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68)
가슴에 총상을 입은 돈 파블리코는 몸을 휘청거리더니 힘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내.
그에게서 진한 선홍빛 선혈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피는 느릿느릿 주변 바닥으로 번져 갔다.
차은성은 천천히 일어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씨익.
방탄조끼 덕을 톡톡히 보았다.
* * *
잠시 뒤.
차은성은 상의에서 철제 케이스를 꺼냈다. 얼핏 보면 담배 케이스처럼 얄팍했다.
차은성은 케이스에서 작은 1회용 주사기를 꺼내며 신음하는 돈 파블리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최근에 나온 신종 합성 화합물 LSD를 기반으로 제조된 환각성 자백제를 차은성은 돈 파블리코의 목 정맥에 투약했다.
그런 다음.
약효가 전신으로 돌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돈 파블리코는 눈의 초점을 잃고 환각 상태에서 차은성의 질문에 술술 대답하기 시작했다.
환각성 합성 화합물로 말미암아 돈 파블리코는 사실상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에서 환각에 시달렸다.
“안드레아…… 한국…… 6.25…….”
차은성은 돈 파블리코에게서 정보를 빼내며 의외의 사실에 당혹감을 느꼈다.
일찍 부모를 잃은 돈 파블리코는 외조부 안드레아 슬하에서 자랐다.
6.25 참전 군인인 안드레아는 돈 파블리코가 청소년이 되면서 반항기를 드러내자 6.25 전쟁과 한국에 관해 귀가 따갑도록 말했던 모양이다.
당시 한국 청소년들이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말해 주어 파블리코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다.
하지만 안드레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돈 파블리코는 지겨워하며 계속 듣다 보니 서서히 반발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의 반항심과 더불어 6.25와 한국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런 한편으로 자신을 키워 준 외조부 안드레아를 사랑했던 모양이다.
사랑과 반발심.
모순적인 감정에 돈 파블리코가 꽤 오랫동안 심적으로 시달렸던 모양이다.
이윽고.
차은성은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은 후 책상의 의자를 가져와 힘겹게 돈 파블리코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천천히 사무실 왼쪽 끝으로 의자를 밀었다.
“돈 파블리코.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유리 벽 앞에 이른 차은성은 뒤에서 발로 돈 파블리코가 앉은 의자를 밀어 찼다.
퍼억.
동시에 말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인정사정없는 차은성이었다. 산토스에게 의뢰하여 미구엘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라고 시킨 돈 파블리코다.
그의 외조부가 6.25 참전 군인인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의자와 함께 허공으로 밀려 버린 돈 파블리코.
“으아아아아…….”
메아리처럼 긴 비명을 질렀다.
차은성은 뒤돌아섰다. 눈에 보이는 헬기를 향해 걸어가는데.
따르릉, 따르릉.
책상에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차은성은 책상을 힐금 돌아보았다가 시선을 바로 했다. 전화가 울리든 말든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
차은성은 그렇게 무언으로 말하듯 빠른 걸음으로 헬기로 다가갔다.
그러자 천장에서 떨어진 잔해 너머에서 몇몇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보스! 보스!”
“전화는?”
“안 받아!”
“빌어먹을!”
“보스! 보스!”
돈 파블리코의 부하들이 몰려온 모양이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려는 모양인데. 쉽지 않을 것이다.
차은성은 헬기에서 낙하산을 꺼냈다.
헬기는 전투기처럼 탈출 좌석 시스템이 없다. 그런 이유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대개 낙하산이 구비되어 있다.
차은성은 등에 낙하산을 메고 가슴의 버클을 채웠다.
철컥.
그리고 왼쪽 끝으로 걸어가자마자 주저 없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휘이익.
순간.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차은성은 팔다리를 위로 들며 상체를 폈다. 아래에서 부는 바람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 하였다. 그 때문에 바람을 맞는 몸의 면적을 넓히려 했다.
잠시 뒤.
차은성이 줄을 당기자마자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낙하산이 활짝 펴지며 낙하 속도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차은성은 양손으로 낙하산 줄을 쥐고 유유히 고층 빌딩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 * *
몇 시간 후.
유명 스타들의 손바닥 동판이 인도 바닥에 박혀 있는 할리우드 거리.
끼익.
한 대의 고급 승용차가 서고 뒷문이 열렸다.
똥배가 나온, 고도비만의 장년인 얀톤.
할리우드 단역배우 조합의 조합장이다. 그는 곧바로 단골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 * *
레스토랑 맞은편 건물 옥상.
차은성이 양각대를 난간에 걸치고 M24 저격 소총의 망원 조준경에 한쪽 눈을 바짝 댔다.
이내.
조준경의 십자 선에 테이블에 앉은 얀톤의 뒷모습이 잡혔다.
웨이터가 앉은 얀톤의 앞에 수프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얀톤이 웨이터에게 뭐라 말했다. 웨이터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얀톤의 말을 경청했다.
차은성은 앉은 얀톤의 뒤통수에 십자 선을 맞췄다.
“후우우.”
심호흡한 후 호흡을 멈추고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퉁.
반동이 느껴졌다.
* * *
막 수저를 들고 수프를 먹으려던 얀톤.
퍽!
그의 뒤통수에 박힌 총탄이 이마를 뚫고 튀어나왔다.
이어.
얀톤이 힘없이 머리를 수프 그릇에 처박았다.
와장창.
그 바람에 소리가 났고. 소리를 들은 이들이 얀톤을 돌아보았다.
“꺄아악!”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허억!”
“흑!”
웨이터와 앉아 있던 남자 손님들이 얀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도나도 얀톤의 모습에 헛바람을 크게 삼켰다.
* * *
비토리오 타워 63층.
미니 포클레인 두 대가 서둘러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는 헬기 동체 분해가 한창이었다.
LA 경찰기동대.
속칭 스와트라 불리는 중무장한 이들이 사무실 안팎에 서 있었다.
저벅저벅.
사무실로 들어서는 쉰 후반의 신임 FBI 서부 지역 최고 책임자 던컨 허슬러.
전임 최고 책임자였던 하비에 스와레즈가 차은성 때문에 좌천당했다.
던컨은 하비에의 후임이었다.
마흔 초반 어름의 중년인 남미계 미국인 로베르토가 던컨을 뒤따랐다.
“전쟁이 났군, 났어.”
던컨의 말에 뒤따르는 로베르토가 말했다.
“지금 서부 지역 모든 마피아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왜?”
던컨이 걸으며 물었다.
그는 로베르토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앞을 바라보며 규칙적으로 걸음을 떼었다.
“빅 보스가 죽었잖습니까, 지부장님. 당연히 전 마피아가 동요할 수밖에 없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 미 서부 전역의 마피아는 누가 돈 파블리코를 죽였는지를 놓고…… 자칫 잘못하면 서부 전역의 마피아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로베르토의 걱정 가득한 말에 던컨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아. 그나저나 내가 부임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쯧쯧.”
불쾌하다.
던컨이 혀를 차며 그런 속내를 내비쳤다.
“그나저나…….”
로베르토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피아들 수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마피아 애들이 헬기로 사무실을 들이받아 버릴 정도로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던컨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피아들 내부 분쟁은 아닌 것 같고. 대체 누가 돈 파블리코를 죽였을까? 무슨 이유로?”
던컨이 진한 의문을 내색하며 뒤따라 걸음을 멈추고 선 로베르토를 돌아보았다.
“뭐 건진 거 없어?”
“그게…… 워낙 잡힌 영상의 분량이 적어…… 카메라를 의식한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이렇다 할 단서가 없습니다.”
로베르토의 말에 던컨의 눈이 반짝였다.
“사전에 카메라를 포함하여 관련 보안 시스템에 관해 조사했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전문가 같습니다만.”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그렇지. 헬기로 사무실을 들이받는 짓을 하다니. 이건 마치 9.11 재현 같잖아.”
던컨의 말에 로베르토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헬기에 관해서 알아봤나?”
던컨이 묻자 로베르토가 대답했다.
“네. 델코이 항공사 소유로…… 서류상 기재되어 있는 이는 일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공의 신분이다?”
“네. 누군가가 위장 신분으로 델코이 항공에서 헬기를 단기 대여한 것 같습니다.”
“지불은?”
“인터넷으로 송금했습니다.”
“송금자는?”
“일본 야즈이 종합 상사인데. 그쪽 말로는 얼마 전에 해킹을 당해…….”
로베르토의 말에 던컨이 중얼거렸다.
“흥미진진하군. 해킹에다가 헬기로 들이받고. 응!”
비아냥거리는 던컨의 말에 로베르토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던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라도 건져야 수사 방향을 잡을 텐데. 이거 참…….”
우려의 중얼거림이었다.
“일단 본부에 현장 감식 팀을 비롯하여 일련의 지원을 요청해 두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긴 하겠지만. 단서는 아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해. 그리고 이번 일에 관한 정보들이 마피아 쪽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단속 철저하게 해. 자칫 서부 전역의 마피아들이 동시에 날뛰기 시작하면 통제 불가능하니깐 말이야.”
“네.”
로베르토의 대답을 들으며 던컨이 사무실 왼쪽 끝으로 걸어가 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던컨이 일순간 몸을 움찔하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까마득하다.
떨어지면 몸이 무슨 도자기 병처럼 산산이 부서질 것 같다.
* * *
몇 시간 후.
LA 외곽 국도를 한 대의 캠핑카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차은성은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지평선 끝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 보기에 상당히 좋았다. 폰으로 찍어 두어도 좋을 풍경이었다.
“흣.”
차은성은 실소했다.
오른쪽 귀에 낀 무선 이어폰을 통해 LA 경찰과 FBI의 무전통신을 주기적으로 듣고 있다.
경찰과 FBI의 통신망을 감청하며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자신과 연관된 통신이 오가지는 않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감청은 그리 오래 할 수 없을 것이다. LA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감청 감도가 떨어지니깐 말이다.
차은성은 캠핑카를 운전하며 아직 경찰이나 FBI가 자신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런 이유로 느긋하게 운전하며 일자로 쭉 뻗은 도로를 내달렸다.
* * *
벽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 퇴근 준비를 하는 CIA 방첩부장 바몬드 쇼어.
똑, 똑.
노크 소리에 흠칫하더니 사무실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네에.”
그의 말에 문이 열리며 한 흑인이 들어왔다.
“부장님.”
“하이럼. 무슨 일이야?”
“퇴근 준비 중이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급히 보고드려야 할 것이 있어…….”
“뭔지 말해 봐.”
바몬드 부장이 앉은 자세를 고치는 사이, 하이럼이 책상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책상에 파일을 내려놓으며 바몬드 부장에게 말했다.
“일단 보시죠.”
바몬드 부장이 파일과 하이럼을 번갈아 보았다.
의아하다!
막 퇴근할 참인데.
부하 직원인 하이럼이 들어와 파일을 건넸다.
느낌이 싸한 것이, 아무래도 퇴근이 매우 늦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바몬드 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