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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6화 (6/170)

제안을 하는 자, 받는 자 (1)

가이아 유저들이 콜로세움을 뛰는 이유.

자신이 육성한 캐릭터로 실력을 겨루는 게 재밌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코인에 있었다.

경기를 한 번 이길 때마다 올라가는 건 랭크 점수뿐만이 아니다.

결투장 코인이라는 것을 보상으로 지급하는데 이게 사실상 진짜배기다.

캐릭터를 강화하는 요인인 장비와 스킬, 그 중 장비는 필드 사냥을 통해 얻는다면 스킬의 주요 공급처는 결투장이었다.

코인을 내고 랜덤한 스킬을 뽑아내는 것이다.

로브를 쓰고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NPC에서 코인을 주자 스킬박스를 건네준다.

박스의 크기는 손바닥 위에 올라갈 정도.

양손으로 잡아 돌리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연한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대부분은 중급이나 하급에 속하는 스킬이다.

스킬의 등급은 낮은 순서대로 하급, 중급, 상급, 초월급, 전설급으로 올라간다.

조금 전에 탱커를 무자비하게 난타한 스러스트 스킬의 경우는 중급.

중급 스킬이 왜 이렇게 위력적이냐고?

가이아의 모든 스킬은 상황에 맞춰 쓰면 하급 스킬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모든 캐릭터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데 큰 기술일수록 마력 소모가 크다.

심지어 이 마력은 경기중엔 거의 회복되지 않는다.

마력이 다 떨어지면?

그때부턴 순수한 주먹질 대결이다.

등급이 낮은 스킬은 마력 걱정할 염려가 덜한 편이다.

게다가 기술을 실패할 경우 져야 하는 리스크가 작다.

큰 기술에 실패하면 마력은 마력대로 쓰고 큰 틈을 보인다.

이 바닥 용어로 말하면 후딜이 생긴다고 하는데 상대가 발동이 빠른 스킬을 이용해 그 틈새를 치고 들어오면 꼼짝없이 당해야 한다.

열 개 묶음으로 산 박스는 이제 겨우 두 개만 남아있었다. 계속 이어 열어보는데 연신 푸른빛을 뿜던 박스가 순간 금색과 함께 큰 진동을 냈다.

[전설급 스킬 - 용의 충격 / 무도가]

-손과 발을 이용해 용의 힘을 뿜어낸다.

이게 여기서?

스킬의 이름, 그리고 간단한 설명 밖에 나오지 않아 잘 모르는 사람은 진가를 알기 어렵지만 무도가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필수 스킬 중 하나다.

가이아는 스킬이나 장비 성능의 설명이 다소 부족한 편이다.

덕분에 프로팀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스킬이 떴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것을 입수해 연구하기 바빴다.

발동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실패하면 리스크는 어느정도인지, 효과적으로 막는 방법은 무엇인지등을 철저히 분석하는 것이다.

대개 프로게이머라면 화려하고 위력적인 스킬보단 실패시 리스크가 적은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번 삐끗해서 승부가 갈리는 전장에선 부담 없이 내지를 수 있는 기술이 인기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용의 충격은 최상위 견제기다.

마력소모도 적은 데다 발동이 워낙 빨라 막기도 쉽지 않다.

이건 무도가를 하라는 계시인가?

청색 계열 전직은 총 세 개다.

회피와 반격에 뛰어나며 한 방 한 방의 공격이 위력적인 웨폰마스터.

뛰어난 은신으로 모습을 감추고 원거리에서 적을 사냥하는 다크레인저.

육체를 극한으로 단련해 적을 유린하는 무도가,

어느 직업이 꼭 뛰어나다 말할 수 없지만 스킬 운이 따라주는 직업을 택하는 게 유리한 편이다.

나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 떠올렸던 굵직한 정보들을 다시 한 번 더듬었다.

사이클론이 얻게 되는 그림자 발자국은 청색 공용이니 직업에 제약이 없다.

전설을 뛰어넘는 등급의 스킬은 아직 나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지금 걱정할 건 없다.

그때 가서 캐릭을 다시 키우면 그만이고 어차피 캐릭터를 하나만 다루는 사람은 없다.

빡빡하게 육성하면 반 년 이내로 스탯 최대치에 도달할 테니 말이다.

최고등급 스킬을 이리 손쉽게 얻다니.

기분 좋게 마지막 남은 박스를 뜯는데 이번엔 보라색이다.

7년 가이아 인생 중 이랬던 적이 없었기에 나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보라색 연기는 초월급이다.

전설보다 한 단계 낮긴 하지만 초월급만 돼도 어지간히 나오지 않는 스킬이다.

상급이 나올 확률이 1퍼센트.

초월급이 나올 확률이 0.1퍼센트다.

[초월급 스킬 - 부동심 / 무도가]

-충격으로 정신력이 흐트러지는 경우를 막아낸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부동심 역시 무도가를 굴리는데 꼭 필요한 스킬.

상대의 공격으로 기술이 캔슬되거나 자세가 무너지는 경우를 줄여주는 패시브 스킬로 무늬는 초월급이지만 효과는 전설급 못지않은 스킬이다.

이러면 계획이 완전 틀어지는데···.

적당한 상급 스킬이 나오면 사이클론에게 던져주고 환심을 살 계획이었는데 부동심이나 용의 충격은 너무 등급이 높지 않은가.

게다가 사이클론은 전생에 웨폰마스터였다.

무도가 타입도 아니니 괜히 쓸데없이 좋은 스킬을 쓰레기통에 처박을 순 없다.

어쩔 수 없지.

전생에 숙소에서 갈고 닦은 연기를 펼쳐 보이기로 했다.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사이클론은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필요한 상급 스킬이 잘 떴거나 초월급 스킬을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와 반대로 나의 얼굴은 완전 우거지상이다.

의도적인 우거지.

대부분의 사람은 경쟁자가 발을 삐끗했을 때 작은 쾌감을 얻는다.

사이클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킬 박스를 뜯으러 가자고 할 때만 해도 꿍해있던 녀석이 내 얼굴을 보더니 맘에도 없는 위로를 건넨다.

“흠흠, 스킬이 잘 안 나오셨나 봅니다.”

“포인트를 전부 부었는데도 좋은 게 안 나왔네요.”

박스 열 개로 전설급 하나, 초월급 하나를 얻었다고 밝히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조용히 넘어갈 때였다.

***

조용히 발톱을 숨기고 사이클론과 듀오로 콜로세움을 돌린 지 사흘이 지나자 나의 랭크 점수는 천장을 뚫었다.

다이아 3221점.

다이아 위로는 마스터와 그랜드마스터 계급이 존재하는데 내가 다이아인 이유는 아직 시즌 초기여서 다들 계급이 낮은 탓이었다.

내 랭크 게임 승률은 날고 긴다 하는 천상계에서도 90퍼센트를 넘은 상태.

독하게 맘먹었으면 승률을 더 높일 수 있었겠지만 그날 이후 적당히 손대중을 하느라 지는 게임도 종종 있었다.

완전히 속이 좁은 녀석은 아니었는지 사이클론은 나를 동등한 호적수로 인정하고 향후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웨폰마스터가 되겠다는 그에게 나는 스킬을 선물하곤 했다.

사이클론도 쓸만한 무도가 스킬이 나오면 내게 줬기에 서로 득이 되는 거래였다.

‘슬슬 전직을 할 때가 됐는데.’

캐릭터 초기 스탯의 3배가 되면 콜로세움이 열리고 10배가 되면 전직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다.

스탯 숙련도는 필드 사냥, 던전 탐험 뿐만 아니라 경기를 통해서도 오르는데 사흘간 콜로세움에서 푹 익었더니 슬슬 목표 수치에 근접한 상태였다.

“무슨 고민 있어?”

계급이 높아지니 매칭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제법 길어졌다.

대기실에서 내 표정을 흘깃 바라본 사이클론이 물었다.

내 얼굴에 나 고민있소 하고 쓰여있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사실 고민이 있긴 했다.

별 거 아닐 수도 별 거일 수도 있는 문제인데 바로 한 달이 지나면 내가 다시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젠장!

나는 아직 열여덟 살 아닌가.

이 황금 같은 시간에 다시 학교에 가야 한다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여러 번 프로게이머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괴성을 지르는 어머니, 그간 게임하는 걸로 쓴소리 한 번 없었던 아버지도 이번만큼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너도 학교 가야 하지?”

“당연한 걸 물어? 설마 학교 안가고 게임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졸업하고 제대로 시작해도 늦지 않아.”

아니 늦는단다···.

전생의 삶보다 조금 더 좋아진 이 축복 받은 피지컬은 나이를 먹을 때마다 떨어질 예정이었다.

게다가 한 번 다닌 학교를 다시 다녀야 한다는 게 큰 고역이었다.

인생에 도움이라도 됐으면 모르겠는데 지난 삶에선 확실히 시간 낭비였다.

그 시간에 프로 생활을 1년 더 했으면 내 연봉이 달라졌을 거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조용히 고민에 잠겨있는데 두둥 하는 북소리와 함께 게임이 시작된다.

“아이고 청색 듀오님들. 환영합니다.”

탱커와 마법사가 우릴 격렬히 환영한다.

천상계에서 우리 듀오의 명성은 이미 크게 높아진 상태였다.

서버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바쁠 텐데도 관중 숫자가 천 명 단위를 웃돌았다.

그들은 현재 서버에서 가장 뛰어난 딜러의 움직임을 보고 싶어 했다.

하나하나 눈에 새겨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겠지.

그럴수록 나는 능력을 더욱 숨겨 사이클론 밑으로 숨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경계하는 건 나비효과였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는가?

카오스 이론의 토대가 된 나비효과는 제법 유명한 개념이다.

전생에서 내가 가이아를 제대로 즐기기 시작한 건 올해 후반기부터다.

한국 서버가 가을이 돼서야 열린 탓이다.

즉 지금 내가 눈에 띄어서 원래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했다.

프로게이머의 삶이 너무 바빴던 탓에 내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을 주식이나 복권 번호는 외우지 못했지만 적어도 가이아 내에서 최고 기밀이라 할만한 정보는 꾹 쥐고 있었다.

나는 사소한 실수로 이 보물과 맞먹는 정보들이 쓸모없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최근 나의 몸놀림이 초창기 같지 않자 사이클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감을 되찾아 착실히 성장 중이었다.

내가 만약 저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흥미가 식어 내가 원하는 스킬을 얻기 전에 게임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녀석을 대신할 더 괴물같은 유저가 프로의 세계에 나타났을 지도 모르고.

전생에서 사이클론은 프로 생활 동안 나보다 훨씬 큰 커리어를 쌓았지만 전성기는 되려 나보다 짧은 편이었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유독 피지컬 저하가 빠른 편이었다.

힐러로 클래스를 바꿨으면 좀 더 프로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도 과감히 은퇴를 결정해 명성에 거의 오점을 남기지 않았다.

떠나야 할 때를 알지 못하고 팬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 선수가 이 바닥에 8할 이상이다.

큰 명성을 누린 선수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한 편인데 돈보단 정상의 무대가 선사하는 쾌감에 중독된 탓이리라.

“네 차례야.”

잡념에 빠져 있던 나를 사이클론이 깨운다.

1승을 따고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이 가볍다.

이번판은 적당히 하고 빠져야겠네.

승패를 헤아려보니 슬슬 한 번 미끄러질 시기가 됐다.

나는 승률을 사이클론 밑으로 적절히 유지하는 중이었다.

“맵은?”

전광판에 떠오른 맵은 망자의 광장.

음침한 어둠을 배경으로 거대한 묘비가 잔뜩 솟은 소규모 맵.

마력조성 레벨이 1이라 마법사에겐 아주 곤욕스러운 맵이다.

마법을 쓰기 위해 더 많은 마력을 부어야 하니까.

상식적으로 탱커나 암살자를 내야 할 텐데 놀랍게도 마법사가 걸어 나온다.

던지는 카드. 버리는 패.

말은 달라도 같은 뜻이다. 상대 에이스 플레이어를 저격할 요량으로 가장 전투력이 낮은 패를 소모하는 작전이다.

어차피 전투력이 낮은 팀원은 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상대 에이스 순서에 맞춰내면 무조건 이득이다.

운 좋게 이기기라도 하면 대박이고 져도 손해가 아니니까.

앳돼 보이는 외모를 한 마법사 친구 머리 위의 닉네임을 읽은 나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레이저···설마 그 레이저는 아니겠지?’

가이아에서 닉네임은 중복이 가능하다.

내 닉네임만 해도 그렇다. 유니크란 닉네임이 얼마나 흔하겠는가.

프로가 되면 노란 이펙트가 붙어 좀 튀긴 하지만 그 전엔 너도 나도 닉네임 뒤에 #숫자 달린 복제 취급이다.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국 가이아 프로리그 3년 차부터 혜성처럼 등장해 두각을 나타낸 초신성 플레이어.

천재 마도사의 수식을 달고 리그를 폭격한 선수와 닉네임이 같은 탓이었다.

3년차에 레이저가 적색 계열 전직인 아크위자드를 선보였을 당시 나이가 열여덟이다.

그럼 저게 본인이 맞다면 대체 몇 살이란 소리지.

계산해보니 열다섯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열다섯보다 살짝 더 먹은 얼굴이긴 한데 어쩐지 느낌이 비슷하다.

과거 우리 팀 감독과 코치가 제일 싫어했던 선수.

나는 조심스레 그의 본명을 불러봤다.

“혹시 김민준이라고 알아?”

아무래도 당첨인 모양이다.

꼬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아세요?”

잘 알지.

우리 팀이 좀 근본 없는 팀이라 네가 경기에 나와서 선배들을 박살 낼 때마다 그 불똥이 내게 튀었거든.

그렇다고 딱히 악감정이 있단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성질 더러운 선배들이 어린애한테 줘터지는 걸 보면 속으로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삑- 하고 경기 시작을 알렸는데도 둘이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공격이 이어지지 않는다.

처음 보는 상황에 관중들도 무슨 일인가 싶었던 모양,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짐에 따라 내가 먼저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경기가 끝나고 할까?”

“네···.”

미덥지 않은 목소리지만 내가 자세를 잡자 곧바로 대응 태세를 갖춘다.

그나저나 나중에 뭐라고 설명한담.

모르는 형이 대뜸 이름을 불러가며 아는 체를 했으니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야 하는데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일단 이기고 보자.

사이클론을 처음 봤을 때도 향후 진로에 대해 아이디어가 번뜩였는데 레이저를 보자 또 다른 길이 선명하게 빛난다.

한국이 배출한 가이아 최고의 마도사라는 레이저와 같은 팀에서 뛴다면 게임이 아주 재밌으리란 생각.

메모장으로 정리할 때만 해도 내 능력을 제대로 몰랐으니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애매했는데 이제야 뭔가 굴러가는 느낌이 든다.

어디 그럼 실력 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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