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40)
블랙옵스
“내가 그쪽의 복직에 도움을 줘도 되겠소?”
이시목의 제의에 순간 차은성이 흠칫했다.
당황 그리고 뜻밖.
차은성은 부지불식간에 두 감정을 온몸으로 내보였다.
정가연.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머리에 떠오른다.
전날 계단에서 정가연이 자신에게 한 말을 생각하며 차은성이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곤 가만히 이시목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묻기 시작했다.
“정 계장하고는 어떤 사이십니까?”
이시목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씩.
이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일상적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정가연 계장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이이긴 한데. 꽤 오랫동안 서로 소원해져서…… 개인적인 프라이버시에 관한 거라서 자세히 말하긴 좀 그렇고…….”
이시목이 말끝을 흐리며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복직에 관심이 있다면…… 내가 요즘 말발이 세져서 가능할 것도 같은데.”
“필요 없습니다!”
차은성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자 이시목이 흠칫거렸다. 그러곤 의아한 기색을 지었다.
“차 팀장!”
차은성은 이시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선인께서는 제게 빚 같은 것은 없으십니다. 제가 당선인을 위해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린다면, 죽은 전재원 순경의 미망인 뒤를 좀 봐 주셨으면 합니다. 혼자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니까요.”
“흠.”
이시목이 침음을 흘리며 가볍게 두어 번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의외였다.
자신의 복직을 반길 줄 알았더니.
그리고 죽은 전재원 순경의 미망인을 챙기다니.
이시목은 차은성에게 슬며시 관심이라는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말없이 차은성을 보자.
그새.
차은성이 말하며 천천히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는 일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밥, 잘 얻어먹었습니다.”
주저가 없는 행동이었다.
이시목에게 고개를 한 번 숙여 인사한 후, 차은성은 거리낌 없이 뒤돌아섰다.
그러자 이시목이 재빨리 차은성을 불렀다.
“차 팀장.”
레스토랑 입구로 막 걸어가려던 차은성이 멈칫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이어.
완만한 동작으로 이시목을 뒤돌아보았다.
“실은…… 박 과장이 어제 날 찾아와…….”
이시목이 박영광을 언급했다.
순간.
당혹이란 감정이 차은성의 두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박영광이 당선인 이시목을 찾아가 자신의 복직을 부탁했단다.
차은성이 당혹이란 감정을 느끼는 사이, 이시목이 계속 말했다.
“……차 팀장 같은 사람이 계속 NIS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훗.”
차은성은 실소했다.
“차 팀장.”
이시목이 가만히 차은성을 부르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차은성은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이시목을 바라보았다.
* * *
수여 초의 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차은성이 천천히 이시목에게 말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차 팀장!”
이시목이 힘주어 차은성을 불렀다.
차은성은 뭐라 말하지 않았다.
시선을 바로 하며 다시 레스토랑 입구로 걸어갔다.
당선인 이시목이 그런 차은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몇십 초 후.
레스토랑을 나온 차은성은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찾아가긴 왜 찾아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박영광.
자신이 NIS에서 쫓겨나지 않게 요즘 무진 애를 쓰는 모양이다.
“도대체 날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젠장!”
차은성은 투덜거리며 골목을 오가는 행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 * *
테이블에 앉은 당선인 이시목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어떠셨어요, 작은아버지?”
“꽤 괜찮은 친구 같긴 한데. 어딘가 모르게 맺힌 것이 많은 것 같더구나. 그리고 다소 염세적이고 은근 삐딱해.”
“그럴 거예요. 살아온 것이 여느 사람과 많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네 말대로 이대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NIS에서 계속 일하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구나.”
“고마워요. 작은아버지.”
“됐어. 그나저나 네 아버지 한번 찾아가 봐. 직접 말은 하지 않지만 은근 널 보고 싶어 하는 눈치야.”
“그럴 거면 왜 이혼을 하셨대요.”
“가연아.”
“작은아버지. 전 엄마 성을 따른 순간부터 아버지와는 선을 그었어요.”
“그래도 네 아버지야.”
“임신한 아내의 배 속에 있는 딸을 부정한 아버지예요.”
“가연아.”
“저 이만 끊어요.”
이시목은 조카 정가연과의 통화를 끝내고 수중의 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휴우.”
그러곤 한숨을 쉬었다.
이제까지 자주 연락하지 않던 조카 정가연이 며칠 전에 전화했었다.
씨익.
이시목은 소리 없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가연이도 그렇고 박 과장도 그렇고.”
중얼거리며 이시목은 레스토랑 입구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큰 복이지.”
중얼거리며 빙긋 웃었다.
조카 정가연이 전화한 다음 날. 그 나름 차은성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 결과.
이시목은 차은성이 꽤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당선인이 되는 것에 차은성이 그야말로 일등 공신 중의 일등 공신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자의가 아니겠지만. 확실한 것은 차은성의 공이 엄청 크다는 것이다.
씨익.
이시목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차은성.
다소 삐뚤어진 데가 있어 보이지만 그리 나쁜 이 같지는 않다.
팀원들을 잃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필드 요원으로 계속 활동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일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은성은 나름 잘 버티고 있다.
이시목은 그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마음의 고통과 슬픔을 남몰래 홀로 이겨 내고 있기에.
* * *
좁은 골목길을 사람들과 섞여 걸어가는 차은성. 영 기분이 좋지 않은지 안색이 무척 흐렸다.
눈에 보이는 이들은 죄다 남녀, 혹은 여여 커플이었다.
차은성처럼 남자 혼자서 걸어가는 이는 없었다.
흔한 말로 서울에서 가장 핫한 데이트 코스 중 하나가 북촌 카페 골목이다.
그 때문에 꽤 이채로웠고 커플들이 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카페 등 각종 이색적인 점포가 수두룩했다.
차은성은 분주한 걸음으로 빠르게 골목을 지나갔다.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에 차은성은 골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바삐 걸어가는 차은성의 눈에 앞에서 마주 걸어오는 한 커플이 보였다.
꽤 다정해 보인다.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쓴 여자가 왼쪽에 있는 남자의 팔짱을 꼈다.
여자의 오른쪽 어깨에는 앙증맞은 느낌을 주는 작은 핸드백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가느다랗고 긴 끈 때문에 핸드백이 눈에 띄게 앞뒤로 흔들렸다.
차은성이 그녀와 남자를 주시했다.
느낌!
아주 좋지 않다.
무엇보다도 여자와 남자가 자신을 유심히 보는 것에.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긴장의 빛을 띠는 것에.
은연중에 여자가 마치 자신에게 눈의 초점을 맞추려는 것 같아.
남자 역시 알아보기 어려운 긴장의 눈빛을 띠며 자신을 주시하는 것이.
주위를 오가는 이들 모두 자신에게 무심하고 아무 관심이 없는데.
쳐다보지도 않는데.
유독 예의 커플이 자신을 바라본다.
어쩌다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수도 있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기 마련인데.
예의 커플은 은연중에 딴 곳을 보는 척하지만 눈의 초점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모르는 이들인데. 생판 처음 보는 커플인데.
주위를 오가는 행인들과 은연중에 대조되는 커플이라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무난하게 섞이지도 않는 티가 난다.
차은성은 걷는 속도를 늦추며 유심히 남녀 커플을 살폈다.
경계와 주의.
차은성은 해당 모드에 들어갔다.
이상하다.
머릿속에서 빨간 사이렌이 마구 울리는 것 같다.
애애애애앵!
귓가에서 환청이 들린다.
여자가 손을 들어 안경을 밀어 올리고, 이어 어깨에 걸친 핸드백을 다시 어깨에 메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녀 커플의 주위에 마침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과 어깨나 몸이 부딪칠 염려가 없는데 굳이 핸드백을 다시 메야 할까?
그리고 옆에 남자 친구가 있는데 여자가 왜 자신을 주시할까?
세상 어느 여자가 옆에 남자 친구가 있는데 생판 처음 보는 남자를 쳐다볼까?
그랬다가는 당장 남자 친구와 한판 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은 연애에 있어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인데.
차은성은 뭔가 어긋난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그사이.
여자의 핸드백이 차은성을 향했다.
일직선의 최단 거리.
차은성은 핸드백이 꺼림칙했다.
이미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청부업자 미구엘이 자신을 죽이려 했었다.
모르는 일이다.
두 남녀가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일지도.
차은성은 불안감에 슬쩍 우로 한 걸음 이동했다.
그러자 여자와 남자가 거의 동시에 당황하는 눈빛을 띠었다.
여자는 걸어오며 핸드백으로 재차 차은성을 가리키려 했고, 남자는 급히 주변을 곁눈질하며 살폈다. 그런 한편으로 차은성의 동정을 살피려는 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차은성을 바라보는 남자.
어딘가 모르게 시선이 능숙한 느낌을 준다. 모종의 교육 과정을 거친 듯 일정한 규칙성을 띠는 느낌이다.
차은성은 다시 좌로 두 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용, 슬쩍 자신을 가렸다.
그러자 여자와 남자가 재차 당황하는 눈빛을 띠었다.
차은성은 그런 커플의 눈빛을 보았다.
‘어쩌면!’
짚이는 것이 있다.
만년필 총, 슈팅 나이프, 우산 총 등.
과거 냉전 시대에 KGB와 CIA는 상당히 재미있는 무기를 꽤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무기들을 첩보전에서 적극 사용 및 활용하였다.
주 용도는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CIA나 KGB 정보 요원의 암살이었다.
차은성은 여자의 핸드백이 의심스러웠다. 혹 자신을 겨냥하거나 겨눈 것이 아닐까?
만에 하나, 모르는 일이다.
차은성은 오가는 행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몸을 계속 가렸다.
그런 한편으로.
신속하게 남녀 커플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커플이 슬쩍 서로 돌아보며 빠르게 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좌로 돌아섰다.
커플은 좌측에 있는 한 카페로 급히 걸어가며 차은성을 슬쩍 흘겨봤다.
그들이 차은성을 신경 씀을 모를 수 없다.
차은성은 커플이 카페로 향하는 모습에 천천히 걸어가며 상의에서 폰을 꺼냈다.
* * *
북촌 카페 거리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카페.
스르르.
입구의 자동 유리문이 좌로 열리고 차은성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차은성은 느긋하게 걸으며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커플.
카페 내에 다른 출입구가 있다면 그들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다면 커플은 카페라는 독 안에 든 쥐다.
차은성은 잠깐 입구를 등지고 서서 카페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