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EX급 헌터가 된 해석학자 (2)
러시아 모스크바.
역대 러시아 국가 원수들이 집무를 봐 왔던 크렘린 궁 깊숙한 곳에서, 러시아 대통령은 홀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당신 말은 잘 알았어, 아레스.”
대통령은 왼손에 착용한 건틀릿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쪽 세계의 언어를 익혀 줘서 감사할 따름이야. 다른 고차원 지성체들은 이쪽 세계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면서?”
그렇게 말하며 대통령은 미소를 지었다.
“포보스, 하르모니아, 데이모스 등…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고차원 지성체가 퇴장한 이상,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나설 최고의 타이밍이겠지.”
대통령이 헌터가 된 건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사실 본격적인 헌터 활동을 할 생각은 없었고, 레저 활동의 일종으로서 무한서고를 체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던전에서 갑자기 발생한 돌발 이벤트로 수행원들이 전멸해 버렸다. 대통령은 그동안 배워 온 무술을 활용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는데, 던전 구석에서 기이한 존재와 접촉했다.
그것이 바로… 고차원 지성체 ‘아레스’였다.
“당신은 고차원 지성체 중에서도 상위 권한을 지닌 존재라고 했지? 당신과 손을 잡으면 나는 정말 거대한 힘을 얻을 수 있겠군.”
그렇게 말하고 대통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내가 지금 당장 무한서고를 드나들면서 일반 헌터들처럼 행동할 생각은 없어. 제대로 전략을 짜서 움직여야겠지.”
현재 세계 여러 나라들이 주요 헌터들을 잃고 약체화되어 있는 상태다.
하지만 러시아는 애초에 특정 헌터를 키우는 전략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브레이크다운도 한국 헌터들 도움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우리 러시아는 아직 여력이 있어. 무한서고의 자원들도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상태지.”
그것들을 이용해, 혼란에 빠져 있는 세계 헌터계에서 급속도로 힘을 키운다.
고차원 지성체의 수장 아레스와 손을 잡고.
“나에게 맡겨 줘, 아레스. 나보다 강한 권력을 지닌 헌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헌터로서의 무력.
대통령으로서의 권력.
얼핏 보기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이 조합으로 어떻게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킬지, 이미 대통령의 머릿속에서는 다 플랜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러니 아레스, 일단 네 말대로 마도서를…….”
그때였다.
대통령 혼자만 있었던 방 안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한데.”
“……?!”
대통령은 다급히 뒤돌아봤다.
그리고 동양인 남자 한 명이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걸 확인했다.
“어, 어떻게……!”
“조용히 해. 소란 피울 생각은 없으니까.”
동양인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대통령에게 다가왔다.
“자, 잠깐, 너 설마… 서민혁?!”
1년 전, 세계 최초의 EX급 헌터로 인정받은 한국인.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걸 깨닫고 대통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 아니, 여기에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설마 나를 암살하려고…….”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헌터들 중 상당수가 서민혁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
아레스를 통해 그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왜 죽여? 국제 정세 아작나게.”
“그, 그러면…….”
“잠깐 대화 좀 나눠도 될까?”
“조, 좋아.”
서민혁은 근처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치 자기 집 소파에 앉는 듯한 자연스러움이었다.
“대통령, 이대로 가면 당신은 세계의 적이 되어 버려.”
“세, 세계의 적?”
“그래, 이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야.”
대통령은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당신,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했지?”
“그, 그걸 어떻게…….”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서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심을 갖게 될 거야. 고차원 지성체의 서포트를 받으면 세상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그건…….”
“미국이나 중국을 제치고 러시아를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다… 뭐 국가 원수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꿈인데,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상태에서 그런 야망을 가지면 여러모로 안 좋아.”
그렇게 말하며 서민혁이 머리를 두들겼다.
“머리가 맛이 가거든.”
“뭐라고?”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하면 두뇌에 대미지를 받아. 정신병자가 되어 버리는 거지.”
“……!”
“성녀였던 클라우디아가 악녀로 변모한 것도 이것 때문이더라고.”
서민혁의 얘기를 듣고, 대통령은 다급히 아레스에게 확인해 보려고 했다.
“아레스! 방금 이 얘기가 사실인가? 아레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또박또박 지구의 언어로 대답해 준 아레스가, 이제는 완전히 침묵해 버렸다.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삘 받으면 핵폭탄 발사 버튼을 연타하는 인간이 될 거야.”
“그게 정말인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대통령은 다급히 생각해 봤다.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서민혁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민혁이 굳이 그런 짓을 할까?
“나를 막으려면… 지금 당장 내 목숨을 뺏으면 되지 않나? 아니면 왼팔을 잘라서 건틀릿을 뺏어 버리든가.”
“당신은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러니 말이 통할 거라 생각했지.”
“…나를 해칠 생각은 없는 건가?”
“왜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
대통령은 서민혁을 가만히 쳐다봤다.
비상보안국의 케르자코프 지국장한테서도 얘기를 들었지만, 참으로 신비한 인물이다.
“앞으로 헌터계를 기웃거리지 마. 당신 자신을 위해, 러시아를 위해, 그게 최선이야.”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일단 오늘은…….”
“아니, 됐어.”
서민혁의 말을 중간에 끊고, 대통령은 오른쪽 손으로 왼쪽 팔을 만졌다.
그러자 아레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통령은 무시했다.
“가져가.”
대통령은 건틀릿을 벗어서 서민혁한테 던졌다.
“이렇게 바로 결정해도 괜찮은 거야?”
“그래야 너한테 더 신뢰를 얻지.”
이미 대통령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여기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서 서민혁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인물이라고 서민혁한테 어필해 두는 게 더 이득이다.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마지막 칠악이 탄생하는 걸 막을 수 있었네.”
“칠악? 그게 뭐지?”
“그런 게 있어.”
“흠… 그렇군.”
아쉬움은 없었다.
아레스와 함께 세계 제패를 노리고 싶었지만, 서민혁 같은 괴물에게 찍힌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해 봤자 도노반이나 클라우디아처럼 될 뿐이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좋은 인연을 맺고 싶군.”
“나야 좋지. 우리 회사에서도 러시아에 많이 진출해 있는 상태고 말이야.”
“그래, 그랬었지.”
서민혁이 부대표를 맡고 있는 CS컴퍼니는 현재 세계 여러 국가에 진출해 있다.
현지 헌터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고난이도 퀘스트 등을 도맡아서 클리어해주는 전문 해결사로서 이름을 날리는 한편, 무한서고에서 나오는 다양한 희귀 재료들을 좋은 조건으로 거래해 주는 중개업자로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서민혁… 요새 공개적인 활동이 없다고 들었는데, 설마 요즘은 이런 활동을 하고 있던 건가?”
CS컴퍼니의 활발한 활동과는 달리, 요새 서민혁은 별로 눈에 띄는 활동이 없다고 한다.
무한서고 공략에도 거의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여기저기 불쑥 나타나서 세계의 기강을 잡는 게 주활동인 모양이지?”
“그럴 리가. 요새는 주로 연구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어.”
“작업? 뭘 하고 있지?”
“음…….”
서민혁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사실 사전을 만들고 있어서 말이야.”
“사전?”
“그래, 사전.”
“자, 잠깐, 설마…….”
대통령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설마… 마도 언어 사전인가?”
* * *
원래 서민혁은 김민철 교수가 마도 언어를 자력으로 해석해 주는 걸 기대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단, 마법이 너무 세상에 알려져 버렸어.’
세상 사람들은 서민혁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쓸 수 있는 헌터라는 걸 알고 있다.
혼자서 마법을 독점하지 말고 마법을 공유해 달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가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마법이 필요해.’
서민혁은 진짜 무한서고에 들어가면서 마법 문명이 여러 평행 세계에 무한서고를 보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세계에 자기들 마법을 전수해 주려던 게 아니었다.
마법을 통해 인류 문명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 언젠가 찾아올 멸망의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무한서고를 보낸 것이다.
‘무한서고의 중앙 관리 시스템인 에누마도 내 생각에 동조해 주고 있고… 이대로 진행하면 돼.’
문제는 세상에 마도 언어가 알려져 사람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사회에 큰 변화가 발생할 것이라는 점이다.
긍정적인 변화도 많겠지만 부정적인 변화도 많을 것이다.
특히… 마법을 악용하는 헌터들이 나오는 게 문제다.
‘인류가 올바르게 마법을 활용할 수 있도록 내가 감시자가 되어야 해.’
무한서고의 무기는 무한서고 바깥에서 마음대로 쓸 수 없다.
하지만 마법은 무한서고 바깥에서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이 전파되면 마법의 힘으로 나쁜 짓을 하려는 놈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런 자들을 막고, 인류 문명을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거야말로… 서민혁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규격 외의 헌터, EX급 헌터로서.
“아, 서민혁 씨.”
“교수님.”
연구실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서민혁은 김민철 교수가 다가오는 걸 보고 인사를 했다.
“아이고,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
김민철의 환대를 받으며 서민혁은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서민혁 씨, 오늘은…….”
“카발라 진리어의 문법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최근 서민혁은 김민철과 함께 카발라 진리어의 해독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사실 서민혁이 마도 언어를 직독직해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마도 언어에 적용되어 있는 여러 가지 문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세상에 마도 언어의 해석법을 퍼뜨리기 위해서는, 남들이 봐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으로 문법을 정리해 놔야 했다.
“이 부분에는 정말로 교수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0년 넘게 공부한 학자처럼 식견이 높으신데요.”
“아닙니다. 교수님의 발상력에는 한참 못 미칩니다.”
김민철과 대화를 나누면서 서민혁은 미소를 지었다.
“카발라 진리어의 해석법, 연내에 공표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서민혁 씨의 힘이 있으면 가능할 겁니다.”
김민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민혁 씨, 함께 마도 해석학을 발전시킵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수님.”
커피 냄새가 나는 연구실에서 서민혁은 김민철과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