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57)
다섯 늑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모를 수 없다.
“음…….”
양승조가 침음하며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의부님.”
차은성이 양승조를 불렀다.
“지금은 다른 모든 것을 떠나…… 누가 의부님을 암살하려고 하는지, 그자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뭅니다.”
차은성이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승조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차은성이 자신을 아주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까닭이다.
“알았다. 나도 깊이 생각해 보마.”
양승조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함을 언급하자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입을 다물고 공손하게 인사한 후 양승조의 방을 나왔다.
* * *
회랑.
긴 일자의 통로를 걸어가던 차은성은 그리 오래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서야만 했다.
돌연 나타나 앞을 가로막으며 선 양령.
날카로운 눈초리로 차은성을 쏘아보았다.
전날의 일이 있어 차은성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공연히 양령이 꺼려지고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양령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누, 누나.”
부지불식간에.
차은성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슥.
양령이 차은성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물음에 차은성은 그만 두 눈을 질끈 내리감고 말았다. 할 말 없다.
‘하느님!’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어쩝니까?’
차은성이 내심 그렇게 말하는 사이.
양령이 양손으로 차은성의 목을 감으며 몸을 차은성의 가슴에 착 붙였다.
순간.
뭉클.
양령의 터질 것 같은 젖가슴이 차은성의 가슴에 닿았다.
일련의 감촉에 차은성이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가늘게 떨었다.
부르르.
차은성은 눈을 뜨지 않았다. 뜨면 눈앞에서 자신을 마주 보는 양령의 얼굴이 있을 것 같아 꺼렸다.
양령이 지금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느꼈지만 이렇다 할 제지를 하지 않았다.
지은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양령이 취하는 동작은 자신을 옭아매려는 일종의 올가미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양령은 자신의 얼굴을 차은성의 얼굴 가까이 붙였다.
“아버지에게 말할까?”
차은성이 급히 양령을 불렀다.
“누나…….”
“거두절미하고. 오늘 밤 내 방으로 와. 안 오면!”
양령이 말끝에 힘주었다.
―아버지에게 말한다!
차은성을 협박했다.
‘크으으.’
차은성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의부 양승조가 알았다가는 기정사실화시키며 결혼을 밀어붙일 것이다.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차은성은 마음속으로 고함쳤다.
양승조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그만 양령과 당우희에게 발목이 단단히 잡혀 버리고 말았다.
차은성이 생각하는 동안 양령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대답이 없어?”
“누나. 내가 잘못했어. 술 때문에…….”
양령이 차은성의 말을 중간에서 막아 버렸다.
“변명은 됐고. 안 오면, 아버지에게 가서 있는 그대로 다 말한다.”
“…….”
“명색이 사내대장부라면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지. 어디서 회피야, 회피가!”
양령이 화난 목소리로 말하더니.
“당분간 난 휴가거든.”
이내.
나긋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돌변.
그렇게 말해도 무방한 양령의 목소리 변화에 차은성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양령이 양손을 내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어.
오른손으로 서 있는 차은성의 가슴을 툭툭 쳤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어디서 술 핑계야!”
양령은 눈을 감은 차은성을 보며 득의의 눈빛을 띠었다.
“밤에 보자.”
말과 함께 뒤돌아섰다.
또각또각.
귀에 들리는 하이힐 소리에 차은성이 천천히 눈을 떴다.
걸어가는 양령의 뒷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걸을 때마다 보름달 같은 히프가 좌우로 미세하게 오갔다.
차은성은 우로 돌아서며 양손으로 벽을 짚었다.
“하느님!”
어쩌란 말입니까?
어떻게 할 수 없는 약점이 잡혀 버렸고. 대놓고 협박하며 들이대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도망칠 곳도 없고요.
차은성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양령이 회랑 끝에 이르며 우로 돌아섰다.
순간.
씨익.
양령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벽에 기대선 당우희.
벽에서 떨어지더니 양령에게 돌아서며 오른손을 들었다.
양령 역시 오른손을 들었다.
당우희와 양령이 곧 가까워지고.
짝.
양령과 당우희가 허공에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손뼉 치듯이.
양령이 손을 내리며 당우희에게 말했다.
“잘해 봐요, 언니.”
“네. 그리고 제가 양보한 거, 잊지 마세요. 아가씨.”
“기억해 둘게요.”
양령이 방긋 웃으며 당우희의 우측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당우희를 스쳐 지나갔다.
그사이.
당우희가 서둘러 걸어갔다.
회랑 끝에 이르러 좌로 돌아서자 걸어오는 차은성이 보였다.
차은성이 당우희를 보고는 움찔하더니 걸음을 멈추고 섰다.
난감한 얼굴.
차은성은 당황하고 있었다.
씨익.
당우희는 마음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차은성에게 천천히 걸어가 면전에 이르러 섰다.
“혀, 형수님.”
차은성이 더듬거리며 어쩔 줄을 몰랐다.
당우희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완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따 점심때쯤 제 사무실로 와 주세요.”
“네?”
차은성이 반문했다.
왜 자신의 사무실로 오라는 것일까? 이유를 몰라 차은성이 의아한 눈으로 당우희를 바라보았다.
당우희는 차은성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처리할 일이 있어요.”
“아, 네에.”
“그럼.”
당우희가 말하며 뒤돌아섰다.
두어 걸음 내딛던 당우희가 멈칫 서더니 차은성을 뒤돌아보았다.
“조금 일찍 오세요. 같이 점심 먹게.”
“아, 예에.”
차은성은 얼떨결에 대답하며 은근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왜?
의문이 든다.
당우희가 뭐 때문에 그녀의 사무실에서 보자는 걸까?
“휴우우.”
차은성은 한숨을 쉬며 걸어가는 당우희를 바라보았다.
꼼짝없이 약점이 잡혀 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 * *
한참 후.
차은성은 양승조의 정원을 거닐며 목하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미국 화교 조직의 도움과 협력을 얻어 내기 위해 양승조를 찾았다가, 그만 삼합회 내분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아버지 같은 양승조다. 이제까지 도움을 꽤 많이 받았다. 이미 몇 번의 암살을 운 좋게 넘긴 양승조다.
자신이 외면할 경우, 양승조가 암살당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양령이 말한 대로 그녀와 당우희의 삶이 크게 비틀려 버린다.
생면부지의 모르는 이도 아니고. 양령과 당우희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빨리 미국으로 가야 하는데.”
차은성은 내심 조바심을 느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빨리 시행에 옮겨야 하는데. 삼합회에 발목이 잡혀 미국으로 가는 것을 늦출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나저나 누굴까?”
차은성은 중얼거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양승조를 암살하려는 자!
틀림없이 사자방의 방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양승조의 사후. 사자방의 방주는 다섯 장로 중 한 사람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다섯 장로 중 한 사람이 의부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인데.”
차은성은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다섯 장로는 의부님이 가장 믿는 최측근들인데. 음…….”
차은성은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렸다.
―가장 믿는 이가 배신하는 법이고. 그 때문에 배신은 항상 당하는 이에게는 뼈아프다. 그 피해도 매우 크고.
답답하다.
“뭔가 단서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누구인지 알아낼 단서가 하나도 없으니. 휴우우.”
차은성은 한숨을 쉬었다.
천천히.
멈추지 않고 계속 걸으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의부님을 암살하려고 할 정도라면…… 자신과 관련된 일체의 증거나 단서를 남기지 않으려고 할 텐데.”
차은성은 암살하려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흠. 방법이 없으면 만들 수밖에.”
차은성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암살하려는 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자신을 드러내게끔 만들어야 한다.
차은성은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까?”
양승조를 암살. 사자방의 방주가 되려는 정체불명의 암중인.
그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게 만드는 수밖에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암중인이 자신을 드러내게 만들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을 거듭하며 차은성이 느릿느릿 걸음을 떼었다.
* * *
중국풍의 정원.
고색창연한 정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장년의 그는 뚜껑이 있는 중국 전통 찻잔을 양손으로 들고 천천히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우측에 서 있는 두어 살 연하로 보이는 다른 장년인.
그는 앉아 차를 마시는 장년인에게 무엇인가를 말했다.
“…….”
수여 초 후.
양손으로 찻잔을 든 장년인이 앞에 있는 둥근 석탁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귀수라…….”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곤혹이란 감정이 슬며시 배어 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양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엄연히 한국인이었고, 1차 항쟁 이후 지난 몇 년 동안 양가는 물론이고 타이완에 나타나지 않았던 귀수다.
그런데 지금 양가에 와 있다.
우측에 서 있는 연하의 장년인이 말했다.
“육가의 소가주 육소문이 당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앞으로 적잖은 소란이 일 듯합니다만.”
“그렇겠지. 귀수가 양가에 무례한 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깐. 그러고 보면 양 방주가 자식 복은 없지만 인복은 꽤 있어. 그렇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까지 어렵게 만들어 온 상황들이 귀수로 인해 흐트러지는 건 아닐까, 저는 그것이 우려됩니다.”
“훗.”
앉은 장년인이 실소했다.
“귀수를 일찌감치 제거하고 싶은가 보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는 미리미리 치워야 일련의 상황이 물 흐르듯이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긴 하지. 하지만 타이완 암흑가에서 귀수를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이는 아마 없을 거야.”
“하면, 홍콩 쪽에 알아볼까요?”
“홍콩도 마찬가지야. 귀수를 처리할 만한 이가 있었다면 1차 항쟁 때 양용과 함께 귀수를 죽였을 거야.”
“하면, 이대로 가만히 놔두실 참이십니까?”
연하의 장년인의 물음에 앉은 장년인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씨익.
이어 말했다.
“그럴 순 없지.”
“하면?”
연하의 장년인이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듣자니 귀수와 CIA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고 하더군.”
“CIA 쪽에 귀수에 관한 정보가 흘러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연하의 장년인의 말에, 장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 그때 그 아이를 가르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장년인이 후회의 눈빛을 띠었다.
“상황이 이리될 줄 그땐 몰랐지 않습니까?”
“흠. 그렇긴 하지만…….”
장년인이 말을 흐리자 연하의 장년인이 앉은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