며 나 좀 봐주시오 하면 팀을 꾸려야 하는 관계자들 입장에선 군침 돌지 않겠는가?
북미 프로리그는 한국보다 1년 먼저 시작한다.
당장 올해 여름이면 시즌이 가동된다.
나는 조심스레 선수 구성원에 관해 물었다.
전생의 나는 이 시기에 그냥 집과 학교를 왔다 갔다 할 뿐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아직 한국엔 가이아가 열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이 시기 북미에 관한 정보를 내가 알고 있을 리 없잖은가.
그저 S.솔리드에서 사이클론과 함께 프로리그를 우승, 연달아 월드 챔피언십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는 결과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저 말고 몇 명이나 접촉하셨죠?”
“최소 필요 인원에 맞춰 포지션 별로 영입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 없이 업계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들에게만 접촉했습니다.”
콜로세움을 치르는 데 필요한 인원은 네 명이지만 리그에서 당일 엔트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선수는 여섯 명이다.
2, 4라운드가 맵이 먼저 공개되는 방식이기에 어떤 팀이든지 선수는 여섯 명을 풀가동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맵마다 직업 간 유불리가 전혀 다르니 말이다.
“청색 계열엔 저 말고 유명한 선수가 여럿 있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해도 사이클론이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그 친구도 이 분야 최고 레벨인 건 의심할 여지가 없죠. 하지만 저희 팀 분석결과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건 유니크 씨입니다. 그것도 제법 큰 격차였죠.”
아직 리그는 시작도 안했는데, 전력분석팀을 벌써 만들었나?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업계 최고 실력을 지닌 걸 알아봐 주니 기분은 좋았다.
현재 내가 갖춘 신체능력은 의심할 여지 없는 가이아 최고 레벨, 한순간 반짝 타오르고 사라지는 그런 재능이 아니라 몇 년이고 리그를 압도할 최상급 기량이다.
내 예측이 맞는다면 향후 1년간은 나를 대적할 선수가 아예 없을 테고 2년 차 말기쯤이나 돼야 쓸만한 선수들이 나와 손발을 맞출 정도가 될 것으로 생각됐다.
물론 이건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데이터였기에 언제든 오차는 생길 수 있었다.
특히 그 오차범위를 크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장르불문, 모든 게임은 선두에서 치고 나가는 톱클래스 선수의 기량에 따라 전체 레벨이 끌어올려 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만약 이 시대에 내가 없었다면 전투 스킬이 상향 평준화를 이루는데까진 2~3년 정도가 걸리겠지.
그러나 내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리그를 박살내면 어떻게 될까.
프로의 세계는 실력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갖은 방법을 시도하는 곳이다.
그중 제일 만만한 건 다른 선수들의 장점을 카피하는 것.
아마 내가 가진 밑천을 전부 쏟아내 리그를 압도하면 일 년 뒤엔 나와 동등한 레벨에 준하는 선수들이 우후죽순 나타날 것이다.
제2의 유니크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실력을 좀 더 숨길 걸 그랬나?’
S.솔리드 이외에도 다른 팀이 같은 판단을 내렸다면 곤란한 일이다.
그 말인즉 난 이미 가이아의 레벨을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단 뜻이니까.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엄청난 길을 걸어야 하는데 착오가 생길지도 모른다.
“대화를 나눠보니 팀원 간 의사소통 문제도 크게 없을 것 같은데요. 같이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모기업은 솔리드 테크놀러지입니다. 동양엔 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분기별 매출이 10억 달러 이상입니다. 네이밍 스폰이 아니라 확실한 저변 확대, 투자 의지를 갖고 팀을 창설했고요.”
S.솔리드가 얼마나 탄탄한 지원을 받는진 잘 알고 있다.
해외로 이적하는 선수가 가고 싶어하는 제1순위 팀이었으니까.
프로팀이 대기업 지원을 받는 건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규모와 상관없이 작은 기업이 더 열심히 팀 복지에 기여하는 경우도 왕왕 있기에 기업의 크기 자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요는 얼마나 게임단에 관심을 주고 밀어주느냐이다.
그런 면에서 솔리드 테크놀러지는 별 다섯 개 만점을 받아도 되는 곳이다.
“선수를 딱 네 명만 뽑진 않을 텐데 하나만 물어보죠. 사이클론은 영입대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저희 영입대상엔 없습니다.”
없다고?
전생엔 사이클론이 S.솔리드 간판 암살자였다. 월드챔피언십에 가서 그가 없었다면 초대 우승컵도 물거품이었을 터.
설마 내가 이 시기에 게임을 해서 미래가 크게 바뀌는 건가?
불현 듯 걱정이 밀려온다. 미래가 너무 많이 바뀌면 내 정보의 가치가 크게 낮아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한국에 돌아가서 레이저 같은 특급 선수들과 팀이 되면 어차피 미래는 바뀔 테지만 적어도 당분간 만이라도 무언가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야 최강의 스킬이든 아이템이든 꿀 좀 빨 거 아닌가!
그러나 내겐 이 제안을 꼭 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빌어먹을 학업!
부모님을 설득시키려면 그에 맞는 카드를 맞춰야 한다.
해외유학(게임하러 가는거지만)과 고액 연봉, 이만하면 부모님도 마음이 동하시지 않을까.
나는 침을 삼키고 나서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시원하게 계약금 얘기나 해볼까요.”
계약금 얘기가 나오자 남자는 반쯤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
“유니크 씨가 팀에 합류해주시면 올해 연봉으로 3만 달러에 추가 옵션을 보장···.”
“10만 달러.”
나는 그의 말을 단숨에 자르고 들어갔다.
3만 달러? 내가 퇴물 소리 들을 때도 외국에서 한화 2억씩 받고 다니던 인간이다.
달러로 환산하면 대략 20만 달러는 될 거다.
물론 나는 지금 경력도 하나 없는 신참이기에 비교를 하면 안되겠지만.
대뜸 10만 달러를 부르자 남자가 날 이상하게 본다.
미친놈인가 싶겠지. 10만 달러가 개집 이름도 아니고.
프로 경력 백지인 어린 친구가 입에 담을 액수가 아니다.
“유니크 씨. 아직 우리는 유니크 씨에 대한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첫 계약금으로 너무 과한 액수는···.”
“테스트 한 번 합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혀로 마른 입술을 한 번 적셨다.
“프로리그를 위한 팀이라면서요. 관계자들 데리고 테스트 한 번 합시다. 영입 리스트에 올려둔 선수들 모아다가 친선 게임이라도 해보면 딱 좋겠네. 거기서 내 능력을 검증해 드리겠다 이 말입니다. 솔직히 나도 어떤 선수들하고 팀을 하게 될지 알아야 결정할 거 아닙니까. 우승은커녕 꼴찌 할 거 같은 팀엔 돈을 많이 준대도 안 갑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지금 내 재능이면 전보다 더 벌면 더 벌었지 못 벌 리가 없다.
돈이야 그만하면 됐으니 남은 건 커리어를 쌓는 것뿐이다.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엄청난 기록을 말이다.
“내가 10만 달러 값어치를 못할 것 같으면 계약 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내 말을 들은 솔리드 직원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에 꼭 의견을 전해주겠단 말을 끝으로 자리를 마쳤다.
***
S.솔리드에서 빠르게 자릴 만들었다.
내가 테스트 이야길 꺼낸지 고작 사흘 만이었다.
이런 점은 칭찬해줄만 했다. 역시 추진력이 있는 팀이다.
한국 프로팀에 이런 제안을 했으면 결과가 어땠을까.
어디 겨우 유망주 신분에 거래를 하려고 드느냐며 쓴소리 한 사발 먹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공개 연습 대전은 랭크게임과 다르게 관중의 자유 참여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관중이 아예 없진 않았다. 전부 S.솔리드 관계자들이다.
이제 막 팀을 만들었다면서 사람이 제법 많다.
스카우터가 그들을 조목조목 소개하는데 전력분석원과 코치, 감독, 모기업 사람들이 자리 중이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건 하얀 양복에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나온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살집이 좀 있으셔서 그런지 유명한 치킨집 하얀 할아버지를떠올리게 했다.
“저희 솔리드 테크놀러지 명예회장님이십니다.”
진짜 프랜차이즈 닭집 할아버지 아닌가 했는데 예상 밖의 정체였다.
다른 사람들이 박수를 치길래 나도 덩달아 손바닥을 부딪쳤다.
팀 지원이 빵빵하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명예회장님이시면 다른 사람보다 모기업에 끗발도 좋으실 거 아닌가.
그런 분이 게임단 오너랜다.
“회장님께서 e스포츠 시장 확대를 눈여겨보시고 적극 투자에 나서셨는데 가이아가 그에 걸맞은···.”
잡설이 길다.
모두 회장님 소개에 주목하고 있을 때 나는 참가자들의 얼굴을 훑었다.
최고 레벨 선수들에게만 권했다더니 다들 랭크 매치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유저들이다.
다만 내 맘에 쏙 드는 영입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관중석에서 보는 것과 실전에서 손을 섞어봤을 때 느끼는 차이겠지.
실제로 넷상에서 팬들이 지지하는 최고 선수와 선수들이 직접 뽑은 최고 선수가 다른 경우는 왕왕 존재한다.
오늘 테스트를 하기 위해 모인 선수는 총 일곱.
다들 아주 희망차 보이는 게 프로게이머가 됐다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있는 모양새다.
미안하드아!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이려면 어쩔 수 없이 너희를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단다.
백색 둘, 청색 둘, 적색 둘, 힐러 하나.
이 중에 전직을 못한 사람은 나랑 힐러 뿐이다.
전직이 늦은 건 나의 초기 스탯이 제일 높은 탓이다.
가이아는 전직 퀘스트를 하기 위해 초기 스탯의 10배를 달성해야 한다.
이 중 적성시험 SS를 받은 사람은 나뿐일 테지.
A급과 S급도 초기 스탯에 차이가 있는데 SS급은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그럼 힐러도 적성시험 결과 때문에?
아니다. 저 녀석은 그냥 게을러서 그런 거다.
“이 자리는 여러분의 자질을 좀 더 명확히 테스트하는 자리입니다. 테스트 방식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힐러 인디고씨를 제외한 풀리그 방식, 4:4 팀게임 한 번을 치를 예정입니다.”
풀리그란 소리에 나를 스치는 시선이 많아진다.
아무래도 콜로세움 최상위권은 고인물 잔치다보니 다들 내 전투력을 알고 있는 탓이다.
“오늘 테스트 결과가 계약 조건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테스트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비밀 유지 조항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유니크 저 녀석 빼면 다 해볼 만 한데?
다들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를 인정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가망이 없다.
물론 인정 안 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지만.
35분 만에 여섯 번의 개인전, 팀전을 모두 끝냈을 때 내 성적은 처음 예상대로였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는 전승.
테스트 참가자들의 결과를 뽑아 올린 분석원들이 열심히 할아버지 옆에 붙어 조잘거린다.
이 선수는 어떻고 저 선수는 어떻고, 들어보지 않아도 대충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짐작된다.
한참 설명을 듣던 명예회장님과 나의 시선이 공중에서 잠시 얽혔다.
아마 내가 스카우터를 통해 역제안한 10만 달러 이야기도 보고를 받으셨겠지.
나를 보는 시선이 어쩐지 따끔따끔하다.
“자네가 유니크지? 실력이 굉장히 좋더군.”
“감사합니다.”
일부러 잘 보시라고 동작도 화려하게 큼직큼직한 기술로 꽂아넣었다.
왜 그런 거 있잖나.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그라운드로 남자 둘이 바닥에서 비비적거리는 거보다 순수 타격 싸움이 인기 있는 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더 있나?”
“다른 거 말입니까?”
“부담 주려고 물어본 건 아닐세. 왠지 있을 거 같아서 물어봤네.”
“보여드릴 게 남아있긴 한데 그럼 제 몸값이 많이 올라갑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전생에선 이런 나대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나도 몰랐다. 내가 이런 식의 연기를 잘할 줄은.
능력이 사람을 만드는 건가···?
내 답변이 맘에 들었는지 회장님이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보고 싶구먼. 몸값 올릴 재주가 있으면 신분, 경력 상관없이 올려줘야지. 그게 아메리칸 스타일이니까.”
회장님의 답에 가볍게 박수를 친 나는 손가락으로 네 명을 지목했다.
가만히 있던 날 왜 가리키느냔 표정이다.
이윽고 이어진 나의 말은 그들을 더욱 바보처럼 만들었다.
“일대다(一對多) 게임을 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