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결판을 내자 (2)
화룡이 된 샐러맨더.
바람의 여신이 된 실프.
정령왕으로 진화한 두 정령들의 공격에, 포보스의 분신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수고했어.”
서민혁이 말을 건네자 샐러맨더도 실프도 ‘잘 했죠?’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공중에서 춤을 췄다.
거대해지고 힘도 강해졌지만, 하는 짓은 예전하고 비슷했다.
“민혁아!”
그때 조성조가 달려 왔다.
샐러맨더와 실프의 공격을 보고 돌아온 것이다.
“너 지금까지 무슨…….”
“미안, 잠시만.”
서민혁은 조성조를 뒤따라오던 어머니와 동생에게 다가갔다.
“민혁아, 몸은 괜찮니?”
“네,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오, 오빠, 저 드래곤하고 천사는 뭐야? 오빠가 소환한 소환수 같은 거야?”
“비슷한 거야.”
가족들이 건강한 걸 확인하고, 서민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은하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있으세요.”
“그래도 될까?”
“오빠, 지금 다들 피난하고 있는데…….”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서민혁이 손을 치켜들자 지금 공중에 떠 있는 샐러맨더와 실프 외에도 다른 정령들이 출현했다.
“너희들, 이 사람들 지켜. 할 수 있지?”
노움, 운디네 등이 서민혁의 지시에 한쪽 팔을 치켜들고 호응했다.
“이제 여기까지 놈들이 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일단 얘들이 있으면 안심할 수 있을 거예요.”
“그, 그래, 알았다.”
“우와, 신기하다…….”
가족들을 아파트로 들여보낸 뒤, 서민혁은 조성조를 쳐다봤다.
“우리 가족들, 네가 챙겨준 거야?”
“나뿐만이 아니야.”
“뭐?”
“모하메드도 네 가족들을 지켜 주려 했어.”
“…….”
서민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모하메드와는 여러 번 충돌했지만, 그 이전에는 아군으로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모하메드가 봐주지 않았으면 서민혁은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하메드에게는 빚이 많다.
‘포보스를 쓰러뜨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모하메드의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서민혁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성조야, 지금 상황은 어떻지?”
“광화문에 포보스가 몬스터들을 모아놓고 진을 치고 있어. 이제 곧 본격적으로 한국을 유린할 거야.”
“어서 가야겠네. 가자.”
“어떻게… 으악!”
서민혁은 조성조의 팔을 붙잡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화룡 형태의 샐러맨더 위에 올라탔다.
“앗 뜨거!”
“아, 미안.”
서민혁은 조성조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했다.
“열기 내성.”
“웃……?!”
조성조가 흠칫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뜨거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시원해지니 당혹스러울 것이다.
“지, 지금 나한테 마법 쓴 거야?”
“그래, 맞아.”
“지금까지는 그렇게 못 했잖아?”
생체마법은 서민혁 본인한테만 적용시킬 수 있었다.
“이제는 가능해.”
“뭐?”
“생체마법 9레벨이 되었거든.”
정령마법 9레벨이 되면서 서민혁은 정령들을 정령왕으로 진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생체마법 9레벨이 되면서… 그동안 자기 자신한테만 쓸 수 있었던 생체마법을 타인에게도 걸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설명은 나중에 하자.”
“자, 잠깐, 웃……!”
샐러맨더가 본격적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실프는 그 앞을 날아가면서 샐러맨더의 공기 저항을 줄여 줬다.
목적지는 포보스가 진을 치고 있다는 광화문.
드디어 놈과의 결전을 치를 때가 되었다.
* * *
“후우…….”
물이 말라 버린 청계천 한복판에서, 제갈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눈앞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대오를 맞춰 서 있다.
규모로 치자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비엣스키 무한서고가 붕괴되었을 때보다 더 컸다.
게다가 그놈들이 질서 정연하게 군단을 이루고 있으니, 그야말로 세계 멸망을 알리는 악마의 군단 같았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제갈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건, 지금 등 뒤에 수많은 헌터가 있다는 점이다.
조성조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은미라 등 CS컴퍼니의 헌터들은 물론이고, 최근 길드장을 잃고 충격을 받았을 아수라 길드, 대룡방 길드, 북두성 길드 등에서도 많은 헌터가 왔다.
“자, 다들 긴장하지 말고 가자고!”
최근 S급 헌터가 되면서 새 아파트로 이사 갔다는 북두성 길드의 천지원 팀장이 주위 사람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보였다.
러시아에서 윤미래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한동안 침울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마음을 추스르고 베테랑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한국 헌터들의 저력을 보여 줄 때야! 다 같이 힘을 합쳐 싸우자고!”
“천지원 팀장, 왜 자네가 리더 역할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그래요, 당치 않죠.”
태산 길드의 강태산, 강영미 남매가 천지원에게 딴지를 걸었다.
“경력을 생각하면 갤럭티카 길드 출신의 나 강태산이 리더가 되어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때 옆에서 끼어든 목소리가 있었다.
얼굴에 화상이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였다.
“나불댈 기력이 있으면 몸이나 제대로 풀어놔.”
“사, 사마윤…….”
그는 대룡방의 부길드장이었던 S급 헌터 사마윤이었다.
예전에 업화의 단검을 들고 서민혁과 싸웠다가 결국 패배하고 구치소에 들어갔었지만, 서고관리국의 특별 조치로 오늘 풀려 나왔다.
“의욕이 넘치시네요, 사마윤 씨. 이대로 도망칠 생각은 없으신가 보죠?”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윤혜원.”
크루세이더 길드의 공략2팀 팀장이었던 윤혜원.
그녀도 서민혁에게 패배한 뒤 구치소에 들어가 있었지만, 이번에 사마윤과 함께 전장에 나왔다.
“김진우가 그 꼴이 된 뒤 완전히 자포자기하고 폐인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멀쩡해 보이는군.”
“…이상하게도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윤혜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헌터 일은 영원히 안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바깥에서 큰 일이 났으니 헌터로서 싸워 달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나가서 싸우고 싶어지더라고요.”
“결국 우리는 뼛속까지 헌터라는 얘기지. 게다가…….”
사마윤이 몬스터들 쪽으로 시선을 향하며 말했다.
“황충평이나 김진우 몫까지 해야지. 우리들이 말이야.”
“…그렇겠네요.”
예전에 충성을 바쳤던 길드장들을 떠올리면서, 사마윤과 윤혜원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슬슬 시간입니다.”
제갈환이 시계를 확인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러분, 소집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정말로… 이 나라의 영웅들입니다.”
지금 주위에는 헌터들뿐만 아니라 군대 및 경찰들도 있다.
제갈환에게 그들에 대한 지휘권은 없지만, 제갈환은 그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놈들이 어떤 전략으로 나올지는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무한서고 안에서 쌓은 실력과 경험을 활용해… 맞서 싸웁시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솔직히 심각하게 불리한 상황이긴 했다.
무한서고 바깥에서는 SS랭크 미만의 무기는 공격력 수치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무장면에서도 빈약하고, 상대편에는 포보스라는 정체불명의 괴인까지 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포보스는 저한테 맡겨 주시죠.”
이런 상황이기에, 제갈환은 더더욱 스스로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제갈환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민혁에게 빌린 SS랭크 무기까지 있었다.
예전에 모하메드 하산이 썼다던 ‘몬수의 코피스’다.
“그러면 여러분…….”
포보스가 처음에 언급한 시간까지 3분 남았다.
제갈환은 무기를 든 손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다들 이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목숨은 안 걸으셔도 괜찮습니다, 부국장님.”
“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제갈환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했다.
거대한 붉은 용을 타고… 서민혁과 조성조가 접근하고 있었다.
“서, 서민혁 헌터……!”
“서민혁? 지금 서민혁이라고 했어?”
“서민혁이 돌아왔다고?!”
다들 서민혁의 귀환에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곧바로 청계천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서민혁! 이제 오면 어떻게 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
“젠장, 우리는 살았어! 살았다고!!”
절대적인 믿음.
이미 한국 헌터들은 서민혁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커다란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서민혁이라면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동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정도로 환호하고 열광하는 것이다.
“저 자식… 일부러 지금 나타난 거 아니야?”
“그러게요. 연출에 잔머리 쓴 것 같아요.”
서민혁과 적대했던 사마윤과 윤혜원조차 화룡을 타고 나타난 서민혁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민혁 헌터, 지금까지 대체 어디에…….”
“어쩌다 보니 우주 멀리 날아가 버려서 말입니다.”
“우, 우주 멀리요?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서민혁은 고개를 돌렸다.
저쪽 광화문 방면에서, 어느새 몬스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슬슬 전투가 시작될 것 같으니까요.”
“그, 그렇군요.”
“부국장님, 아니, 한국 헌터 여러분.”
서민혁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적은 매우 강대합니다. 몬스터의 숫자가 많고, 포보스라는 거물도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여러분들 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겁니다.”
“겁주지 마, 서민혁! 네가 있으면 괜찮을 거야!”
“천 팀장님, 제가 참전해도 사상자가 많이 나올 거라는 얘기입니다.”
“윽…….”
천지원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신음소리를 냈다.
서민혁이 나타났으니 이제 안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민혁 입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올 거라는 애기가 나오다니…….
“그러니 여러분.”
서민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께 버프 좀 걸어 드리겠습니다.”
“뭐?”
“버프?”
“서민혁 헌터, 지금 뭐라고…….”
당황해하는 헌터들 앞에서, 서민혁이 팔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그 손에는 마법사 지팡이 같은 게 들려 있었다.
“근력 강화, 체력 강화, 민첩 강화, 감각 강화.”
그 순간.
청계천에 모여 있던 모든 헌터들에게 신비한 힘이 깃들었다.
“뭐, 뭐야?”
“이건… 설마?!”
“히, 힘이 강해졌어!”
다들 육체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걸 알고 눈을 크게 떴다.
“생체마법 중에서 여러분들 전원의 능력을 전체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강화 마법을 걸어드렸습니다. 이 정도면 놈들과 싸우기에 충분할 겁니다.”
“서민혁 헌터, 언제부터 이런 힘을…….”
“우주 멀리서 배워 왔습니다.”
“지,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제갈환은 당혹스러워 하면서 서민혁에게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조성조가 쓴웃음을 지으며 제갈환의 어깨를 붙잡았다.
“따지고 들어봤자 소용없어. 서민혁은 원래 우리들 상식을 초월한 놈이잖아.”
“조성조 씨…….”
“그냥 우리는 서민혁 보조나 해 주자고. 지금 한국에서 서민혁을 가장 잘 보좌해 줄 수 있는 게 우리잖아?”
“…알겠습니다.”
제갈환과 조성조는 서민혁 등 뒤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옛날에는 그냥 기대되는 유망주였던 남자가 지금은 누구보다 듬직한 등을 가진 남자로 성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여러분…….”
서민혁이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전투 시작입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불꽃이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폭풍까지 휘몰아쳤다.
이쪽으로 몰려들던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몰살당했고, 그 사이로 서민혁이 뛰어 들어갔다.
“서민혁을 따르라!”
누군가가 기세 좋게 소리치자 다른 헌터들도 우르르 돌격했다.
그동안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체감과 함께, 한국의 운명을 건 결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