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64)
도로를 바람처럼 내달리는 세단.
순찰차들이 따라붙지 않았다. 아마도 임범철 국장이 급히 손을 쓴 것 같다.
세단이 정지선이나 교차로에 근접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등의 신호가 직진으로 바뀌었다.
바아아아앙.
덕분에 세단은 신호에 걸리지 않았다. 또한 시속 200Km 이상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맹렬한 속도로 도로를 질주하는 세단을 본 몇몇 차량이 얍삽하게도 세단의 뒤에 붙었다. 하지만 채 얼마 가지 못했다. 세단의 속도에, 예의 차량은 하나둘 까마득히 뒤로 처지고 말았다.
* * *
인천발. 대만행 JAL 303편.
탑승 수속이 다 끝났음에도 관제탑으로부터 몇 번 활주로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지 못했다.
기장과 부기장이 무전으로 관제탑과 교신하며 활주로를 배정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기다리세요.”
“이대로는 연착입니다.”
“탑승객 중에 폭발물을 소지한 테러리스트가 있습니다.”
“그렇담 탑승 수속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기다리세요.”
“언제까지 말입니까?”
기장이 화냈다.
이미 예정 시간을 30분 이상 넘겼다. 연착에 대한 책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장이 관제탑의 지시 없이 예정된 활주로로 이동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관제탑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압박이었다.
부기장이 반대했지만 길어진 대기와 연착에 대한 부담으로 기장이 이동을 강행했다.
그러자 관제탑에서 즉각 이동을 멈추라고 무전으로 요구했다.
그러자 기장이 다시 활주로를 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관제탑은 해당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기장이 대기하자고 기장에게 말하자, 기장이 버럭 화냈다.
“언제까지!”
기장의 서슬에 부기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기장의 눈치를 보았다.
기장은 계속 관제탑을 압박할 생각에 예정된 활주로로 그만 이동해 버렸다. 그러자 관제탑에서 무선으로 지랄지랄 했다.
“가지 말라고! 대기하란 말이야.”
“내가 왜 조센징 말을 들어!”
열 받은 기장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며 관제탑의 제지를 무시했다.
기장과 관제탑 사이에 한바탕 거친 설전이 오갔다. 설전 끝에 관제탑의 관제사가 기가 막혔는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기장의 강행을 통한 관제탑 압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위로 돌아갔다.
활주로 곳곳에 주차한 소방차들.
도저히 이륙할 상황이 되지 않았다. 탑승한 승객들과 함께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활주로 진입 및 이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기장이 말을 듣지 않을 것에 대비해 박영광이 공항 소방서를 움직인 것이 주효했다.
* * *
차은성이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NIS 공항 분소에 비상이 떨어져 소속 요원들이 사실상 공항을 통제하고 있었다.
공항의 각 부서에 요원들이 나가 대기하며 급박한 무전을 주고받았다.
해당 JAL 303편에 요원들이 탑승. 승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검문 검색했다. 하지만 마담 화이트는 없었다.
“그럴 리가?”
차은성은 당황했다. 분명 탑승 수속을 밟는 중이라고 자신의 귀로 똑똑하게 들었다.
그때.
다른 활주로에서 한 대의 항공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했다.
무심코 돌아본 차은성이 항공기를 보곤 눈을 반짝였다.
“저 항공기는?”
“아, 네에. 북경으로 가는 노스 아메리캅니다.”
공항 분소 소속의 선임 요원이 말했다.
순간.
차은성은 마담 화이트가 노스 아메리카에 탑승하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는 불분명하지만 일종의 예감을 느꼈다.
‘다, 당했어!’
차은성은 마담 화이트가 자신의 수법을 쓴 것 같아 내심 당황했다.
성동격서.
상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자신은 반대편에서 움직인다. 자신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차은성은 노스 아메리카에 마담 화이트가 탑승해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감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노스 아메리카 항공기를 강제 착륙시킬 수가 없었다.
그럴 경우.
틀림없이 노스 아메리카가 미국 정부를 통해 강력히 항의할 것이고.
미국이라면 알아서 쭈그러지는 한국 정부를 감안하면.
차은성은 적잖은 부담을 느꼈다.
‘이!’
차은성은 흉신악살 같은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물었다.
빠드득.
양손을 힘주어 말아 쥐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바르르.
시야에서 멀어지는 노스 아메리카 항공기를 바라보며 차은성이 섬뜩한 눈빛을 희번덕였다.
‘이게 끝은 아니야!’
마음속으로 나직이 중얼거리며 뒷날을 기약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 * *
며칠 후.
죽은 노태준, 연지, 황민준, 우형광, 김아름의 장례와 발인이 있었다.
박영광을 포함, NIS 이들은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위장한 업체 관계자들 몇 명이 참석했다.
유족들은 죽은 이들이 NIS 요원임을 까맣게 몰랐다.
죽어서도 요원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필드 요원의 경우, 그 신원이 영원히 감추어진다.
* * *
발인과 안장이 끝난 며칠 후.
×× 공원묘지.
차은성이 죽은 팀원들 묘소 앞에 서 있었다.
“선배.”
“…….”
“바다에 몰래 뿌려 달라는 말!”
“…….”
“들어 드릴 수가 없네요.”
차은성이 중얼거리며 옆을 돌아봤다.
“연지가 혼자서 외로울 거예요.”
이어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민준아, 형광아. 아름아.”
차은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다 잃었다.
차은성은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양 주먹을 피가 나도록 움켜쥐며 고개를 뒤젖혔다.
하늘이 보인다.
우중충하다. 한바탕 비라도 올 것 같다.
슬금슬금.
먹구름이 하나둘 몰려오는 것이 보기에 그리 썩 좋진 않다.
저벅저벅.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은성이 좌를 힐긋거렸다.
박영광.
* * *
경각 후.
박영광이 우에 서 있는 차은성에게 마이크로카드를 내밀었다.
차은성이 받아 들며 물었다.
“뭡니까?”
“월터 부국장이 보내온 거야.”
차은성이 흠칫했다.
박영광이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먼스가 현재 행방불명이야.”
차은성이 움찔했다.
“월터 부국장이 뭘 잡았는지, 시먼스 부국장이 CIA에 들어온 과거 시점부터 현재까지 재조사 중이야.”
차은성은 박영광의 말을 들으며 상의에서 폰과 리더기를 꺼냈다. 카드를 리더기에 끼우고, 이어 리더기를 폰과 연결했다. 그러자 액정에 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으음…….”
차은성이 신음성을 흘렸다.
그 여자다!
음향 무기로 자신을 공격했던 마담 화이트.
그사이.
박영광이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더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콜 네임은 마담 화이트.”
“…….”
“북경과 싱가포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갔어.”
“…….”
“월터 부국장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시먼스 부국장이 운용하던 CIA 고용. 프로 살인 청부업자들 중 한 명인 것 같다.”
“…….”
“몇 해 전부터 인터폴의 적색 수배자 명단에 올랐지만 CIA가 뒤를 봐 주는 터라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잘 넘겨온 모양이야.”
“…….”
“인터폴로 파견 나가 있는 애들 말로는 인터폴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체포하려고 별렀는데. 번번히 CIA 때문에 잔뜩 물만 먹은 모양이야. 그 때문에 담당관이 수차례 교체되었고, 인터폴의 해당 부서와 CIA의 관계가 매우 악화됐어.”
“…….”
“……호주인 부친과 베트남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듀크 대학에 다닐 때 CIA 모집관 눈에 띄었던 모양이야.”
“…….”
“CIA에서 꽤 인정을 받은 모양이긴 한데. 몇 해 전에 벨로루시에서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그 이후 프리랜서로 전향. 활동하면서 CIA의 더러운 일을 몇 한 모양이야. 그 바닥에서는 꽤 알아주는 프로 살인 청부업자로, 시먼스 부국장의 숨겨진 와일드카드로 그간 쓰였던 모양이야.”
“…….”
“즉, 시먼스 부국장이 너희 팀에게 보복했다는 말이 돼.”
차은성은 박영광의 설명을 들으며 액정을 보았다. 이어 손가락으로 휙휙 젖히자 마담 화이트 관련 정보들이 나타났다. 모두 CIA 내부 정보였다. 이 정도 정보를 보내온 것을 보면, 월터 부국장이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음…….’
차은성은 시먼스 부국장이 행방불명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 * *
잠시 뒤.
“은성아.”
“네.”
“콜 네임. 마담 화이트.”
“…….”
“네게 많은 시간을 줄 수 없다. 최대한 빨리 끝내라.”
차은성은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박영광의 말에 피식 웃었다.
“얼마나 주실 수 있습니까?”
“두 달!”
“충분합니다. 그럼.”
차은성이 대답과 함께 옆으로 돌아섰다. 막 걸음을 떼려는데.
박영광이 하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차은성을 힐금거렸다.
“은성아.”
“네.”
차은성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을 잃었다. 네 아버지, 동료들, 3팀. 그리고 이제는 너희 아르티펙스 팀.”
“…….”
“사람을 잃는 것에 지칠 대로 지친다.”
“…….”
“죽지 마라!”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피식 웃으며 돌아봤던 시선을 바로 했다.
“제 코드명이 벌맵니다. 순한 외모지만 잔인하게도 말벌의 새끼들만 골라 잡아먹는 야생 매!”
박영광이 담배를 입에 물며 걸어가는 차은성을 돌아봤다.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속한 바닥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고 요지경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날고뛴다는 최정예 요원들이 이름도 모르는 이들에게 죽어 나가는 극악한 세계다. 마치 무간도를 살아가는 것처럼…… 끝없이 죽이고 죽어 간다.
박영광은 그런 세계로 차은성을 끌어들인 것이 과연 옳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지, 내심 후회된다.
* * *
차은성은 이후 이틀 동안 신변을 정리하는 한편.
마담 화이트.
그녀를 뒤쫓기 위한 방법에 고심했다.
* * *
벌매는 무리 짓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 나그네처럼 저 먼, 춥고 배고픈 시베리아 동토에서 날아올라 한국으로 온다.
그 벌매가 이제 여우 사냥에 나섰다.
……뿌우우우우.
저 멀리서 여우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 * *
카페.
차은성은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며 살며시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씨익.
영국 귀족들의 고급 사교 취미라고 할 수 있는 여우 사냥.
현대에 이르러 이런저런 환경보호론자들이나 단체의 거센 항의와 비판을 받고 있다.
여우 사냥을 시작하면.
말을 탄 사냥꾼들이 사냥할 여우를 뒤쫓기 위해 폭스 하운드라 부르는 수십여 마리의 사냥개를 풀어놓는다.
그처럼 차은성 역시 마담 화이트를 잡기 위해 사냥개들을 대거 풀어놓으려 했다.
자신을 마담 화이트라는 여우에게 안내할 사냥개들을…….
얼마 있지 않아 탑승 예정인 항공기의 출발 시각을 공항 안내 방송이 들렸다.
차은성은 노트북과 서류 가방을 챙겼다. 이어 천천히 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얼마 후. 차은성은 탑승 수속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