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56)
사자방의 내분
육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저 없이 뒤돌아섰다.
“아버지!”
육소문이 다시 부친 육능을 소리쳐 불렀다.
―분하다!
―복수해 주십시오!
육소문이 그런 마음을 가감 없이 온몸으로 내보였다.
육능은 일절 육소문을 돌아보지 않았다. 뭐라 말하지도 않았다.
말없이 걸어갈 뿐이었다.
그런 부친 육능을 바라보며 육소문이 목이 터져라 소리쳐 불렀다.
“아……버……지!”
그사이.
좌우에 서 있는 육가의 이들이 하나둘 돌아서더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보기에 매정했다.
가주 육능의 아들이자 육가의 소가주인 육소문에게 너무 매몰찬 것이 아닌가 싶다.
당우희의 두 측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휴우우.”
죽는 줄 알았다.
아들 육소문의 얼굴을 짓이겨 놓았다.
육능이 엄청 화내며 자신들을 당장 죽여 버리라고 고래고래 소리칠 줄 알았다.
그런데 육능은 가타부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 육소문이 살아 돌아온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두 측근은 이해할 수 없었고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뭐가 뭔지…….
* * *
양승조, 차은성, 양령, 당우희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후.
양승조는 차은성과 따로 자리를 함께 하였고.
한참 후에 차은성이 양승조의 거처에서 나오자 양령이 술 한잔 하자고 제의했다.
차은성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양령을 따라간 곳에는 당우희가 있었다.
당우희를 보고 차은성이 흠칫했지만 그녀가 동석하는 것에 차은성이 뭐라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양승조가 친아들처럼 차은성을 생각하지만, 엄연히 말해 양가의 사람이 아니다.
외인이다.
* * *
차은성, 양령, 당우희가 원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
차은성은 내심 조심스러웠다.
중국의 주도라고 할까? 술과 관련하여 곤란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첫째. 대체적으로 중국술은 도수가 세다.
―둘째. 상대가 술잔을 부딪치며 은연중에 술잔을 다 비우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을 가한다.
―셋째. 잔에 술을 남기는 것을 상대를 은근 모욕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넷째. 잔이 빈 꼴을 보지 못한다. 잔이 비면 무조건 술을 가득 채워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다섯째. 그런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성장한 중국인들은 생각 외로 술이 세며 주량 역시 크다.
여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특히 삼합회에 적을 둔 여자들은 여느 일반 여자와 많이 다르다.
술에 있어서는 차은성보다 고수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차은성은 임무에 방해를 받을까 봐 이제까지 술을 자제하며 멀리했다.
퇴직한 이상, 이전처럼 술을 멀리할 필요는 없지만.
양령, 당우희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주량에서 달린다.
양령과 당우희가 무슨 작당을 했는지 서로 번갈아 가며 술잔을 부딪쳐 왔다.
차은성은 거절할 수 없어,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차은성은 본의 아니게 과음하게 되었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급격히 취기가 올랐다.
한 번쯤 급격히 오르는 취기를 의심해 볼 수도 있었지만. 차은성은 양령과 당우희를 신뢰하는 터라 의심하지 않았다.
방심하고 말았다.
그 방심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알게 되었을 때는 날이 훤히 밝은 다음 날 늦은 아침이었다.
‘맙소사!’
차은성은 질끈 두 눈을 힘주어 내리감고 말았다.
침대 속의 자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오른쪽에는 역시 맨몸인 양령이 쿨쿨 자고 있었다.
왼쪽에는 역시 맨몸인 당우희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자는 중이었다.
‘지저스!’
눈을 감은 차은성은 허탈하면서도 매우 당혹스러웠다.
지난밤 자신이 술에 너무 취해 무슨 몹쓸 짓을 했는지, 마음속으로 심하게 자책했다.
그러다 천천히, 곰곰이 지난밤을 돌이켜 보았다.
하나둘.
의심스러운 정황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부러 작정한 듯이 번갈아 가며 술잔을 부딪치며 계속 술을 마시기를 종용한 양령과 당우희.
그리고 아무리 도수가 높은 마오타이 주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쉽게, 술에 엄청 취할 리 없다.
‘혹시 술에 무슨 약을…….’
정황에 따른 합리적 의심을 해 보는 차은성이었다.
이내.
의심이 짙어지고 확신으로 이어졌다.
‘결국! ……내가 두 여자에게 당했다?’
차은성은 황당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양령과 당우희에게 당할 줄이야.
상황이 이렇게 되면 코가 꿰어 버린다. 꼼짝없이 양령과 당우희가 하자는 대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다.
양령과 당우희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엄청난 약점이 잡혀 버린 셈이다.
‘기가 막혀서!’
차은성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현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엎질러진 물처럼, 주워 담을 수 없는 상황이다. 없던 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외통수에 딱 걸리고 말았다.
눈을 내리감고 아무리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아도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차은성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차은성은 회피를 선택했다.
조심조심.
양령과 당우희가 깨지 않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나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주워 들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살금살금.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차은성은 방문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끼이이이이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가 울렸다가 방문이 닫혔다.
탁.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양령과 당우희가 동시에 눈을 떴다.
“실망인데. 언니.”
양령의 말에 당우희가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그 과정에서 당우희를 가렸던 요가 미끄러지고 그녀의 맨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여자로서 절정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 서른 초반의 무르익은 여인의 상체.
한번 본 남자라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무엇보다도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젖가슴이 남자를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당우희의 얼굴도 얼굴이지만 평소 피트니스로 몸을 가꾼 노력의 결실이 한눈에 다 보였다.
뒤이어 일어나 앉은 양령의 상체 역시 당우희에게 뒤지지 않았다. 글래머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무척 매력적이다.
“많이 당황했나 봐요.”
당우희의 말에 양령이 대꾸했다.
“멍청하게. 간밤에 우리 둘이서 자기를 덮쳤다고 착각하는 눈치예요.”
양령이 은근 한심하다는 투로 말하며 실망스러운 기색을 지었다.
기실 간밤에 아무 일이 없었다.
양령과 당우희는 차은성에게 목줄을 채우기 위해 연기했을 뿐이다. 꽃뱀처럼 말이다.
“적어도 남자라면 책임이라는 것을 질 줄 알아야지. 기껏 한다는 것이 몰래 도망치는 거라니.”
양령이 문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당우희는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남자들 속성이 그래요. 여자와 얽히면 어쩔 줄을 모르죠. 대개 회피나 도망을 선택해요. 특히 자신이 술에 취해 실수했다고 생각할 경우. 책임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과연 은성이를 잡을 수 있을까요?”
양령이 당우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당우희가 마주 보며 말했다.
“어릴 때…… 집에 있는 커다란 연못에…… 어린 제 양팔로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엄청 크고 무거운 잉어가 있었어요.”
“…….”
“잡고 싶은 마음에 연못으로 뛰어들었지만, 넓은 연못 곳곳으로 얼마나 빠르게 잘도 도망을 치던지…… 단 한 번도 못 잡았죠.”
“…….”
“하도 안 잡히니깐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까?”
양령이 말없이 당우희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라 그런지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당우희다.
“……천천히 궁지로 몰았죠. 도망칠 곳이 없는 연못 한쪽 귀퉁이로…… 그런 다음, 퍼덕거리는 잉어를 마침내 제 양손으로 들어 올렸죠.”
당우희의 눈이 반짝였다.
“대어는 도망칠 곳이 없는 귀퉁이로 천천히 몰아넣은 다음에…… 단숨에 붙잡는 거예요.”
“그런데 언니.”
양령이 당우희를 불렀다.
“…….”
“왜 은성이로 결정했어요?”
양령이 궁금하다는 속내를 내보였다. 당우희가 방긋 웃더니 말했다.
“……아버님이 좋은 남자를 만나 재혼하라고…… 솔직히 첫 결혼은 집안끼리의 정략혼이라 내 의사와 무관했지만.”
“…….”
“적어도 두 번째 결혼만큼은 내 마음에 드는 남자와 하고 싶었어요.”
당우희가 견고한 다짐을 내보였다.
“…….”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어요. 있는 남자라고는, 아가씨도 봤던 것처럼 치근덕거리는 육소문 같은 놈들뿐이었죠.”
“하긴 뭐.”
양령이 당우희의 말에 은근 동의했다.
“귀수!”
당우희가 힘주어 말했다.
“제 눈에 가장 남자답게 보였어요. 무엇보다도 의리가 있고 예의 바르잖아요. 요즘 그런 남자 흔치 않아요.”
순간.
“호호호호.”
양령이 크게 웃었다.
당우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양령을 보았다.
“아가씨.”
양령이 웃음을 그치며 당우희를 보았다.
“언니도 어쩔 수 없는 삼합회의 여자네요.”
당우희가 방긋 웃었다.
“태어나길 삼합회의 조직원 집안에서 태어나고. 삼합회의 이들을 보며 자랐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는 삼합회라는 물을 떠나 살 수 있는 물고기가 되어 있더라고요.”
“하긴 나도 그래요. 그 사람을 잃고…… 이제는 그 사람 얼굴도 생각이 안 나요…… 앞으로 죽을 때까지 혼자서 살 자신은 없고. 옆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데. 언니처럼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은성이만 한 남자가 없어요.”
양령의 말에 당우희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리 평생의 동지 할래요?”
양령이 방긋 웃으며 마주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럴 마음이 없었으면 언니와 함께 이렇게 연극하지도 않았겠죠.”
양령과 당우희는 굳게 악수한 후 손을 놓았다.
“든든하네요. 우리 둘이서…… 죽을 때까지 잘…….”
“그게 쉽지 않을 거예요.”
양령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당우희가 어리둥절해했다.
“네?”
양령이 말했다.
“한국에…… 한승희라고 은근 은성이에게 눈독을 들인…… 여성 경영자로서 능력이 꽤 출중한가 보더라고요.”
당우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곤란하네요. 셋이라니.”
“뭐, 그건 최악의 경우고. 우리 둘이서 은성이를 잘만 다루면 한승희라는 여자쯤은 얼마든지 제칠 수 있지 않겠어요.”
“호호. 동맹이라. 좋죠. 우리 앞으로 잘 해 봐요.”
“물론이죠. 호호호.”
양령에 이어 당우희가 웃었다.
“호호호호.”
양령과 당우희의 낭랑한 웃음이 잠시 방 안을 감돌았다.
* * *
이틀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차은성은 양승조와 밀담을 나눴다.
다른 이들이 엿듣지 못하게 신경 쓰며 양승조와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저는 순수 혈통의 중국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삼합회의 입회가 불가능하고 소방주가 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차은성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을 말하자 양승조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어.
차은성은 사자방의 내분을 언급했다.
“이대로는 의부님이 위험해지십니다.”
차은성은 침묵한 양승조에게 은퇴를 권했다.
“무슨!”
양승조는 강하게 반응했다. 은퇴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다.
“양령 누님마저 잃으셔야 은퇴하실 겁니까? 의부님.”
양령을 언급하자 양승조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남은 딸자식이다. 양령마저 잃는다면 양승조는 혼자다.
남은 생애를 혼자서 살다가 죽어야 한다. 절로 고독사라는 죽음이 생각나는 양승조였다.
“지금이 은퇴하시기에 적깁니다. 손에 쥔 것을 내던지십시오.”
“…….”
“굶주린 다섯 늑대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시고 의부님은 뒤로 멀찍이 물러나 여생을 편안히 보내십시오.”
차은성의 말과 함께 양승조가 순간 눈을 치떴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뜻밖이다!
양승조가 온몸으로 그런 감정을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