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69)
수여 분 후.
바몬드 부장이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가만히 하이럼을 바라보았다.
유능한 부하 직원이다.
상사로서 기분이 좋다.
부하 직원이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상사는 편하고 공을 세울 기회가 그만큼 많아지니까.
한 가지.
막 퇴근하려던 자신을 의자에 주저앉히고 퇴근을 한참 뒤로 미루게 만든 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바몬드 부장이 물었다.
“확실한 거야?”
내심 반신반의했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 책임을 지는 것 자체가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만.
어떤 책임이냐, 라는 것이.
어떤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느냐, 라는 것이 문제다.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은 싫으니깐 말이다.
바몬드 부장의 물음에 하이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제가 회사 서버에 접속.”
“…….”
“우리가 확보한 차은성에 관한 모든 정보와 대조해 보았습니다.”
“…….”
“체형, 망막, 팔다리의 길이. 심지어는 손가락 길이까지.”
“…….”
“그런데 일치율이 무려 99.3%였습니다. 부장님.”
충만한 자신감에 찬 눈으로 바몬드 부장을 바라보는 하이럼.
요즘 워낙 위장술이 발달하여 단순히 얼굴만 보고 판단하면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그 때문에 사람 자체를 보고 판단한다.
키, 팔다리 길이, 손가락 길이 등.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키, 팔다리 길이, 손가락 길이 등이 모두 똑같은 이는 이 세상에 없다.
쌍둥이도 키, 팔다리 길이, 손가락 길이가 다 다르다.
그와 같은 기준을 적용하여 AI 시스템과 슈퍼컴퓨터를 이용, 판별에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인다.
하이럼은 CIA가 운용하는 슈퍼컴을 통해 확인하였음을 은연중에 돌려 말했다.
“더욱이 AI 시스템의 경보가 있었습니다.”
하이럼은 CIA가 운용 중인 AI 시스템을 입에 올렸다.
AI 시스템에 의해 차은성이 잡혔고.
예의 판별 기준을 거친 AI 시스템이 요주의 인물 리스트상에 있는 자가 미국으로 입국하였음을 자동 경보했다.
하이럼의 말에 바몬드 부장이 나직이 침음을 흘렸다.
“음…….”
요주의 인물을 AI가 감지, 경보했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AI 시스템과 슈퍼컴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깐. 그리고 사람보다 매우 효율적이다. 경탄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더해 하이럼이 확인까지 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맞다는 얘긴데.’
바몬드 부장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의문의 눈빛을 띠었다.
‘왜 입국했지? 그에게는 사지나 마찬가지일 텐데.’
바몬드 부장은 이해되지 않았다.
CIA에서 요주의 대상자 리스트에 올린 차은성이다. 그런데 베트남 위조 여권으로 LA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틀림없이 목적이 있어!’
바몬드 부장이 서둘러 손을 책상 오른쪽으로 뻗었다.
꾹.
삐이이.
이내 인터콤에서 비서의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네에.”
“지급으로 국장실에 연락해 줘. A 랭커 사안으로 내가 지금 가니까, 국장님 퇴근을 잠시 늦춰 달라고…….”
“네, 부장님.”
비서의 대답에 바몬드 부장이 이내 인터콤에서 손을 떼며 하이럼을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바몬드 부장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칭찬이다.
하이럼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한 건 했다!
은근 스스로가 자랑스러운지 만면에 기쁨을 드러냈다.
바몬드 부장이 하이럼에게 말했다.
“그자가 위조 여권으로 입국했다면 분명 뭔가 노리는 것이 있을 거야.”
“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해서 지금 저희 팀이 그자가 입국한 후로 LA, 샌프란시스코 등 서부 지역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를 분석 및 조사 중입니다.”
하이럼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몬드 부장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내게 보고해 주게.”
“예, 부장님.”
하이럼의 대답에 바몬드 부장이 천천히 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며 옷걸이에 걸려 있는 상의로 손을 뻗었다.
국장실에 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는 바몬드 부장이었다.
하이럼은 바몬드 부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래. 수고하게.”
바몬드 부장이 상의를 입으며 책상에 있는 파일을 챙겨 들었다.
그보다 앞서 하이럼이 사무실을 나갔다. 뒤이어 바몬드 부장이 바삐 사무실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 * *
차은성이 위조 여권으로 입국한 것을 CIA의 AI 시스템이 감지했다.
하루 24시간 미국을 출입국 하는 이들은 최소 천 명 단위가 넘는다. 관련 데이터의 방대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그것을 사람이 처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미국의 출입국 시스템은 인공지능에 의해 돌아간다. 해당 인공지능은 CIA의 인공지능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출입국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를 CIA의 인공지능 시스템이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검색 및 체크한다.
그리고 저장되어 있는 각종 데이터와 비교 분석. 차은성처럼 요주의 대상자 리스트에 올라온 이들이 출입국 하면 그 즉시 자동으로 경보를 발령한다.
그럼.
하이럼 팀이 즉각 재분석 및 확인에 들어가고. 확신이 들 경우 방첩부장인 바몬드에게 보고한다.
CIA의 체계 중 하나가 정상 작동하며 차은성의 미국 내 입국을 CIA가 감지했다.
달리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이 아니다. 그에 걸맞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그리 불리는 것이다.
예산, 인력, 장비 등등에 있어 세계 최고 레벨인 미국 중앙정보부다.
* * *
LA를 떠난 차은성은 덴버, 캔자스시티를 지나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계절이 어느덧 초가을로 접어들어 선선했다.
한적한 도로변에 자리한 휴게소.
낡은 주유기 두 개가 덩그러니 한쪽에 있고 트럭을 개조한 듯한 허름한 식당을 겸한 작은 가게가 정면에 위치해 있다.
차은성은 캠핑카를 한쪽에 주차하고 천천히 식당으로 걸어갔다.
곧 캠핑카를 버려야 한다. 그 전에 가공식품이 아닌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었다.
미국에 입국한 이후, 매 끼니가 가공식품이라 이젠 질렸다.
* * *
차은성이 일자의 테이블에 앉자, 주방에서 앞치마를 한 백인과 인디언 혼혈로 보이는 중년인이 메뉴판을 챙겨 들고 다가왔다. 그러곤 차은성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금 주문? 나중에 주문?”
“잠시 메뉴판을 좀 보고…….”
“그럼.”
앞치마를 한 이가 돌아서더니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의 퉁명스러움에 차은성이 픽 웃었다.
“나도 모르게…….”
한국에서의 서비스와 같은 것을 자신도 모르게 기대했다. 지금 있는 곳이 미국임을 잠시 깜빡하고 말았다.
한국과 미국의 대중 서비스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보통 한국보다 미국의 대중 서비스가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반대다.
한국의 대중 서비스가 프로야구 리그라고 가정하면, 미국 대중 서비스는 리틀 야구 수준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세계 화폐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달러, 상대할 나라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국토와 인구 등등.
몇몇 조건을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다.
한국 대중 서비스에 적응된 차은성은 조금 전 앞치마를 한 중년인의 퉁명스러움에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이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미국이고. 그중에서도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으로 치면 어디 두메산골 같은 곳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한국과 같은 대중 서비스는 기대하기 어렵다.
* * *
잠시 뒤.
앞치마를 한 중년인이 차은성 앞에 음식이 든 접시와 콜라를 내려놓았다.
“탱큐.”
차은성은 돌아서며 주방으로 걸어가는 중년인에게 말했다. 중년인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차은성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묵묵히 주방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차은성은 그런 중년인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쯧!”
혀를 찼다.
제대로 된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긴 하지만, 지금 보는 접시의 음식은 하나같이 칼로리가 너무 높다. 그 때문에 실망감에 혀를 찼다.
미국의 식문화는 형편없기로는 영국 못지않다.
‘누구 말마따나 영미권에서 맛있는 음식을 바라는 것은 사막에서 비가 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더니.’
차은성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주문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리 주문할 다른 저칼로리 메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도비만!
미국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고칼로리 식단이 미국의 일반식이다.
차은성은 접시에 담겨 있는 음식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팬케이크, 써니사이드업, 베이컨, 소시지, 구운 감자. 그리고 한쪽에 있는 1회용 포장의 버터 몇 개.
차은성은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콜라.
살찌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피식.
차은성이 실소하며 손을 뻗었다.
“어차피 조만간 칼로리를 대량 소모해야 하니깐.”
중얼거리며 콜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내 뚜껑을 따고 테이블 한쪽 옆에 있는 종이컵을 꺼냈다.
콸콸.
차은성은 콜라를 종이컵에 가득 부었다.
그런 다음.
테이블 한편에 있는 소스들 중 시럽을 집어 들었다.
줄줄.
차은성은 팬케이크를 덮을 듯 시럽을 그득 부었다.
그리고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식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으로 간간이 종이컵의 콜라를 마셨다.
* * *
몇 분 후.
끼익.
문을 여는 소리와 딸랑거리는 벨 소리가 들리더니 한 동양인 여자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식사를 하는 차은성을 보곤 눈을 반짝이더니.
성큼성큼.
차은성의 왼쪽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주방에서 앞치마를 한 중년인이 나왔다.
동양인 여자는 중년인이 다가와 주문을 받으려 하자 곧바로 햄버거, 감자튀김, 펩시를 주문했다.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돌아서더니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사이.
동양인 여자가 차은성을 힐긋 보더니.
“어디서 오셨어요?”
영어로 물었다.
차은성은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컬럼비아.”
“혹시 중국분이세요?”
“내게 관심이 있습니까?”
차은성의 말에 동양인 여성이 입을 다물며 멀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
테이블 아래에서 차은성과 동양인 여성이 서로 차 키를 교환했다.
여자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며 건네받은 차 키를 재빨리 챙겼다.
그리고 차은성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타고 온 차량의 차종과 번호판의 차량 번호를 말했다.
주의 깊게 들은 차은성은 곧 자신이 타고 온 캠핑카의 차량 번호를 말했다.
짤막한 차은성과 동양인 여성의 대화는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접선은 별다른 일 없이 무난하게 이어졌다.
* * *
얼마 후.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동양인 여자와 차은성이 식사를 거의 반 정도 했을 때.
끼익…… 딸랑.
문이 열리며 레슬링 선수처럼 건장한 체격을 가진, 머리에 카우보이모자를 쓴 백인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