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누가 건방지게 구는 겁니까 (1)
퍼스트 클래스 탑승객을 위한 라운지에서 서민혁이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가는 거군.’
‘네, 가야죠.’
서민혁은 클라우디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조성조의 다리를 고쳐 주는 대가로, 클라우디아가 이끄는 황금 여명회에 한 달 동안 소속되기로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혁은 지금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그 여자가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존재라고 보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데이모스는 누가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존재인지 모른다.
하지만 서민혁은 미래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클라우디아가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존재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클라우디아는 마법의 존재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 여자도 마법을 쓸 줄 아는 걸까?’
‘그 부분은 모르겠습니다.’
서민혁은 클라우디아가 마도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막대한 마력이 조성조의 다리로 흘러 들어가는 것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클라우디아가 서민혁처럼 마법을 사용한 거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일부 장비들은 그 특수 효과를 발동시킬 때 마력 반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가 뭔가를 알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무슨 꿍꿍이일지 궁금하군.’
‘그 꿍꿍이를 알기 위해 유럽으로 가는 거죠.’
서민혁이 클라우디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조성조의 다리를 고쳐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클라우디아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서민혁은 유럽으로 직접 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클라우디아가 세상을 위협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조기에 막겠습니다.’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이미 서민혁은 자신이 일반적인 헌터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한서고에서 평범한 몬스터를 해치우고 평범한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일은 서민혁이 할 일이 아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게 서민혁이 할 일이었다.
‘계약자여, 만약 그 여자가 마법을 쓸 줄 알고,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한 존재라면… 너와 그 여자의 접촉이 마도 대전을 촉발시킬 수도 있다.’
‘다시 한번 확인하겠는데, 마도 대전에서 승리하면 주어지는 특전은 아직도 알 수 없는 겁니까?’
‘그렇다. 미안하게 됐다.’
시스템적인 부분이라 답변해 줄 수 없는 게 아니라… 데이모스도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무한서고 시스템의 이상으로 인해 해당 부분의 지식을 호출하는 게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마법사로서 대성하기 위한 특전일 것이다.’
‘그래야겠죠.’
그렇기 때문에 클라우디아가 일치감치 본색을 드러낸다면 서민혁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클라우디아를 쓰러뜨리고, 마도 대전 우승에 더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그러니 유럽으로 가서… 그 여자가 뭘 꾸미고 있는지 파헤쳐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해라.’
그때 안내 방송이 들렸고, 서민혁은 이제 비행기에 타야 할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조촐한 짐을 챙겨 탑승 게이트로 향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
“…….”
CS컴퍼니의 직원인 박나영이 동영상을 하나 보냈다.
화면을 터치해서 동영상을 재생시키자, 회사에 있는 서민혁용 개인 훈련실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성조야.’
조성조가 연습용 검을 들고,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기술을 펼치고 있었다.
30초 정도밖에 안 되는 영상이었지만, 그 30초 동안 조성조는 조금도 쉬지 않고 종횡무진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불가능했던 일이다.
‘힘내라.’
고작 30초 정도밖에 안 되는 영상.
하지만 그 짧은 영상이 서민혁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다음에 만날 때는, 우리 서로 한판 붙어 보자.’
재회를 다짐하면서, 서민혁은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 * *
밀라노.
이탈리아 북부 최대의 도시로, 알프스 산맥 남쪽에 펼쳐진 롬바르디아 평원에 세워져 있다.
이탈리아의 수도는 로마지만,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는 밀라노라고 할 정도로 산업 및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많이 세련된 동네군.’
이탈리아 메이커의 스포츠카 조수석에 탄 채, 서민혁은 밀라노의 거리를 감상했다.
그러자 운전석에 앉은 젊은 여성이 입을 열었다.
“밀라노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입니다. 밀라노 패션 위크도 유명하죠.”
“그래서 사람들의 패션 감각도 뛰어난 것 같군요.”
“시간이 되면 서민혁 씨의 복장도 봐 드리겠습니다.”
“…제 옷차림, 이쪽 사람들이 보기에는 촌스럽습니까?”
“네.”
“가차 없군요.”
그녀의 이름은 키아라 루치아노… 이탈리아의 S급 헌터로, 이탈리아에 도착한 서민혁을 마중 나온 인물이었다.
클라우디아의 지시를 받고 서민혁을 숙소까지 안내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키아라 씨.”
“네.”
“키아라 씨도 황금 여명회 소속입니까?”
“그럴 리가요.”
키아라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는 황금 여명회에 들어갈 실력이 못 됩니다.”
“키아라 씨도 S급 아니었습니까?”
“황금 여명회에는 S급 헌터들도 소속되어 있지만, 다들 S급 중에서도 최상위 수준에 해당되는 실력자들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키아라는 덧붙였다.
“미국 출신이었다면 다들 SS급으로 인정받았겠죠.”
“…….”
“세계헌터기구가 미국에 있기 때문에, 유럽 헌터들은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키아라는 황금 여명회의 헌터들이 브래들리나 알티도어에 뒤지지 않는 실력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미국보다 유럽에 SS급 헌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영국의 화이트, 스페인의 곤살레스, 이탈리아의 클라우디아, 스위스의 리히슈타이너… 네 명이나 있는데요. 미국은 세 명이었습니다.”
“미국은 한 나라입니다. 한 나라에서 세 명이나 SS급으로 인정받았다는 것 자체가 불공평한 겁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서민혁은 그냥 입 다물기로 했다.
이런 걸로 의논해 봤자 피곤해질 뿐이다.
“서민혁 씨가 SS급 헌터라고 해도, 다른 S급 헌터들보다 상위에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점, 잘 기억해 두셨으면 합니다.”
“딱히 SS급 헌터라고 으스댈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그리고, 특히 주의할 점은…….”
키아라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우디아 님하고 동급이라고 생각하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아서 몸을 낮추시란 말씀입니다.”
“…….”
서민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왜 대답이 없지요?”
“아니, 웃겨서요.”
“웃기다고요?!”
마침 신호등이 빨간 불이어서, 키아라가 무서운 눈으로 서민혁을 째려봤다.
“뭐가 웃긴 거죠?”
“이제 보니 클라우디아의 신봉자였군요. 아니, 광신자라고 해야 할까.”
“과, 광신자?”
“키아라 씨, 당신이 클라우디아를 공경하는 건 당신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걸 저한테 강요하지는 마세요.”
서민혁은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는 클라우디아의 부탁을 받아서 황금 여명회에 들어온 겁니다. 클라우디아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서 들어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서민혁 씨……!”
“황금 여명회의 다른 헌터들을 깔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라우디아를 우러러볼 생각은 없습니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대할 테니, 그렇게 알아 두세요.”
“그런 식으로 건방지게 나오시면……!”
“건방지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키아라에게, 서민혁은 코웃음으로 대꾸해 줬다.
“지금 누가 건방지게 구는 겁니까?”
“……!”
키아라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키아라 씨, 저는 위아래를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항상 예의는 지킬 생각입니다.”
“그, 그…….”
“하지만 상대방이 저한테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도 그에 합당한 태도를 취할 겁니다.”
서민혁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얕보이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아, 알겠…….”
“키아라 씨.”
키아라가 대답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서민혁은 키아라의 말을 끊어 버렸다.
“출발합시다. 파란불이네요.”
“앗, 네……!”
서민혁이 순간적으로 드러낸 ‘적의’에 주눅 들었기 때문일까.
키아라는 그 이후 주제넘은 말을 하지 않았다.
* * *
키아라가 안내해 준 숙소는 5성 호텔의 최고 등급 스위트룸이었다.
밀라노의 아름다운 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상당히 좋은 방이었다.
“저는 건너편 거리의 사무실에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길.”
“고맙습니다. 하지만 웬만한 건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키아라를 보낸 뒤 서민혁은 캐리어에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했던 건 가장 안쪽에 숨겨놨던 작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여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주먹만 한 구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여기다가 마력을 불어넣어 주면…….”
서민혁이 정신을 집중해서 마력을 불어넣어주자, 구슬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스르르 녹아내리더니, 도마뱀과 요정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샐러맨더와 실프였다.
“둘 다 괜찮지?”
서민혁의 질문을 듣고, 샐러맨더도 실프도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행이네.”
그동안 서민혁이 외국에 나갈 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령들을 들고 가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투명화시킬 수 있는 실프는 그렇다 쳐도, 샐러맨더를 일반 애완용 도마뱀이라고 속여서 들고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난번에 미국으로 갈 때는 모하메드가 모종의 방법으로 통과시켜 줬지만,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민혁은 각종 마도서를 연구해… 샐러맨더와 실프를 작은 구슬 형태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구슬 상태로 있는 동안 정령들은 잠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일종의 강제 동면이라고 할까.
“일단 좀 쉬고 있어. 과일 좀 사 올 테니까.”
샐러맨더도 실프도 몸이 많이 작아진 상태다.
최고 컨디션으로 회복시키려면 신선한 과일을 먹여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민혁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잘 도착했나요, 서민혁?”
전화를 받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서민혁을 이탈리아로 부른 장본인, 클라우디아였다.
“네, 지금은 호텔입니다.”
“키아라가 딱히 실례되는 짓은 하지 않았죠?”
“뭐… 딱히 없었습니다.”
“다행이네요.”
클라우디아는 키아라가 그렇게 구는 걸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도착한 첫날부터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뭡니까?”
“미국에서 행방을 감췄던 곤살레스가 프랑스 남해안에서 발견되었어요.”
“……!”
곤살레스는 스페인의 SS급 헌터다.
배서니 화이트처럼 도노반의 협력자였다. 미국에서 도노반의 미국 장악 계획을 돕고 있었는데, 도노반이 쓰러지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곤살레스는 황금 여명회의 일원이었던 플라티니를 살해한 혐의도 있어요.”
“플라티니… 프랑스를 대표하는 헌터였죠.”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곤살레스를 잡아야 해요.”
원수를 갚는다.
성녀답지 않은 말이었다.
“황금 여명회의 첫 번째 지령을 내릴게요, 서민혁.”
이런 얘기를 할 때도, 클라우디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곤살레스를 잡아 보세요. 미국을 놀라게 했던 그 실력을 유럽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