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77)
교란 그리고 기만
중고 포드 RV가 서서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곧 도로로 들어서며 빠르게 주행하기 시작했다.
중고 포드 RV가 주행하는 도로는 그리 오래지 않아 교차점에 이르렀다.
남쪽으로는 뉴올리언스, 동남쪽으로는 애틀랜타, 동쪽으로는 웨스트버지니아, 동북쪽으로는 피츠버그, 북쪽으로는 시카고로 도로가 나뉜다.
그 점을 감안하여 접선과 함께 차량을 교체했다.
LA 경찰은 캘리포니아 주 경계선을 넘어 추적해 오지 못한다.
하지만 연방 수사기관인 FBI는 주 경계선에 구애받지 않는다.
차은성은 만약 FBI가 자신을 추적해 올 경우.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수 없도록.
시간과 거리를 벌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선과 차량 교체를 시도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JK. 시먼스가 옮긴 새 은신처가 의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곳 가까이에 있었다.
마치 행운의 여신 티케와 운명의 세 여신이 자신을 가호하기라도 하듯.
* * *
그리 오래지 않아.
중고 포드 RV가 인터체인지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멀어지더니 주행하는 타 차량들 사이로 사라졌다.
* * *
며칠 후.
야외 테라스의 원탁에 앉아 식사 중인 장년인 벤턴 체니.
나이프로 자른 써니사이드업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앉은 벤턴의 왼쪽.
두 걸음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깔끔한 슈트 차림의 리어닉.
“……지금 CIA와 FBI가 추적 중입니다. 그리고 JK. 시먼스와 호위하던 잭 커비와 용병들이 모두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
“……LA에 있던 조직의 몇몇 멤버가 그자에게 당했습니다.”
리어닉의 말에.
뚝.
나이프와 포크를 쥔 벤턴의 양손이 멈췄다.
입맛을 버린 듯.
벤텐이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고 내려놓았다.
“차은성이라는 한국 NIS 전직 요원의 짓이냐? 리어닉.”
벤턴의 물음에 리어닉이 공손히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달리 다른 이가 없습니다. 킹!”
“…….”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그리고 LA에서 돈 파블리코와 하트 사이를 잇는 얀톤을 저격한 것으로 보아 저희 조직에 관해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습니다.”
“조직에 관해 아는 것 같다고?”
벤턴의 반문에서 흐릿한 불쾌감이 묻어났다.
“조직의 보안이 그렇게 허술한가? 리어닉.”
“그렇지 않습니다. 조직의 보안은 CIA의 보안을 몇 배나 상회합니다. 킹!”
“그런데 어떻게 그 차은성이라는 자가 조직에 관해 알고 있는 거지?”
벤턴이 물으며 오른쪽으로 손을 뻗었다.
* * *
잠깐이란 시간이 지나고 벤턴이 시가를 피우며 물끄러미 정면을 바라보았다.
리어닉이 벤턴을 바라보며 신중하게 말했다.
“LA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기 전에 모스크바와 텔아비브를 경유했습니다.”
“…….”
“모스크바에서는 이고르를 전담한 세르게이라는 FSB 고위 간부와 만났고. 텔아비브에서는 아만의 알 하르비를 만났습니다.”
벤턴이 입에서 시가를 떼며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우우.
이어.
천천히 말했다.
“그렇게 된 거군.”
“네.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이고르와 이스라엘 쪽에서 저희 정보를 차은성에게 흘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쯧쯧.”
벤턴이 혀를 차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한때 전 세계에 퍼져 활동하던 KGB의 소속 정보 요원이 아마 70여만 명이었지?”
“네. 비공식 요원을 합치면 얼추 1백만 명이 넘습니다.”
“게다가 이고르가 아무래도 입을 잘못 놀린 것 같고.”
“관련 조치를 취했으니 이고르는 며칠 안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킹!”
“그건 좋은데. 문제는 텔아비브야. 그쪽은 프리메이슨의 영역이잖아. 안 그래?”
“프리메이슨과 부딪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킹.”
벤턴이 시가를 입에 물었다.
“리어닉.”
“네.”
“이런 생각 안 해 봤나?”
“어떤…….”
“우리가 프리메이슨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프리메이슨도 우리를 껄끄럽게 여기지.”
“…….”
“서로 대놓고 손을 쓰기는 어려워. 하지만 프리메이슨이 차은성을 통해 우리에게 모종의 손을 쓰려고 한다면?”
시가를 피우는 벤턴의 말에 리어닉이 흠칫했다.
“그 말씀은?”
“동양에서 그런 경우를 차도살인이라고 한다지, 아마.”
“…….”
“다른 사람을 이용해 적의 목을 친다? 꽤 참신하고 재밌는 발상이야.”
“킹! 그렇다고 해도 저희가 프리메이슨을 지금 치는 것은 곤란합니다.”
벤턴이 다시 시가를 떼며 연기를 뿜었다.
“알아. 프리메이슨은 참 귀찮고 짜증 나는 존재지.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우리 쪽이 난처해질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리어닉이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INR에 휴고 건스백이라고 아주 유능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있는데 말이야.”
벤턴의 말에 리어닉이 움찔했다.
―INR.
국무부 정보조사국을 의미한다.
각 정보기관이 수집한 모든 정보를 분석, 정제하는 데 있어 가히 발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관이다.
리어닉은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휴고 건스백에게 지시하겠습니다. 킹.”
“최대한 서두르라고 해. 뒤에 프리메이슨이 있으니. 길게 끌어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예.”
리어닉이 머리를 바로 하는 사이, 벤턴이 시가를 입에 물었다.
“입맛만 버렸어. 쯧!”
언짢은 어조로 중얼거리며 불쾌하다는 눈빛을 띠었다.
그사이.
리어닉이 뒤돌아서더니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나직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벤턴은 앉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입에서 시가를 떼더니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우.
* * *
이틀 후.
시카고 외곽의 모 주유소 남자 화장실.
쏴아아아.
차은성은 세면대에 서서 손을 씻으며 전면 거울을 보았다.
그렇게 차은성이 시간을 끄는 동안 화장실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화장실에 혼자 있게 되자 차은성은 급히 칸막이 맨 끝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로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비닐로 겹겹이 밀봉된 것을 꺼냈다.
그런 다음.
안에 있는 것을 꺼내고, 가지고 있던 포드 중고 RV의 차 키와 소지한 글록 및 탄창을 비닐에 넣었다. 그리고 비닐을 둘둘만 후 다시 변기 안에 집어넣었다.
차은성은 티 나지 않게 변기 뚜껑을 닫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변기 안에 넣은 것은 화교 조직이 수거해 갈 것이다.
차은성은 돌아서며 칸막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게 나왔다.
다시금 화장실 내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주의 깊게 살핀 다음.
차은성은 화장실 입구로 걸어갔다.
* * *
사흘 후.
3인용 소파에 앉은 중년인. INR Section Chief 휴고 건스백.
손에 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은 국무부 정보조사국장 필립 러커를 바라보았다.
“그래. 생각 좀 해 봤나?”
필립 국장의 말에 휴고 과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접니까?”
궁금하다!
휴고 과장의 물음에 필립 국장이 빙긋 웃었다.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 알지?”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이라면 테네시주 출신 3선 상원 의원을 말하는 겁니까? 국장님.”
“맞아.”
필립 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있는 찻잔을 쥐었다.
“상원 정보위원회 소속으로…… 오카시스 코르테즈 현 위원장의 뒤를 이어 차기 정보위원장으로 가장 유력시되는 사람이지.”
“그런데요?”
휴고 과장이 물었다.
필립 국장이 차를 마시며 휴고 과장을 보았다.
“사람하고는…….”
“국장님!”
휴고 과장이 힘주어 필립 국장을 불렀다.
“모르겠나?”
“뭘 말입니까?”
“이 사람, 정보 분석에는 그리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이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필립 국장의 음성이 높아지자 휴고 과장이 흠칫했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
휴고 과장이 놀란 눈으로 필립 국장을 바라보았다.
“설마?”
“맞아! 웨더마이어 의원이 휴고 자네를 지명했어.”
“예에에?”
휴고 과장이 매우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영문을 모르겠다!
휴고 과장이 온몸으로 그런 감정을 내보였다.
“흠.”
필립 국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외라는 눈빛을 띠었다.
그는 휴고 과장이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
내심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휴고 과장의 놀란 모습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그 때문에 필립 국장은 내심 무척 의아해했다. 시치미를 뚝 떼고 필립 국장이 휴고 과장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국장님. 그럼, 안 놀랍니까? 일면식도 없는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이 절 지목했다는데 말입니다.”
“흠.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 말로는 자네가 정보 분석에 있어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하던데…….”
“아니.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이 저를 알고 있다는 것이…….”
휴고 과장의 의문스러운 말에 필립 국장이 짧은 침음을 흘렸다.
“흠.”
“…….”
“전화 통화로 웨더마이어 의원이 말하기로는…… 몇몇 국무부 고위 관계자들이 휴고 자네를 매우 칭찬했었다고…… 그 말을 흘려듣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면서…….”
“예에?”
휴고 과장은 반문하며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INR.
통상 국무부 정보조사국이라 불리는 휴고 과장이 속한 부서는 각 정보기관이 보내오는 정보를 모아 분석, 정제하여 국무부의 대외 정책 결정에 반영한다.
그 과정에서 몇몇 국무부 관계자가 자신에 관해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에게 말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차기 상원 정보위원장으로 유력한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이 자신을 기억하고, 알고 있다는 것에 휴고 과장은 매우 의아했다.
상원 의원이 일개 정보분석관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
“아무튼!”
필립 국장이 힘주어 말하며 휴고 과장을 보았다.
“…….”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의 추천도 있고 하니 이번 일은 휴고 자네가 맡도록 하게.”
“국장님. 억지로 제게 떠넘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휴고가 살짝 미소 지으며 반쯤 농담조로 말했다.
“휴고!”
필립 국장이 재차 힘주어 휴고 과장을 불렀다.
휴고 과장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장님. FBI도 있고 CIA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게 일임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정보분석관이지 방첩 분야 관계자도 전문가도 아닙니다.”
“이번 일에 자네를 지목한 웨더마이어 의원은 자네의 정보 분석 능력을 높이 샀어.”
“…….”
“그리고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휴고 자네의 앞날은 엄청 밝을 텐데 왜 안 하겠다는 거야?”
필립 국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속내를 내보였다.
이번 일만 잘 해낸다면.
웨더마이어 상원 의원이 앞으로 휴고 과장의 뒤를 봐 줄 것이다.
하면.
휴고 과장의 앞날은 창창해질 것이다. 레드 카펫이 쫘악 깔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