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206)
AOA는 이제 끝이다!
이고르는 차은성의 말에 놀람, 당혹, 불안 등 몇몇 감정을 내색했다.
차은성이 덤덤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고르.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루비앙카입니다.”
이고르의 눈가가 밋밋하게 실룩거려졌다.
죽어 시체가 되어서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 시설 루비앙카!
이고르가 차은성에게 말했다.
“봐하니 정보를 원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날 꺼내 주면 자네가 알고자 하는 모든 정보를 다 알려 주겠네.”
이고르가 거래를 제안했다.
차은성은 무표정했다.
얼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감정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인 양 매우 냉랭했다.
“이고르.”
차은성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거래를 제안할 입장이 아닙니다.”
이고르가 움찔했다.
차은성은 인정사정없이 이고르를 압박했다.
“지금 있는 곳이 루비앙카라는 것을 잊은 모양인데.”
“…….”
“그리고 내겐 이고르 당신을 루비앙카에서 꺼내 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건 세르게이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
“말하고 싶지 않다면!”
차은성은 천천히 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 당신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이고르.”
이고르는 차은성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에서 갈등의 빛이 넘실거렸다.
이제 차은성이 가면 그 누구도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아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루비앙카는 몇몇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면회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곳이다.
겨우 4평 정도의 아무것도 없는 방 아닌 방에서 죽을 때까지 지내야 한다.
운동 시간 따윈 보장해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철문의 창살을 통해 공기가 유입되지 않는다면.
불과 몇 분 안으로 질식사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루비앙카다.
이고르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의 결정은 생각 외로 매우 빨랐다.
“잠깐!”
이고르가 외쳤다.
문으로 걸어가던 차은성이 걸음을 멈추고 이고르를 뒤돌아보았다.
거래 성립!
차은성은 이고르를 보며 내심 회심의 눈빛을 띠었다.
궁지에 몰린 이고르다.
루비앙카가 어떤 곳인지 그도 알고 있으니, 심적으로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자신의 석방을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할 정도로, 이고르는 현재 궁지에 몰려 있다.
차은성은 그 점을 이용하여 이고르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건네받았다.
* * *
며칠 후, 인천국제공항.
차은성은 자신의 차례가 되어 입국 심사대로 걸어가 섰다.
출입국 사무소 직원이 여권을 요구했다.
차은성은 직원에게 여권을 건넸다.
그러자 직원이 여권을 보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본?”
“예스.”
차은성의 대답에 직원이 여권을 이리저리 살폈다.
위조 여부를 체크하더니 직원이 차은성에게 질문했다.
차은성은 유창한 일어로 성실히 답했다.
별문제가 없는지.
직원이 여권을 돌려주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십시오.”
“아리가토.”
차은성이 짧게 대꾸하며 여권을 받아 챙겼다.
* * *
국외선 터미널로 차은성이 나왔을 때, 조영국이 천천히 다가와 섰다.
“묻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팀장.”
차은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조영국이 말하며 뒤돌아섰다.
차은성은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피더니 앞서 걸어가는 조영국을 천천히 뒤따라갔다.
* * *
서울 교외에 있는 공원묘지.
차은성은 국화 다발을 묘소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물끄러미 묘소를 바라보았다.
“박 선배, 가족이 없어서 내가 이곳으로 모셨어. 이곳에는 옛 부하들도 있으니깐 심심하시진 않을 거야.”
조영국은 인근에 노태준, 황민준, 김아름, 우형광의 묘소가 있음을 돌려 언급했다.
차은성은 조영국을 돌아보았다.
“노고 많으셨습니다. 선배.”
“뭐, 노고까지야.”
조영국이 말하며 차은성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찾아야죠.”
“찾아?”
조영국의 반문에, 차은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운전하는 조영국과 상당히 많은 얘기를 나눴다.
차은성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가 박 과장님 묘소를 찾았다는 것이 곧 그자의 귀에 들어갈 겁니다. 그럼 그자는 필히 절 죽여 없애려고 할 겁니다.”
“흠.”
조영국은 침음했다.
차은성은 뒤돌아서며 상의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더니 곧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박 선배가 골초였다는 건 알지?”
조영국의 말에.
후우우우.
차은성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이 피우지 마.”
차은성은 말없이 조영국을 돌아보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조영국은 옆으로 돌아서더니, 천천히 걸어갔다.
“조만간…….”
차은성이 가만히 걸어가는 조영국을 바라보았다.
“살펴 가십시오. 선배.”
차은성의 말에, 걸어가는 조영국이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더니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완만한 속도로 차츰 조영국이 차은성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차은성은 조영국을 계속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 * *
이틀 후.
삐삐삐…… 삐이이! ……철컥.
NIS 감찰실 계장 정가연은 도어 록을 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 피곤해.”
정가연은 피로에 찌든 몸을 이끌고 신발을 벗으며 화장실을 바라보았다. 빨리 몸을 씻고 푹 자고 싶다.
다른 이들이 출근하는 아침 시간대인데. 이틀 만에 퇴근했다.
그리고 다시 저녁 늦게 출근해야 한다. 그 때문에 잠을 푹 잘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싶었다.
정가연이 신발을 벗고 몇 걸음을 떼었을까?
돌연 그녀가 흠칫하더니 경계의 눈빛을 희번덕였다.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라면 냄새?
누군가 아파트 안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자신이 없는데 아파트에 누군가가 있다?
침입자!
정가연은 곧바로 자신의 아파트에 누군가가 침입하였음을 알아챘다.
‘어떻게?’
도어 록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모친, 둘밖에 없는데. 누군가가 아파트 안에 들어와 있다?
기가 막히게도.
자신의 집인 양, 그녀의 아파트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어처구니없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
정가연은 화내며 아파트 내부를 신중하게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직장이 NIS라 정가연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슬쩍.
부엌을 돌아봤다.
―싱크대 가득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
그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라면 봉지와 수프 비닐.
정가연은 기가 막혔다.
‘언놈이!’
그녀의 아파트에 침입.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을까?
정가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에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정가연은 천천히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거실.
리모컨, 쿠션, 배달 음식 책자, 먹다 남은 과자 봉지들, 과자를 먹으며 바닥에 흘린 부스러기 등등.
쓰레기들이 거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허얼…….’
정가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당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때.
철컥.
방문이 열리며 팬티만 입은 차은성이 걸어 나왔다.
“하아암.”
차은성은 하품을 하며 양손을 머리 높이 들며 쭈우욱 폈다.
잠에서 덜 깼는지.
차은성은 거의 눈을 반개한 채 화장실로 돌아섰다.
한편.
정가연은 차은성을 바라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황당함을 느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
자신이 지금 무슨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의심을 해 본다.
정가연은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차은성을 가리켰다.
바들바들.
분노로 그녀의 팔이 눈에 띄게 떨렸다.
“너, 너어…….”
차은성은 그런 정가연을 없는 사람 취급하듯이 화장실에 이르더니 거리낌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팬티를 쑤욱 내리더니.
쏴아아아.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 두었기에.
그 모습이 정가연의 두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쳤다.
순간.
“꺄아아아악!”
당장이라도 기절초풍할 것처럼.
정가연이 아파트가 떠나가라 커다란 비명을 마구 질렀다.
NIS 감찰실 계장이다.
여느 여자들과 비교하면 남다른 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가연이 여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성인 남자의 거시기를 본의 아니게 보게 된 정가연.
그녀는 혼비백산하는 표정을 짓더니.
“야아아! 차……은……성……!”
아파트가 무너져라 엄청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바람에 잠이 다소 깬 차은성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히죽.
웃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왔어?”
퇴근한 아내에게 말하는 듯한 차은성.
정가연은 매우 급하게 입은 치마를 걷어 올렸다. 창졸간에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가 드러났다.
가느다란 띠가 허벅지에 채워져 있고, 띠에는 소형 자동 권총이 착 붙어 있었다.
정가연은 민첩한 동작으로 자동 권총을 빼 들더니 일말의 주저도 없이 즉각 차은성을 겨눴다.
“죽어어어어!”
정가연이 목이 터져라 길게 외쳤다.
“…….”
차은성은 태연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듯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 상황을 즐기는 듯 은근 여유가 넘쳤다.
“지금 날 사살하려는 거야?”
차은성의 물음에.
“그래!”
정가연이 아주 매몰차게 소리치며 권총 그립을 쥔 양 손아귀에 힘주었다.
“죽여 줄게.”
차은성이 가만히 정가연을 불렀다.
“가연아.”
“날 부르지 마! 이 개자식아!”
“날 쏘면, 너……!”
차은성이 무엇인가를 말했다.
아무래도 정가연의 약점 중 아주 큰 약점이 아닐까 싶다.
대번에 정가연이 경악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어머님께 사진 다 보내 버린다!”
차은성이 협박했다.
권총을 쥔 정가연이 양손과 몸을 동시에 부들부들 떨었다.
살려?
죽여?
정가연은 내심 엄청 심각하게 고민했다.
차은성은 천천히 팬티를 올리고 세면대로 돌아서더니 물을 틀었다.
쏴아아아.
차은성은 양손을 꼼꼼하게 씻으며 거울에 비친 정가연을 바라보았다.
“나. 배고파.”
“지, 지금 나, 나더러…… 서, 설마…… 밥을 차리라고?”
정가연은 분노에 이어 황당함에 젖었다.
차은성은 거침이 없었다.
“빨리 차려. 배 엄청 고파.”
“너, 너어…….”
“가연아. 사진을 생각해. 응?”
차은성이 거울에 비친 정가연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빙긋.
아주 밝게, 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