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7)
불입호혈부득호자
화용진이 잔을 들었다. 천천히 차를 마시는 그의 모습에서 속내가 보인다.
‘훗. 시간을 끄시겠다. 뭐, 나쁘지 않지.’
차은성은 찻잔을 들었다. 그 역시 차를 몇 모금 마신 다음, 찻잔을 내려놨다.
화용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은성을 보았다.
불쾌감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한국 정부가 생각 밖으로 대단하군. 날 감시하고 있었나? 아니면 베이징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화용진이 은근 비꼬았다. 심기가 매우 불편한 모양이다.
차은성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대인. 한국 정부는 세계 최강의 IT 강국입니다.”
차은성이 한국 정부의 위상을 돌려 언급했다.
끝내주니깐!
함부로 까불지 마!
화용진이 언뜻 비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말아 살짝 밀어 올렸다.
* * *
그사이.
차은성이 앉은 의자 우측 바닥에 있는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이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낸 후 다시 내려놓았다. 이어 꺼낸 서류를 화용진에게 밀었다.
“한번 읽어 보십시오.”
“흠.”
화용진이 서류와 차은성을 번갈아 봤다.
“대인. 한국 정부는 이번 일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희망합니다.”
화용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슬며시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차은성이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빙고!’
일단 화용진이 서류를 보기만 하면, 이번 일의 해결 실마리가 잡힌다.
* * *
얼마 후.
화용진이 성난 손짓으로 서류를 덮었다.
탁.
그러자 차은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대인. 죽림방을 포함, 삼합회에 속하는 모든 조직은…… 해당 규약은 조직이 탄생할 때에…… 반드시 지켜야 하며 규약을 어기는 이는 죽음으로…….”
화용진이 말없이 차은성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흐릿한 곤혹이란 감정이 스며 나왔다.
차은성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해당 규약은 몇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으로 압니다.”
“…….”
“그중 하나가…… 형제의 처자식은 건드리지도, 탐하지도 않는다!”
“…….”
“그런데 육두시는 부하의 아내를 탐해 사고로 위장하여 부하를 죽인 다음, 그 부인을 자신의 정부로 삼았습니다. 이를 아는 자들은 다들 쉬쉬하였습니다.”
차은성은 규약을 의식한 육두시가 그 사실을 아는 이들에게 행한 조치를 입에 올렸다.
화용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했다. 심중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화용진은 일절 그와 같은 티를 내지 않았다.
차은성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강제로 육두시의 정부가 된 그녀가 카지노에서 처음 만난 구승찬과 그렇게 한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녀로서는 그것이 육두시에 대한 저항이자 항거였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육두시에게 보복하고 그의 얼굴에 먹칠하고자…… 아마 구승찬이 마약중독자라는 걸 그녀는 몰랐을 겁니다. 알았다면 다른 남자를 택했을 겁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죽음이었습니다.”
“…….”
“구승찬이 무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단도회주 육두시라는 겁니다. ……필히 지켜야 하는 규약을 어겼고 감추었으며…… 자신의 명예와 체면 때문에, 삼합회에 통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삼합회의 도움을 받아 히트맨들을 고용…… 노상강도로 위장…… 저희 사람을 둘이나 죽였습니다.”
차은성이 말하는 동안 화용진은 단 한마디로 말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굳어질 대로 굳어졌다.
“제가 대인을 이리 찾아뵌 것은 저희 정부가 더는 이번 일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
“대인께서 이번 일의 원만한 해결을 바라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화용진이 반문하며 불쾌하다는 심사를 내비쳤다.
차은성은 거침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베이징을 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훗.”
화용진이 실소하더니 이내.
“푸하하하하하!”
방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차은성은 담담했다. 비웃듯이 계속 웃는 화용진을 말없이 지켜봤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화용진이 차은성을 보았다.
“그렇게 우리가 무섭다면, 사정하는 것이 어떤가? 그럼 내가 호의를 베풀어 줄 수도 있는데…….”
말끝을 흐렸다. 오만하다!
한국을 깔보는 전형적인 중국 한족의 언행이다.
기분 나쁘지만, 차은성은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말했다.
“대인.”
“…….”
“절 시험하시는 건 그만두시죠.”
차은성의 말에 화용진이 움칫했다. 차은성에게 속내를 들켰다.
차은성이 말을 이었다.
“베이징은 마카오 특별 행정구를 중국 영토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일로 한국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겁니다.”
“…….”
“왜인지 아십니까?”
“…….”
“아직은 한국으로부터 취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
“이익이 있는 곳에!”
“…….”
“친구가 있다!”
차은성의 말에 화용진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 * *
단도회주 육두시를 잡기 위해 차은성이 택한 것은 호굴이라고 할 수 있는 죽림방주 화용진이었다.
그와 같은 차은성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 * *
화용진이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중국인에게 체면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네.”
“압니다. 그 때문에 육두시가 구승찬을 악착같이 잡아 죽이려는 거겠죠.”
“구승찬은 죽을 것이네. 그것은 세상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네.”
“글쎄요. 과연 그것이 최선일까요?”
“무슨 말인가?”
화용진이 눈을 반짝였다.
“죽림방의 체면도 살리고 우리 한국의 체면도 살리고, 서로 윈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말인가?”
화용진이 반문하며 넌지시 관심을 내비쳤다.
* * *
잠깐이란 시간이 지나고.
“으하하하하하!”
화용진이 다시 방 안이 떠나가라 웃었다.
차은성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이것이 최선이야.’
자신에게 내려진 오더는 살아 있는 구승찬을 데리고 서울로 오라는 것이었다.
웃음을 그친 화용진이 말했다.
“좋네.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화용진의 얼굴이 환해지며 만족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됐어!’
차은성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데.”
“…….”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차은성의 말에 화용진이 움칫했다.
“무슨……?”
차은성이 화용진을 바라보며 냉랭한 눈빛을 띠었다.
“죽은 두 사람!”
힘주어 말했다.
화용진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의 목숨값을 내어 주셨으면 합니다. 대인.”
차은성의 말에 화용진이 당황했다.
“자네!”
“한국에…… 환치기, 보이스 피싱, 밀매, 마약 등에 깊이 관여한 삼합회의 하부 조직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나더러 지금 형제들을 팔란 말인가?”
화용진이 언성을 높이며 노한 눈빛을 번득였다.
차은성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말했다.
“삼합회에는 죽림방 외에 청방, 홍방, 흑사회 등 많은 조직이 있습니다.”
화용진이 일순 움찔했다.
타 조직의 하부 조직망을 넘겨라!
차은성의 속내를 알아챘다.
“저희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대인. 저희도 체면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화용진이 주저했다.
아무리 타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내에 있는 하부 조직망을 넘겨주는 것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대인과 저 사이에 오간 대화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저희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
“저희 쪽에서는 오직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하면, 해당 정보 유출이 대인이 아닌 제가 되겠죠. 만약 제가 정보를 유출하였다 생각되면 언제든지 그 대가를 받으러 오십시오.”
죽일 테면 죽여라!
강하게 치고 나가는 차은성이었다.
“자네.”
“…….”
“배포가 대단하군.”
“…….”
“자네 앞에 대죽림방의 방주가 앉아 있는데 그런 말을 하디니 말이야.”
화용진이 경고하듯이 말했다.
함부로 설치지 마라!
차은성은 거리낌이 없었다.
“대만 양 대인께서 절 보증하셨습니다. 대인께서 해당 정보를 유출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시다면 굳이 꺼릴 것이 무에 있습니까?”
“굳이 한국의 조직망이어야 하나. 다른 것으로 보상하면 안 되겠나?”
“안 됩니다!”
차은성이 힘주어 말하며 눈에 힘주었다.
“이것은 제 뜻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뜻이고 의지입니다. 대인.”
“으음.”
화용진이 침음을 흘렸다.
* * *
대한민국 요원을 죽인 대가!
그것을 요구하는 차은성이다. 거부하면, 베이징과 한국 정부 사이의 외교 문제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베이징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죽림방이라고 해도, 베이징을 적으로 돌려서는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리고 차은성이 비밀 보장을 약속했다. 차은성 말대로 양승조가 뒤에 있다.
믿을 만하다!
* * *
“흠.”
화용진은 침음을 흘리며 맞은편에 앉은 차은성을 보았다.
천천히.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입에 대고 차를 몇 모금 마시는 중이었다.
* * *
며칠 후.
회주 육두시가 은밀히 처리되었다. 그리고 장뢰가 회주 자리에 앉았다.
“으하하하하하.”
장뢰는 매우 기뻐 웃고 또 웃었다.
“그놈이 복덩이였어. 하하하하하.”
장뢰는 차은성을 생각하며 계속 웃었다.
놀랍게도 방주 화용진을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웃음을 그치지 않는 장뢰를 바라보는 이정. 차은성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단한 자야.’
경탄했다.
불입호혈부득호자.
그 말을 실천에 옮긴 차은성이다.
‘향후…….’
이정은 차은성과 적이 되는 것을 극구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였다.
그의 시선이 못 박힌, 좋아 죽으려는 장뢰.
‘얼마나 버틸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장뢰 정도의 역량과 그릇으로 단도회를 이끌기에는 무리다.
* * *
닷새 후. 인천국제공항 터미널.
차은성이 큼직한 유리벽 앞에 서 있었다.
바라보는 창 너머에서는 다수의 구급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잡힌 이후, 폭행과 고문을 당한 구승찬, 송해영, 그녀의 일행.
사전에 연락한 까닭에 사람들이 대기해 있었고, 그들을 구급차에 태워 하나둘 공항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에 차은성이 우를 돌아봤다.
활짝 웃으며 걸어오는 박영광.
* * *
공항 휴게실.
자판기 커피를 앞에 두고 차은성과 박영광이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대화 중이었다.
“대단한 녀석.”
“…….”
“어떻게 한 거냐? 어디 무용담 좀 늘어놔 봐.”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소리 없이 실소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달리 방법이 없더군요. ……육두시라는 대가리를 잡기 위해, 그보다 위에 있는 대가리와 담판을 짓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네……. 뭐,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차은성의 설명이 이어지고 설명을 다 들은 박영광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큭큭큭.”
“오더대로 구승찬을 데리고 왔습니다.”
차은성이 말하며 살포시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