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누가 건방지게 구는 겁니까 (2)
니스.
프랑스의 남해안에 위치한 대도시로, 대표적인 휴양도시이기도 하다.
가장 사람이 몰리는 건 역시 여름철이지만, 연중 온난한 기후가 유지되기 때문에 겨울에도 관광객이 꽤 있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SS급 헌터 곤살레스는 그런 관광객들 사이에 섞여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롭군요.’
정신없이 바빴던 미국 생활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천국 같다.
곤살레스는 한동안 이렇게 느긋한 하루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오겠죠.’
그동안 곤살레스는 미스터 도노반의 동지로서 활동해 왔다.
케빈 레이 한센을 섭외하여 한국으로 보내기도 했고, 도노반을 막기 위해 미국으로 들어오는 세계 각국의 헌터들을 막아 내기도 했다.
이건 모두 도노반의 계획이 성공했을 때 유럽의 지배권을 넘겨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노반은 계획을 진행하는 도중에 서민혁한테 쓰러졌다. 그 소식을 미국 정부보다 빨리 파악한 곤살레스는 전용기를 사용해 재빨리 미국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거쳐 신분 세탁을 한 뒤 이곳 프랑스 니스에 도달한 것이다.
‘도노반의 계획이 실패한 게 아쉽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죠.’
도노반은 세계적인 영웅에서 희대의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당연히 곤살레스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고, 조국인 스페인에도 돌아가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곤살레스는 별로 낙담하지 않았다. 과거의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돈이야 여기저기 비밀 계좌에 많이 남아 있고.’
이대로 곤살레스는 한동안 몸을 숨긴 채 유유자적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자연적으로’ 브레이크 현상이 자주 발생하게 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러면 세계 각지에서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할 테고, 그 혼란을 이용해 복귀하면 된다.
민간인들을 구해 주면서 이미지 세탁을 해 주면 금방 다시 영웅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다.
‘그때 가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평화적으로 유럽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고 말이죠.’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곤살레스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건틀릿 갱신을 위해 몇 달에 한 번씩은 무한서고에 들어가야 하지만 말이다.
‘상대적으로 관리가 허술한 아프리카 쪽에서 들어가면 되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곤살레스는 시원한 탄산음료를 마셨다.
오늘 밤에는 클럽에 가서 놀아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 □□□□□.’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 같은 목소리.
1년 전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목소리를 들으며 곤살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 참 시끄럽군요.’
‘□□□□□□ □□□□□.’
‘뭘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 □□□□.’
이건 무한서고 내부의 지원 시스템인 ‘고차원 지성체’의 목소리다. 곤살레스도 미스터 도노반의 설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도노반은 자기 부하인 브래들리, 알티도어, 스튜어트에게는 이 고차원 지성체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지만, 곤살레스한테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줬다.
그렇기 때문에 곤살레스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데몬 같은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불만 있습니까? 그러면 저를 확 죽여 버리시죠.”
‘□□□□ □□□. □□□□□□ □□□□.’
‘못 하시죠? 그럴 줄 알았습니다.’
고차원 지성체 상대로도 곤살레스는 여유가 있었다.
자신을 해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구해 온 결과, 고차원 지성체는 계약자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 □□□ □□□. □□□□ □□□□.’
‘오늘따라 말이 많으시군요. 대체 왜…….’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짜증을 내면서 두 팔을 치켜들려 했을 때.
곤살레스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병이 박살 났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날아와서 음료수 병을 박살 내 버렸다.
때마침 곤살레스가 팔을 치켜들고 있는 도중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냥 팔을 내리고 있었다면…….
‘이게 대체 뭐죠?!’
곤살레스는 즉각 움직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곤살레스가 앉아 있던 의자가 박살 났다.
‘저격?!’
저격총을 이용한 저격이었다면 곤살레스의 스탯으로 충분히 감지하고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헌터도 이런 짓은 못 할 텐데…….’
오라를 사용해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브래들리도 나이프처럼 매개채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건 누가 한 짓일까.
곤살레스의 머릿속에 한 동양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 □□□ □□□ □□□□.’
고차원 지성체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설마, 곤살레스에게 경고를 해 주고 있었던 것일까.
‘서민혁이 온다고 알려 준 겁니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쓸 줄 아는 헌터.
그 남자가 곤살레스를 노리고 있었다.
* * *
“아깝네요.”
귀에 장비한 무선 이어폰에서 키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저격했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더 접근했으면 곤살레스가 눈치챘을 겁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서민혁은 몸을 일으켰다.
어깨 위에서 실프가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발생시킨 바람의 칼날이 곤살레스를 제압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는 것이다.
“상대는 SS급 헌터입니다. 간단히 잡을 수는 없겠죠.”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접근전으로 승부를 내야죠.”
미안해하는 실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서민혁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신속 구현.’
생체마법을 사용해 스피드를 끌어올린 뒤, 근처 건물 옥상으로 도약했다.
곤살레스는 추적자를 피하기 위해 번잡한 시장 안으로 도망쳤지만, 서민혁한테는 의미없는 일이었다.
‘저기 있군.’
곤살레스는 SS급 헌터였다.
게다가 마력 스탯도 보유한 것 같았다.
그렇게 존재감 있는 헌터를 서민혁이 놓칠 리가 없다.
다만 저쪽도 서민혁이 접근하는 걸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고차원 지성체의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군.’
데이모스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곤살레스에게서 은색 기운이 솟구쳤다.
‘너에게서 도망치는 게 어렵다고 느낀 모양이야.’
‘민간인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겠군요.’
놀라서 도망치는 민간인들을 헤치고, 곤살레스가 근처 건물로 뛰어들었다.
서민혁도 곤살레스를 쫓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곧바로 건물 벽이 무너져 내렸다.
“서민혁 씨!”
뒤에서 쫓아오던 키아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칼론입니다!”
무너진 벽 사이로, 완전 무장을 한 곤살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방어구뿐만 아니라 거대한 검도 장비하고 있었다.
본래 무한서고 바깥에서는 꺼내서는 안 되는 헌터용 무기였다.
‘이 건물이 숙소였군. 거기다가 무기를 숨겨 놓고 있었던 건가.’
아스칼론은 SS랭크의 무기다.
성 게오르기우스가 용을 잡을 때 썼던 검이라는 일화가 있어, 드래곤 계열의 몬스터에 특화된 검이기도 했다.
‘얼마 전 프랑스의 플라티니가 저 검에 썰려 죽었다고 했지……!’
서민혁이 경계하고 있자, 완전 무장을 한 곤살레스가 서민혁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언제 프랑스에 온 겁니까, 서민혁?”
“세 시간 전에.”
서민혁은 스페인어로 짤막하게 대답해 줬다.
“이탈리아에서 가깝더라고.”
“정말로 이탈리아에 와 있었군요. 클라우디아의 사냥개가 된 겁니까?”
곤살레스가 도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먼 유럽까지 와서 사냥개 노릇이라니, 정말 고생하시는군요.”
“너야말로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느라 고생 많겠어.”
“…그 원인을 제공한 게 서민혁 당신이었죠.”
곤살레스의 눈빛이 빛났다.
“마침 잘됐군요. 당신을 쓰러뜨리고 다시 잠적해야겠습니다.”
“가능할 것 같나?”
“후후, 서민혁.”
곤살레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도노반을 쓰러뜨렸으니, 그 도노반을 따르던 곤살레스 정도는 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 순간, 곤살레스의 몸에서 은색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저는 도노반보다 약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곤살레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초고속으로 이동하여 서민혁의 시야 바깥으로 움직인 것이다.
“김진우가 죽은 뒤, 도노반과 대등한 위치에 있던 건 저 하나뿐이었죠.”
쿠웅!
곤살레스가 휘두른 아스칼론이 서민혁을 덮쳤다.
서민혁은 백강의 기운을 끌어올려 방어했지만, 충격파에 의해 주위 건물이 다 무너져 내렸다.
“무기도 없는 당신이… 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곤살레스가 두 팔에 힘을 주면서 떠들어 댔다.
“맨손으로 나타난 당신의 실수입니다! 클라우디아에게 부탁해서 무기를 휴대하고 다닐 수 있게 허가를 받았어야죠!”
“키아라하고 비슷한 얘기를 하는군.”
“네?”
여기 오기 전에도 키아라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곤살레스가 무기를 갖고 다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무한서고에 들어가서 무기를 들고 나올 수 있게 허가를 받으라고.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맨손으로 온 거야.”
“……!”
서민혁은 백강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새하얀 오라가 온몸을 감쌌고, 그 힘을 이용해 아스칼론을 튕겨냈다.
“아니?!”
이미 철벽 구현 마법을 사용한 상태였다.
아스칼론을 사용한 곤살레스의 공격을 튕겨내면서 서민혁은 주먹을 뻗었다.
‘괴력 구현.’
퍼억!
서민혁의 주먹이 곤살레스의 얼굴에 꽂혔다.
곤살레스가 머리 전체를 보호하는 투구형 방어구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얼굴뼈가 다 분쇄되었을 것이다.
“크억!”
하지만 투구는 박살 났고, 곤살레스도 그 충격에 제 정신을 못 차렸다.
그대로 서민혁은 곤살레스의 멱살을 잡고 집어 들었다.
“커허헉!”
땅에 내리 찍힌 곤살레스에게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노반보다 약하지 않다고?”
서민혁은 냉담하게 말했다.
“글쎄,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으으윽!”
물론 서민혁이 싸웠던 도노반은 에테르 코어의 힘을 끌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평상시의 도노반과 곤살레스는 서로 비슷한 실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민혁은 일부러 곤살레스를 조롱했다.
“도노반보다 훨씬 쉬운데 말이야.”
“감히……!”
코피를 흘리면서 곤살레스가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곧바로 날아온 서민혁의 주먹을 맞고 다시금 다운되었다.
“후우…….”
숨을 고르고 있자 키아라가 인파를 헤치고 달려 왔다.
“서민혁 씨, 정말로 제압한 건가요? 그 곤살레스를, 이렇게 빨리?”
키아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곤살레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물러서요, 키아라 씨.”
“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슨…….”
서민혁은 의아해하는 키아라에게 손을 뻗었다.
“어, 어딜 만지시는…….”
“물러서라니까.”
저항하는 키아라를 옆으로 밀친 순간.
쓰러져 있던 곤살레스의 팔이 솟구쳤다.
서민혁이 밀치지 않았다면 키아라의 몸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앗……!”
당황해하는 키아라 앞에서, 데몬 같은 괴물이 된 곤살레스가 몸을 일으켰다.
주위에 있던 민간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사회 복귀에 지장이 생기는데 말이죠.”
“복귀할 생각이 있었나 보지?”
“물론입니다.”
곤살레스는 자기가 괴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비대해진 팔로 아스칼론을 다시 잡았다.
“이렇게 되면 곤살레스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사람으로서 다시 살아가는 편이 낫겠군요. 당신을 쓰러뜨린 뒤 실력 있는 성형외과 의사를 찾아가야겠습니다.”
“정형외과 의사를 찾아가야 할걸?”
차갑게 대꾸하며 서민혁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니면 장의사를 찾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