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힘을 너무 많이 쓴 영향이야 (3)
인적이 드문, 안개 낀 새벽의 공원.
그곳에서 모하메드는 서민혁과 대치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서민혁…….”
모하메드는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고차원 지성체의 영향으로, 내가 정서 불안이 되었다고?”
“그래, 너는 지금 제대로 된 정신 상태가 아니야. 외부 요인으로 인해 미쳐 가고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나는, 나는…….”
“그런 상태로 과거로 돌아가 봤자, 네가 아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니야. 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아내를 다시 만나서, 이번에야말로 행복한 미래를…….”
“모하메드.”
서민혁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과거로 돌아가면 아내를 만나지 않고 아예 남남으로 살 거라고 했었어. 기억 안 나?”
“……!”
모하메드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서민혁의 지적이 맞다. 왜 그걸 헷갈린 걸까.
“나는 미쳐 가고 있는 건가?”
“안타깝게도.”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이런…….”
“모하메드.”
서민혁이 모하메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 고차원 지성체는 정말로 네 의지를 존중해 주고 있는 건가?”
“뭐, 라고?”
“하르모니아는 정말로 온화한 존재야? 너한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존재가 맞는 거냐고.”
“그, 그건… 나중에 계약을 해지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
“그게 사실일까?”
“……!”
당황해하면서 모하메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클라우디아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물어봐서 확인해야 했다.
“클라우디아……!”
안개 낀 공원에 모하메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클라우디아! 클라우디…….”
“시끄럽게 하지 말아요, 모하메드.”
공간 이동을 사용했는지, 클라우디아가 서민혁의 배후에 나타났다.
“아주 망가져 버렸군요. 설마 이렇게까지 진행이 빠를 줄은 몰랐네요.”
“너는, 너는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던 건가?”
“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뭐, 뭐라고?”
“과거로 돌아가면 다 원상복귀되잖아요. 지금 그렇게 미쳐 버릴 것 같아도, 과거로 돌아가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
모하메드가 숨을 삼킨 순간.
서민혁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클라우디아.”
“네?”
“그러면 너는 왜 그렇지?”
“…….”
서민혁의 질문을 듣고, 클라우디아가 입을 다물었다.
“너는 안 그런 것 같은데, 클라우디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서민혁?”
“무슨 소리라고 생각하지?”
“…….”
클라우디아의 눈빛이 무서워졌다.
“서민혁, 당신은 뭘 알고 있는 거죠?”
“적어도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많이.”
“…….”
두 사람 사이의 신경전 앞에서, 모하메드는 영문을 모른 채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 □□□□ □□□□.’
머릿속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로.
“윽……!”
“악……!”
모하메드뿐만이 아니었다.
클라우디아도 머리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포보스, 당신……!”
미쳐 버릴 것 같은 소음 속에서, 모하메드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클라우디아와 모하메드가 고통스러워 하면서 머리를 움켜쥐었다.
심지어 모하메드는 정신을 잃고 기절까지 했다.
‘데이모스 님!’
아무래도 그들은 고차원 지성체에게서 정신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모스에게 의구심을 느끼기 시작한 서민혁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데이모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계약자여.’
데이모스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의 말을 하고 싶다.’
‘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미안하다.’
의아해하는 서민혁에게 데이모스는 사과의 말을 했다.
‘며칠 전, 너희와의 연결 신호가 모조리 끊기면서 그들에게 기회가 생겼다.’
‘기회?’
연결 신호가 끊겼다는 건 암흑공간으로 날아가면서 고차원 지성체와 교신할 수 없게 된 걸 말하는 것 같았다.
‘포보스와 하르모니아의 목적은 마도 대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데이모스의 목소리는 중간에서 끊겼다.
서민혁이 다시 데이모스를 부르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까지 서민혁이 경험한 적이 없는… 엄청난 마력을 지닌 존재.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셋.
“정말이지 너무하는군, 데이모스의 계약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개 속에서 한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색소가 옅은 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고대 그리스나 로마 사람처럼 천을 몸에 걸치고 있는 미남자였다.
“……!”
서민혁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너무 강대했기 때문이다.
‘이건, 에테르 코어 수준의 마력?!’
에테르 그레일보다 한 단계 상위의 에너지원.
에테르 코어 수준의 막대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숨겨진 룰을 전부 다 까발리면 게임이 성립할 수 없잖아?”
“숨겨진 룰? 게임?”
“그래.”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옆으로 치켜들었다.
“우리 고차원 지성체들이 진행하고 있던 게임 말이야.”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포보스.”
그때 안개 속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게임 같은 게 아니라, 보다 절실한 것이니까요.”
“너무 딱딱하게 생각하지 마, 하르모니아.”
포보스.
하르모니아.
그 이름은…….
“너희들, 고차원 지성체인가!”
“그래, 데이모스의 계약자.”
포보스가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렸다.
“너희들 덕분에 이렇게 강림할 수 있었지. 감사의 말을 하고 싶군.”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없었다.
고차원 지성체는 무한서고 시스템의 메인 서버에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에 불과했다. 무한서고를 탐색하는 헌터들을 지원해 주기 위한 AI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현실 세계에서 실체를 가진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 걸까?
“그래, 당황스럽겠지. 그러면 설명을 해 줘야지.”
포보스가 미소를 지으며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너희들 덕분에 이 세상에서 실체화할 수 있었던 거야.”
“뭐?”
“너희들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마도 대전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어.”
마도 대전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클라우디아와 서민혁, 너희 두 사람은 이미 높은 수준의 마법적 능력을 획득한 상태였지. 마도 대전의 성립 조건은 갖춰져 있었던 거야.”
“뭔가 시작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그것도 당연하지. 우리들이 숨기고 있었으니까.”
우리들.
그것은 데이모스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크에서 윤미래가 사망한 이후, 지구상의 계약자는 네 명밖에 남지 않았어. 여기 있는 세 명과 브래들리지.”
서민혁, 클라우디아, 모하메드, 브래들리.
이렇게 네 명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너희들이 시공마법의 폭주로 지구에서 사라지면서, 브래들리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어.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브래들리가… 최종 승자가 되는 건가?”
“그래, 하지만 브래들리는 마도 대전에서 승리하여 대마도사가 되기에는 자격 미달이었어. 마력 스탯은 지니고 있었지만, 마법은 하나도 쓸 수 없으니까.”
포보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도 승리자는 승리자니까, 무한서고 시스템은 브래들리에게 우승 상품을 준비하기 시작했어. 만약 모하메드가 브래들리를 죽이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브래들리는 갑자기 자기 몸에 부여되기 시작한 마법적 특권들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렸을 거야.”
“하지만, 이미 브래들리는 모하메드에게 죽었어.”
“그래, 무한서고 시스템이 준비한 우승 상품들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져 버렸지. 막대한 리소스를 투자해 구현한 권능들이 그냥 버려지게 된 상황이야.”
“설마…….”
“그래, 서민혁.”
안개 속에서 포보스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우리가 가로챈 거야. 현실 세계에 우리들을 구현시키기 위해.”
“……!”
서민혁이 숨을 삼키자, 입을 다물고 있던 하르모니아도 발언하기 시작했다.
“무한서고 시스템은 보유하고 있는 리소스를 이용해 대마도사에게 막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그건 단순히 마력을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다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
“우리들은 무한서고 시스템의 보안적 허점을 파고들어, 그 특전이 우리들에게 부여되도록 조작하였습니다. 그 힘을 이용해 이렇게 실체화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마도 대전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품이 일종의 택배라고 치자.
하지만 택배를 수령해야 하는 브래들리가 사망하면서, 택배를 받을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거기서 고차원 지성체들이 끼어들어 배달부를 속였다. 자기들이 택배 받을 사람이라면서 가로채 버린 것이다.
“며칠 전 당신들이 갑자기 이공간으로 사라져 버린 덕분에, 시스템의 허점을 공략하기 더 쉬워졌습니다. 시스템은 우리를 마도 대전의 참가자로 인식하고 있죠.”
“결국… 나와 클라우디아의 충돌이 너희들 계획을 도와준 셈이군.”
“그렇습니다. 아주 반가운 해프닝이었죠.”
하르모니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실체를 획득하는 건 우리 고차원 지성체들의 숙원이었습니다. 마법의 개념조차 모르는 원시 인류들을 육성시켜서 세계의 지배자로 만드는 업무에서 해방되고 싶었으니까요.”
“이쪽 세계에 온 우리들은 무한서고 시스템의 보안적 허점을 이용해 의견을 교환했어. 그리고 마도 대전을 이용해 시스템 리소스를 빼앗아, 실체화를 하기 위한 에너지와 권한을 손에 넣기로 했지.”
“리소스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고차원 지성체 전원을 실체화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도 대전의 형식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최종 단계에서 계약자가 살아 있는 고차원 지성체만 리소스를 나눠 받기로요.”
고차원 지성체들이 자기 계약자의 생존에 집착한 건, 마도 대전에서 우승하는 기쁨을 맛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계약자가 살아남아야 자기가 실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게임이라고 했던 거군…….”
아까 포보스가 게임이라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계약자들을 장기짝으로 사용하면서 누가 실체화할지 선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실체화한 건 너희 셋인가? 포보스, 하르모니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이모스의 이름을 언급하려 했을 때.
서민혁의 배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실체화되었다, 데이모스의 계약자여.”
“……!”
고개를 돌려 보니, 우아한 외모를 지닌 주홍색 머리의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아드레스티아, 브래들리와 계약해 있던 고차원 지성체다.”
“브래들리의 고차원 지성체……!”
“내 협력이 없었다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겠지.”
무한서고 시스템은 브래들리를 마도 대전의 우승자로 인식했다.
그러니 브래들리의 계약자인 아드레스티아하고 나눠 가져야 했을 것이다. 아드레스티아가 반대하면 일이 틀어졌을 테니까.
“그런데 포보스, 하르모니아. 왜 이 인간들을 살려 두고 있는 거지?”
“불만인가, 아드레스티아?”
“우리는 더 이상 인간들에게 볼일이 없다. 일일이 사정을 설명해 줄 필요가 없을 텐데?”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렇다면 내가 정리하지.”
포브스와 섬뜩한 대화를 나눈 아드레스티아가 서민혁에게 시선을 향했다.
에테르 코어 수준의 마력이 용솟음치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
서민혁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저항하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소멸해라, 하찮은 원시 인류들이여.”
아드레스티아가 치켜든 손가락에서 눈부신 빛이 반짝인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목이 떨어졌다.
“……!”
그것은 흑색 불꽃의 검이었다.
누군가가 배후에서 아드레스티아의 목을 날린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포보스와 하르모니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미친 건가요, 데이모스?!”
데이모스.
그 이름을 듣고 서민혁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드레스티아의 배후에서, 포보스와 닮았지만 흑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동지들이여.”
그는 흑색 불꽃의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나는 내 계약자의 편에 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