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헌터가 된 해석학자-176화 (176/200)

176화 마침내 어깨를 나란히 하고 (4)

러시아에서 ‘소비엣스키 무한서고’라는 이름을 붙여준 무한서고는 최소 20년 이상 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경과와 함께 다양한 몬스터, 퀘스트가 추가로 출현하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아크 데몬 ‘콘데라치오’가 이끄는 데몬 군단도 10년 이상 경과한 시점에서 출현하도록 되어 있는 ‘콘텐츠’로, 그 이전에는 지하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외부와 접촉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소비엣스키 무한서고에서 데몬 군단과 접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군.”

콘데라치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분명 우리는 지하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모든 게 이상해져 버렸어.”

주위에 펼쳐져 있는 건 눈 덮인 황야, 그리고 수많은 몬스터다.

몬스터들은 다들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었다.

일반 몬스터들보다 지능이 높은 데몬들도 마찬가지 상태였다.

아크 데몬인 콘데라치오는 비교적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데몬들은 상위 개체들조차 입에 거품을 물고 날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저 멀리 보이는 인간들의 도시.

그곳으로 돌격하는 수밖에 없다.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인간들을 죽이려는 건 데몬들의 본능이니까.

“가자!”

콘데라치오가 목소리를 높이며 앞서나가자, 다른 데몬들도 일제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살육을!”

“파괴를!”

“혼돈을!”

광기로 가득 찬 목소리를 내면서, 데몬 군단이 전진을 시작했다.

* * *

“다들 괜찮으십니까?”

“중상자 없습니다! 계속 전투 가능합니다!”

뒤에서 들려온 대답을 들으며, 제갈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제갈환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한국 헌터들을 이끌고 몬스터들과 교전 중이었다. 황충평과 허태웅, 윤미래 등 한국 주요 길드의 길드장들도 제갈환을 도와주고 있었다.

서민혁과 CS컴퍼니가 외곽에서 쳐들어오는 몬스터들을 막고, 이미 시내에 들어온 몬스터들은 제갈환과 길드장들이 해치운다는 작전이었다.

“바깥에서 다른 몬스터들이 별로 안 들어와서 그나마 할 만하군요.”

“서민혁과 조성조가 잘 막아 주고 있는 모양이야.”

황충평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러시아 헌터들도 저쪽에서 잘 싸워주고 있고, 시내의 몬스터들은 충분히 소탕할 수 있겠어.”

“네, 바깥에서 몬스터들이 더 들어오지 않는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서민혁한테 빌린 SS랭크 무기를 잘 써먹야겠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갑자기 제갈환은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제갈환이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자, 북두성 길드의 윤미래가 다가왔다.

“부국장님! 부국장님도 느끼신 건가요?”

“윤 길드장님도 느끼셨습니까?”

“뭔가 위험한 게 나타난 것 같아요!”

막연하게 느껴지는 거긴 하지만, 거리가 꽤 멀다.

아무래도 서민혁과 조성조가 있는 위치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하죠?”

“…서민혁 씨와 조성조 씨가 잘 막아 줄 겁니다.”

제갈환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서 황충평이 입을 열었다.

“걱정되면 가 봐.”

“네?”

“여기는 우리들한테 맡기고, 가 보라고.”

황충평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나하고 허태웅, 윤미래만으로 충분해.”

“하지만, 황 길드장님…….”

“서민혁과 조성조한테서 무슨 일이 생겨서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거야말로 문제야. 빨리 가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확인해 보고, 필요하면 도와줘.”

“…….”

제갈환은 잠시 갈등했다.

서고관리국 부국장인 제갈환은 지금 여기 있는 헌터들을 총지휘하는 입장이다.

이곳을 비워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봐, 제갈환 부국장.”

황충평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우리가 어린애인 줄 아나? 자네 없이도 잘할 수 있으니까, 빨리 가 봐.”

“…알겠습니다.”

윤미래와 허태웅도 어서 가 보라고 눈짓을 했기 때문에, 결국 제갈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최근 많이 오른 민첩과 근력 스탯을 최대한 활용해,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으로 향했다.

* * *

어느새 서민혁이 지배하는 시체병의 숫자는 천 마리를 넘어섰다.

드래곤 등 강력한 개체도 시체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군단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야, 민혁아.”

“뭔데.”

“너 말이야. 이 좀비 군단들의 힘을 이용하면… 세계 정복도 가능한 거 아니야?”

조성조의 지적을 받고, 서민혁은 잠시 생각했다.

“글쎄, 어렵지 않을까.”

“그런가?”

“핵폭탄 하나 떨어뜨리면 다 몰살당할 텐데.”

“너라면 핵폭탄 떨어지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폭발하기 전에 핵폭탄을 소멸시킨다든가 해서.”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 조성조의 말이 아주 허황된 건 아니었다.

지금 이곳은 무한서고 내부가 아니다. 무한서고 바깥에서 천 마리가 넘는 시체병을 거느리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좀비 군단을 이끌고 쳐들어가면 작은 나라 하나쯤은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야, 심각한 표정 짓지 마. 네가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믿어 줘서 고맙다.”

“이런 힘이 김진우나 도노반, 클라우디아 놈들이 아니라 서민혁이라는 놈한테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슬슬 가까이 왔군.”

“그래.”

아까 전부터 느껴지던 불길한 기운.

그것은 엄청난 숫자의 데몬 군단이었다.

마력 기관을 지닌 서민혁뿐만 아니라 조성조도 느끼고 있는 걸 보면 상당히 강력한 개체가 있는 것 같았다.

“성조야, 일단…….”

“걱정하지 마.”

서민혁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조성조가 말했다.

“나도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

“…….”

“네 발목을 잡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을 듣고, 서민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성조가 저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럼 가자.”

“그래!”

서민혁은 먼저 드래곤 좀비를 돌격시켰다.

드래곤 좀비가 쿵쿵 소리를 내면서 잔챙이 몬스터들을 짓밟고 전진했다.

그리고 데몬들을 향해 커다란 턱을 벌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크아아!”

데몬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서민혁은 실프의 힘을 빌려 날아올랐다.

그리고 데몬 군단을 향해 샐러맨더의 불꽃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카악!”

“커어억!”

아우성치는 데몬들을 향해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고 있을 때, 갑자기 지상에서 투창이 날아왔다.

“……!”

서민혁은 다급히 피하면서 지상을 관찰했다.

상위 등급의 데몬인 ‘데몬 도미네이터’가 부하들과 함께 창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여기서 날아다니고 있으면 표적이 되겠군.’

지상으로 내려오자 놈들이 마치 역사 속 창병들처럼 대형을 짜서 덤벼드는 모습이 보였다.

가뜩이나 육체 능력이 뛰어난 데몬들이 저러니 꽤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서민혁은 백강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온몸을 강화시키면서 간장과 막야를 뽑아 들었다.

“살육을!”

“파괴를!”

“혼돈을!”

자기들 언어로 떠들면서 달려드는 데몬들을 향해 돌격했다.

그리고 놈들의 창끝을 ‘밟고’ 뛰어올라 그들의 목덜미에 칼을 꽂아 넣었다.

“커억!”

몇 마리 해치운 뒤, 전자마법을 활용해 간장과 막야를 좌우로 날렸다.

이기어검술처럼 날아다니는 간장과 막야에게 잔챙이들을 맡긴 뒤, 엑스칼리버를 들고 데몬 도미네이터에게 달려들었다.

“인간……!”

데몬 도미네이터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눈이 시뻘게진 채 이쪽으로 마구 창질을 해 댔지만, 서민혁의 힘이 더 강했다.

‘괴력 구현!’

콰직!

엑스칼리버가 창을 부수고, 데몬 도미네이터의 목을 날려 버렸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살아남은 데몬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서민혁!”

그때 조성조가 아론다이트로 한 무리의 데몬들을 동시에 날려 버리며 소리쳤다.

“저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넌 저쪽을 맡아! 나는 여기 잔챙이들을 맡을 테니까!”

서민혁은 잠시 주저했다.

조성조는 이미 체력이 꽤 소모된 상태다. 내버려 두고 혼자 간다고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서……!”

“하지만…….”

“아 진짜, 걱정도 많네!”

조성조가 빽 소리를 질렀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SS랭크 무기가 조성조의 배후를 노리던 데몬의 머리통에 박혔다.

“왜 티격태격하고 있는 겁니까?”

“제갈환……!”

제갈환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부국장님, 어떻게 여기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서 와 봤습니다. 역시 데몬들이었군요.”

그렇게 말하며 제갈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내는 다른 헌터들한테 맡기고 왔습니다. 저도 여기서… 앗.”

“서민혁, 여기는 나랑 제갈환한테 맡기고 먼저 가 봐! 이러면 안심이지?”

조성조가 제갈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소리쳤다.

요즘 제갈환도 예전 같은 날카로움을 회복했다고 하고, 제갈환이 함께 있으면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서민혁한테 SS랭크 무기도 빌린 상태니까.

“알겠어. 조심해.”

“그래, 다녀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싸우면 되는 겁니까?”

조성조와 제갈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을 확인하고, 서민혁은 바로 몸을 날렸다.

‘저쪽이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강렬한 기운의 정체.

그것은 데몬들의 우두머리인 아크 데몬이었다.

지난번에도 아크 데몬과 싸워 본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느껴지는 기운이 훨씬 강했다.

거의… 두 배 정도였다.

“왔느냐, 인간이여.”

“……!”

그리고 서민혁은 마침내 그 아크 데몬과 마주쳤다.

그런데 이놈은 상당히 기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머리가 두 개였던 것이다.

‘머리가 두 개여서 두 배로 강하게 느껴진 건가?’

혼란에 빠진 서민혁 앞에서, 아크 데몬이 두 손을 치켜들었다.

“내 이름은 콘데라치오… 어떤 운명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너를 쓰러뜨리는 게 내가 할 일인 것 같구나.”

그렇게 말한 순간, 아크 데몬의 두 손에서 제각각 다른 마법이 생성되었다.

오른손에는 시커먼 블랙홀 같은 게 생겼다. 아무래도 암흑마법인 모양이다.

하지만 왼손에 나타난 건… 빛나는 광탄(光彈)이었다.

‘두 종류 마법을 동시에 써? 이것도 머리가 두 개여서 그런가?’

놀라워하는 서민혁 앞에서 콘데라치오가 포효했다.

“운명에 몸을 맡겨라, 인간이여! 내가 친히… 으윽!”

하지만 콘데라치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신속 구현 마법에 실프의 바람까지 더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서민혁이 콘데라치오의 오른손을 절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네놈……!”

“말이 많아.”

서민혁은 냉정하게 내뱉었다.

“얌전히 나한테 사냥 당하기나 해.”

* * *

“후우…….”

직접 만든 활력 회복 포션을 먹으면서 윤미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꽤나 피곤했다. 러시아에 도착한 이후 별다른 휴식 없이 반나절 이상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미래 입장에서는 보람찬 일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이기는 하지만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으니까.

‘□□□□□□ □□□□□□.’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새는 별로 들리지 않았던, 고차원 지성체의 목소리였다.

예전에는 이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름 끼쳐서 미쳐 버릴 것 같았지만, 이제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서민혁이 자세한 설명을 해 주면서 안심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저는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떠들어도 소용없어요.’

‘□□□□□□ □□□□ □□□□!’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다급했던 것이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 □□□□□□!’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을 때.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윤미래 씨.”

“……!”

다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 윤미래의 눈에 들어온 건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백인 여성이었다.

“당신, 클라우디아……!”

윤미래의 목소리를 듣고, 주위에 있던 황충평과 허태웅도 이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클라우디아라고?!”

“어째서 그 여자가 여기에……!”

“다, 당신, 여기는 왜 나타난 거죠?”

“후후후…….”

클라우디아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미소 지었다.

“저는 헌터예요. 몬스터들에 의해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죠.”

“네? 그, 그러면 원군으로……?”

“그래요, 윤미래 씨.”

당황해하는 윤미래 앞에서, 클라우디아가 악수를 청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저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가 있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힘을 합치도록 해요.”

“앗, 네…….”

얼떨결에 윤미래도 손을 내밀어 클라우디아와 악수를 했다.

그리고 바로 직후.

“어떻게 이런 얘기를 믿죠?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네요.”

“……!”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윤미래의 목을 찔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