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53)
청장실로 들어서는 노태준을 본 임범철 국장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민경구 청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채 노태준을 바라보았다.
“정보국장 임범철입니다.”
손을 내미는 임범철 국장을 노태준은 본척만척했다. 곧바로 민경구 청장의 우측에 있는 다인용 소파로 가 앉았다.
그러자 임범철 국장이 멀쑥해졌다.
‘하긴.’
노태준을 이해하는 임범철 국장이었다. 그가 노태준이라도 악수 따윈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찬바람이 부는 노태준의 행동 역시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임범철 국장 역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기에.
* * *
잠시 뒤.
소파에 앉은 노태준이 매우 신경질적으로 펜을 놀렸다.
스스슥.
사인을 한 후, 맞은편에 앉은 임범철 국장에서 합의서를 내밀었다.
“우리 애가 미성년자이니 법적 보호자인 내 사인이면 충분할 겁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임범철 국장이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번 일에 있어 그쪽은 제3자일 텐데요.”
노태준의 말에 임범철 국장이 움칫했다.
―주제넘게 나서지 마라!
노태준이 무언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무안해진 임범철 국장이었다. 대번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유감이오. 그리고 내 합의금은 충분히…….”
그래도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민경구 청장이 합의금을 넉넉하게 주겠노라고 말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노태준의 말에 그만 중간에서 끊기고 말았다.
노태준이 임범철 국장을 똑바로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합의금 따윈 필요 없소.”
민경구 청장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싫다!
노태준이 심중 그런 감정을 내보이는 것 같다.
하긴 딸이 그리 당했으니, 아버지로서 참을 수밖에 없는 엿 같은 상황에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있는 적의, 없는 적의, 다 내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임범철 국장은 노태준을 이해했다.
“그래도…….”
합의금을 받으라고 말하려 했다.
한데…….
“나는 지금까지.”
“…….”
“나라를 위해 음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소.”
노태준의 말에.
민경구와 임범철 국장이 순간 움찔했다.
“국익이란 미명하에 사람도 꽤 많이 죽였소.”
“…….”
“그 모든 것이 나라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소.”
노태준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말하며 민경구 청장을 돌아봤다.
“당신이나 당신 딸 같은 이들을 위해!”
“…….”
“내가 그렇게 손에 피를 묻힌 게 아니야!”
고함치는 노태준의 눈동자가 일순간 호랑이 눈처럼 강렬한 빛을 뿜었다.
다수의 사람을 죽인 살인마!
그렇게 정의 내려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노태준이다. 그런 노태준이 온몸으로 분노를 쏟아 냈다. 새끼를 잃은 맹수의 울분인 양.
민경구 청장과 임범철 국장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꿀꺽, 꿀꺽.
연이어 마른침을 삼키는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노태준의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국장님만 아니었더라면!”
노태준이 주철현을 언급했다. 그가 직접 노태준을 찾아왔다. 그러곤 노태준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노태준은 민경구 청장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대놓고 죽이고 싶은 마음! 살의를 내보였다.
민경구 청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두려움이란 감정에 젖었다.
* * *
한편.
임범철 국장은 노태준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챘다.
필요에 따라 주저 없이 사람을 죽여 버릴 수 있는 NIS의 필드 요원.
‘천만다행이야.’
2차장 선우종이 연락해 온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그와 합의를 보지 못했더라면, 주철현 국장이 노태준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간곡한 설득에 노태준이 마음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범철 국장이 민경구 청장을 슬쩍 훔쳐봤다.
그의 눈에 보이는 민경구 청장은 10만 경찰의 총수답지 않게 심리적으로 노태준에게 밀리고 있었다.
새끼를 잃은 맹수!
맹수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사냥꾼도 도망친다.
새끼를 잃은 맹수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새끼를 해친 것이 다른 맹수이건 사람이건. 죽여 없앨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복수하고자 한다.
짐승이 그러할진대, 사람이라고 그와 다를까?
임범철 국장은 훔쳐보던 시선을 바로 하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
민경구 청장의 딸, 민해경 때문에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이만저만 답답한 것이 아니다.
* * *
라센느 인근 도로가에 정차한 중형차.
차 안에 세 사람이 있었다.
주철현 국장과 차은성. 그리고 주철현 국장의 경호원이자 운전기사이기도 한 사내.
차은성은 앞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못 하겠습니다!”
주철현 국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더다. 차 팀장.”
주철현 국장이 감정이 없는 무심한 어조로 말하자 차은성이 강하게 반발했다.
“국장님!”
돌아보며 성난 눈빛을 번득였다.
“…….”
“저희를 국외로 내보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무리한 오더를 내리시는 거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차은성이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
주철현 국장은 침묵하며 앞을 보았다.
“왜요? 무섭습니까? 저희가 민경구 청장을 죽여 버릴까 봐 무서우신 거냐고요?”
차은성이 재차 언성을 높였다.
운전석에 앉은 사내가 그새 실내 미러를 힐긋 쳐다봤다.
“눈 깔아!”
차은성이 차갑게 말하며 운전석의 사내를 흘겨봤다.
사내가 일순 움찔했다. 미러를 통해 보며 차은성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는 것을 차은성이 아무래도 눈치챈 것 같다.
사내가 미러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차 팀장!”
주철현이 차은성을 돌아봤다.
“죽고 싶나?”
위협했다. 국장으로서 팀장인 차은성을 찍어 누르려 했다.
“명령에 불복종한 요원이 어떻게 되는 줄 몰라?”
주철현 국장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차은성은 거침없이 대꾸했다.
“죽일 수 있으면 어디 한번 죽여 보십시오.”
“너어…….”
주철현이 성난 눈빛을 띠었다.
“국장님이 왜 절 찾아오셨는지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차은성의 말에 주철현이 움찔했다.
“국장보님이 그러셨겠지요. 절 가만 놔두면 민경구 청장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무리한 오더를 주어서라도 당장 국외로 내보내야 한다고. 아닙니까? 국장님!”
주철현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당황했다.
정확하게 간파한 차은성이다.
“……그렇게 형수님이 작전 중에 순직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선배는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완수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고 어린 딸자식을 데리고 이날 이때까지! ……조국에 헌신하고 또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국이 태준 선배에게 해 준 게 대체 뭐가 있습니까?”
“…….”
“애초부터 바라는 것도 없었지만!”
“…….”
“그래도 최소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요원의 어린 딸만큼은!”
차은성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라렸다.
주철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양심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좌로 돌렸다. 그러곤 창밖을 바라보는 척했다.
운전석에 앉은 경호원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심히 계속 정면을 바라보았다.
차은성은 고개를 돌린 주철현 국장을 말없이 잠시 바라보더니 우로 돌아앉았다. 그러곤 차 문을 열었다.
덜컥.
차은성은 차에서 내리며 매우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았다.
타아앙.
주철현은 시선을 바로 하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
그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상부에서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주철현은 고개를 돌려 걸어가는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차를 뒤로하고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차은성.
주철현 국장이 착잡한 눈빛을 띠었다. 국장인 그가 직접 팀장인 차은성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차은성의 말마따나 박영광이 불안하다고 보고했다.
차은성이 폭주할 경우, 민경구 청장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해당 상황을 무조건 피해야 한다. NIS 요원이 경찰청장을 죽였다?
청와대가 아니라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고도 남을 일이다. 야당도 야당이지만, 여당도 들고일어날지 모른다.
NIS 역사상 역대급 사건이 될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상부에서 이번 일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조용히! 덮고 가려 했다.
주철현 국장이 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
잠깐이란 시간이 지나고, 폰을 귀에 댄 주철현 국장이 말했다.
“일거수일투족 감시해. 매 5분 단위로 동태 보고하고.”
“…….”
“그래. 절대 눈치채서는 안 돼. 이미 회사에서 감시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거야.”
“…….”
“그럼.”
주철현 국장이 통화를 끝낸 후 상의에 폰을 집어넣었다. 그러곤 경호원을 쳐다봤다.
“가자.”
“네. 국장님.”
경호원이 대답하며 시동을 걸었다.
* * *
잠시 뒤.
차은성이 도로를 따라 걸으며 통화 중이었다.
“선배.”
“나 좀 보자.”
“네.”
“3시간 후에…… 거기서 만나자.”
“네. 선배.”
차은성이 대답하며 통화를 끝냈다.
* * *
3시간 후, 공원묘지.
노태준이 천천히 묘소 사이를 걸었다. 차은성이 한 걸음 떨어진 뒤에서 따라 걸었다.
“은성아.”
“네. 선배.”
“민경구 청장. 내버려 둬라.”
노태준의 말에 차은성이 움찔하더니 걸음을 멈췄다.
“선배.”
노태준이 걸음을 멈추며 뒤돌아섰다.
“네 성격에 민경구 청장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렇지?”
노태준의 다그침에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넌 단순히 작전이 끝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아.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과격한 응징을…… 그런 네가 가만히 있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
“…….”
“은성아. 상대는 경찰청장이다. 죽일 경우 문제가 커져. 청와대는 물론이고, 회사까지 불똥이 튀어.”
“선배! 화도 안 나십니까? 선배에게 연지가 어떤 앤데요.”
“난! 연지가 내가 NIS 필드 요원이라는 것을 몰랐으면 해.”
노태준의 말에 차은성이 움칫했다.
“연지가 나나 죽은 그 애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해.”
노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까지 나라 밖에서…… 나라를 위협하는 자들과 맞서 싸워 왔는데.”
“…….”
“내가 맞서 싸워야 하는 자들이 나라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라 안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
“봐라, 은성아. 다들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순직한 우리 동료이고 선배이며 후배다.”
노태준이 묘소를 돌아봤다.
“저들이 우리가 민경구 청장을 죽이고 회사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을 반길까?”
“…….”
“다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나라를 위해 음지에서 활동하다가 순직했다.”
“…….”
“그런데 연지 때문에 민경구 청장을 죽이면,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냐?”
노태준의 물음에 차은성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흔적도! 증거도 남지 않습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 그다음은…….”
“…….”
노태준의 말에 차은성은 뭐라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