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크 (2)
초창기엔 이랬던가?
눈 앞에 펼쳐진 가이아는 내가 알던 게임이 아니었다.
기억 속의 필드는 좀 더 세련되고 부드러운 텍스쳐를 가졌었으니까.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했다.
전 세계를 무대로 가이아 프로리그가 시작된 이후 지오는 캡슐 형태의 고가 콘트롤러를 개발, 판매했다.
헤드기어 형태의 VR접속기와는 차원이 다른 물건으로 게임을 했으니 그때와 비교해 퀄리티가 낮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제법 빨리 직업선택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초보자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스탯에 목매달진 않으니 이들은 적절히 시험을 치르고 나선 사람들이다.
“파티하실 분 계십니까? 힐러분 찾습니다.”
“밤새도록 달리실 파티원 찾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며 영어 실력이 늘긴 늘었나보다.
간단한 영어는 통역기 없이도 알아들을만 했다.
다른 이들이 생소한 VR감각에 허둥거릴 때 몇몇은 광장에 모여 파티원을 모으는 중이었다.
저들은 아마 클로즈베타 테스트를 거친 유저들일 것이다.
아주 익숙하게 몸을 움직였고 파티를 하면 향후 게임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혹시 저희랑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자리가 남아서요.”
어느 쪽으로 향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하고 있던 내게 세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가이아의 파티는 기본적으로 4인 구성이다.
대규모 파티인 경우엔 20인 조합을 요구하는 특수던전이 있긴 해도 대부분은 소규모 파티다.
키가 제법 큰 전사 한 명, 챙이 큰 모자를 눌러쓴 마법사, 긴 지팡이를 든 힐러까지, 나만 합류하면 각 직업에 한 명씩 끼는 셈이니 밸런스가 아주 좋았다.
다들 인물이 좋다.
마법사는 파티 유일의 홍일점이었는데 미모가 보통은 넘었다.
남정네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이아엔 다른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모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VR게임이 가져올 수 있는 현실과의 괴리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설명을 개발 측에서 내놓았는데 덕분에 게임 초기엔 일부 비난 여론이 존재하기도 했다.
게임 속에서까지 외모로 스트레스를 받기 싫다나?
그러든 말든 지오에선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플레이어의 외모에 조금 보정 효과를 넣어주는 정도로 조율을 끝마쳤다.
“외국분 같은데 의사소통엔 문제없으신가요?”
“문제없습니다. 요즘 통역기 성능이 탁월해서.”
가이아 내에서 쓰이는 통역기는 글로벌 스탠다드다.
실시간 통역 기술을 제일 먼저 대중화시켜 보급한 게 가이아의 개발사 지오였다.
“다행이네요. 움직임을 보니 CBT(클로즈베타테스트) 경험이 있으신 듯합니다. 저희 셋도 마찬가지예요.”
이들이 내게 접근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넓은 광장이지만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적성시험을 치르느라 아직 포탈을 넘지 못한 상황, 나보다도 빨리 나온 유저들은 초기 스탯의 소중함을 간과한 초보들이 대다수였다.
적성시험 등급이 E가 나오건 D가 나오건 소위 즐겜을 하는 부류다.
게다가 VR게임에 익숙치 않아서인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다.
비틀거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광장 속에서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유저는 그 자체로 실력이 보장된 셈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됐다. 파티사냥의 장점은 힐러를 대부분 동반하니 생존율이 크게 올라간다는 점과 스탯 숙련도를 더 받는 장점이 있다.
네 명이 개인플레이를 하는 것보단 네 명이 파티를 하는 편이 경험치 획득량이 많다.
다만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은 모든 직군이 딜러가 아니라는 점.
CBT 유저들이라곤 하나 이들의 숙련도가 프로인 내게 비할 바는 아닐 테고 탱커와 힐러는 딜을 제대로 넣지 못할 테니 나와 마법사 둘이 사냥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초반 레벨링 구간에선 암살계가 아무래도 육성 속도에 크게 관여한다.
적색 계승자, 흔히 법사캐로 불리는 직군은 확실한 화력을 보장하지만 육성을 마치기 전까진 주기적인 마력부족에 시달릴 테니 말이다.
이들도 그 점을 알기에 몸놀림이 좋아 보이는 청색인 내게 손을 내민 것이다.
잠시 고민한 나는 이들의 손을 잡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장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극초반을 무사히 넘기기 위함이었다.
청색 계열은 암살자답게 체력과 방어가 무척이나 낮은 직업이다.
초반 몬스터라고 해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날렵한 몸놀림에 전생의 경험이 있으니 한 번도 안 맞을 자신은 충분했다.
이곳이 한국이라면 말이다.
현재 난 북미서버에 접속해 게임 중이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대륙간 데이터 전송에서 발생하는 지연시간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었다.
반 박자씩 캐릭터가 늦게 움직이는 렉이 문제였다.
서버가 해외에 위치해 발생하는 렉만큼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문제.
수락의 뜻을 밝히자 초대장이 날아들었고 녹색 이펙트와 함께 파티에 합류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환영합니다. 그럼 가볼까요.”
***
제이크, 트릭, 프로스트.
순서대로 탱커, 마법사, 힐러의 닉네임이다.
이들의 목적지는 스타팅 지점에서 가까운 던전이었다.
대뜸 던전을 간다는 말에 조심스레 그들의 적성시험 결과를 물었다.
가이아는 특이하게도 레벨이 없는 게임이다.
레벨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스탯으로 게임 내 활동을 꾸준히 할수록 스탯이 성장하는 개념이다.
그 외엔 스킬이나 아이템으로 능력을 보조하게 된다.
즉 출발 때 받은 스탯이 당장 필드플레이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친단 뜻이다.
내 질문을 받은 셋의 표정이 제법 흡족해 보인다.
"저랑 프로스트는 B, 트릭은 무려 A를 받았죠."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한다.
어지간히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한 게 아마 북미서버 첫 시작 당시 B등급은 상위 3퍼센트 이내, A는 0.5퍼 안에 드는 수치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CBT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이들의 게임 재능은 일반 플레이어 사이에선 충분히 훌륭한 편이었다.
특히 A를 받았다는 마법사는 성장 여부에 따라 프로 문턱을 두드려 볼 수도 있을 정도.
“유니크씨는요?”
“저는 A입니다.”
“이야. 굉장하신데요!”
원래 활발한 친구인 제이크는 박수를 쳤고 조용한 편이던 마법사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처음엔 B라고 하려 했는데 어차피 사냥을 시작하면 실력을 보일 예정이어서 슬쩍 올린 것이다.
굳이 SS라고 밝히지 않은 건 초반에 불필요한 일에 휘말리는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손을 싹싹 비비며 앞장선 제이크는 숲 한복판에 있는 던전의 입구를 찾았다.
“위치가 바뀌진 않았네요.”
일행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작은 언덕 아래 있는 문을 열고 안쪽으로 향했다.
발을 내딛자 작은 불이 던전을 밝히며 탁한 시야를 제공함과 동시에 시스템 보이스가 울렸다.
[잊힌 고무덤에 들어섰습니다. 유적 발견으로 인해 스탯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은빛 이펙트가 너나 할 것 없이 파티 전체에 빛났다. 스탯이 올랐다는 증거다.
“당장 저희 체력이 낮아서 해골병을 상대하기 어렵긴 하겠지만 이곳은 적이 몰려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초반을 단련하기엔 최적의 장소죠.”
“그만 떠들어요. 유니크씨도 CBT 하셨다고 하니 익숙한 장소일 거예요. 그렇죠?”
“예.”
익숙하다 뿐이랴.
이보다 수백 배는 어지럽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음습한 던전을 누볐다.
이들은 끽해봐야 가이아를 선행유저로 한 달 정도를 즐겼으니 경험적인 면에선 아직 병아리에 불과했다.
‘그래도 약한 해골병을 상대하기엔 충분하지.’
던전에 입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번째 적이 나타났다.
턱을 달그락거리며 달려드는 해골병은 하얀 검을 들고 있었는데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제이크가 자연스레 방패로 방어하는 사이 프로스트가 신호를 보냈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 마법을 자유자재로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방패 뒤쪽에서 내가 처리해주길 기다리는 것.
“염려마세요. 저 힐 잘 넣습니다.”
저 말은 힐 줄 테니 빨리 가서 공격하란 뜻이다.
프로스트의 말에 슬쩍 제이크 뒤로 다가간 내가 클러로 적의 갈빗살을 헤집었다.
초반 던전답게 형편없는 적이었다.
적의 공격을 받아낸 제이크는 방어스탯이 올랐을 테고 내게 힐을 부여한 프로스트는 마력이, 나는 민첩과 근력이 올랐다.
마법사는 뭐하냐고?
조금 전투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지만 엄연한 파티원이기에 소소한 숙련도 이득을 봤다.
가만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진 않을 생각인지 적을 먼저 발견할 땐 그녀가 앞으로 나서 화염구를 투척했다.
마을로 가면 원거리용 장비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적을 처리할 때마다 제이크 뒤에 붙어 팔을 휘두르는 작업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색했던 건 잠시뿐, 점차 사냥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초급 던전이라 적의 움직임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고 일행은 사냥이 이렇게 쉬웠나 느끼고 있었다.
“테스트 때에 비하면 좀 쉬워진 것 같지 않아?”
“아무래도 그때 사냥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을 했겠지.”
“그래도 사냥 난이도에 비해 스탯은 잘 오르는 편이네. 좋은데?”
모르는 소리.
사실 마법사는 꿀을 퍼먹느라 바빴고 딜은 거의 내가 전담하는 수준이었다.
혼자 손쉽게 해골병을 슥슥 요리했으니 이들이 난이도가 내려갔다고 느끼는 건 당연했다.
그 사실을 언뜻 느낀 건 트릭이 유일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A등급끼리 설마 그 정도 차이가 나랴 싶었을 거다.
한 삼십 분쯤 던전 루팅을 하자 맵 정보가 착실하게 쌓였다.
“이거 받으세요.”
그간 해골병이 쏟아낸 초보자용 아이템은 고스란히 파티의 전력을 높이는데 사용됐다.
활은 얻지 못했지만 내게도 돌멩이보다 나은 투척 무기 서너 개가 들어왔다.
“음. 아직 미확인한 구간은 서쪽뿐인데 아마 보스방이 있을 겁니다.”
“클베때는 좋은 지팡이를 줬었는데 이번엔 어떨는지.”
힐러는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초반 던전이라고 해도 보스 몬스터가 주는 장비는 제법 쏠쏠할 테지.
흥얼거리며 미확인 구역을 향해 앞장서던 제이크가 콧노래를 멈추고 우뚝 섰다.
덕분에 쿵 하고 등에 부딪힌 마법사가 짜증을 냈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저기 누가 있는데?”
옆으로 몸을 내밀어 슬쩍 보니 보스방 앞에서 먼지를 털며 나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설마 혼자서 보스를 잡은 건가?”
“청색인데? 적성 S여도 힘들 걸.”
파티의 수군거림을 무시하고 다가오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적잖이 놀랐다.
‘사이클론?’
금발을 슬쩍 넘기며 푸른 눈을 반짝이는 청년.
가이아 프로게이머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이름, 내년에 열릴 1회 월드 챔피언십에서 북미팀 클러치 게이밍을 우승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실력파 게이머였다.
그 뿐인가. 그는 향후 몇 년간 북미 최정상 딜러로 군림하게 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게임 시작 한 시간 만에 보스를 혼자 요리했다.
서버가 한국에 있었다면 나 역시 보스를 무리 없이 혼자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7년의 프로 경력을 고스란히 갖춘 상태고 사이클론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남들처럼 한 달 정도 CBT를 즐겼을 뿐이다.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세계를 헤아려 봐도 가장 앞줄에 설 천부적 재능이다.
‘앞서나가는군.’
그는 우리 넷이 나눠 먹은 스탯 숙련도를 몰아서 받은 데다 보스를 혼자 처리했으니 현재 서버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지녔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탐색하는 파티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왔던 길로 성큼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려고 했다.
“저기요.”
내가 그를 불러 붙잡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죠?”
“괜찮으면 저희 일행 사냥 후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사이클론에게 다가간 나는 조용히 말을 건넸다.
“따로 말입니까?”
“저도 청색 계승자입니다. 실력을 보니 보통이 아니신듯 한데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제가 파티보단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사이클론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방어도가 낮은 청색 둘이 듀오를 결성해 필드 플레이를 펼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드랍 아이템도 겹칠 테니 말이다.
그가 완곡하게 거절하려는 찰나 나는 스탯창을 일부 내비쳤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 말한 나는 작은 업적란을 슬쩍 공개해 보였다.
[청색 계승자 적성시험 결과 - SS]
“친하게 지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다행히 나의 수가 먹혀들었다.
무표정하던 북미 최고의 암살자가 내게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