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미국이 흔들리다 (1)
“모조리 실패했군요, 미스터 도노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곤살레스의 목소리를 듣고, 도노반은 눈썹을 찌푸렸다.
“한국에서는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하지 않았고, 배서니 화이트는 서민혁한테 덤벼들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
“화이트가 증언을 하면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그녀는 브래들리와는 달리 우리 계획의 깊숙한 곳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요.”
“남 얘기가 아닐 텐데, 곤살레스.”
도노반은 계속 눈썹을 찌푸린 채 말했다.
“화이트가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너도 걸려드는 거야.”
“적어도 당신만큼 위험해지지는 않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어려울 텐데.”
“미스터 도노반, 지금 제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곤살레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레이크다운을 발생시켜 한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으로, 서민혁의 발을 묶어 두는 게 우리들 계획이었을 겁니다.”
“…….”
“이 상태에서 오퍼레이션을 개시하면, 서민혁이 미국으로 넘어올 겁니다.”
곤살레스의 말이 맞다.
이번에 한국에서 브레이크를 발생시킨 건 한동안 서민혁의 발을 묶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하면 몬스터 소탕에 시간이 걸린다. 필드 안에 갇혀 있는 몬스터를 소탕하는 것과 바깥세상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몬스터를 소탕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서민혁이라도 며칠 동안은 한국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다른 나라를 신경 쓸 수 없는 것이다.
그걸 노리고 화이트를 보내 6개 무한서고를 붕괴시켜 브레이크를 발생시킨 건데… 실패해 버렸다.
설마, 서민혁이 24시간 안에 모든 브레이크 퀘스트를 클리어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미스터 도노반, 오퍼레이션을 미루는 건 어떻겠습니까?”
“농담하지 마라.”
도노반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은 조금 수정해야겠지만, 결행한다.”
미국을 손에 넣기 위해, 세계를 손에 넣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 * *
“배서니 화이트.”
서고관리국 내부의 취조실.
구속구로 자유를 빼앗긴 화이트 앞에서 서민혁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는 묻고 싶은 게 많아.”
“…….”
“하지만 당신 입장에서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겠지.”
필드 내부에서 화이트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항복했다.
하지만 지금 화이트는 아무런 무기 없이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한국 정부 산하의 서고관리국에서 자기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그녀는 비협조적이었다.
“거래를 합시다, 화이트.”
그때 옆에 있던 제갈환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는 당신이 체포되었다는 걸 발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뭐?”
“아직 세상 사람들은 당신의 민낯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화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희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이 저지른 일을 덮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 그렇다면…….”
흠칫하는 화이트를 보면서, 서민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평범한 헌터 겸 가수 화이트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야.”
“……!”
서민혁이 예상했던 대로 화이트는 상당히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회귀하기 전, 화이트는 가수로서의 자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헌터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이후에도 권력을 차지하는 것보다 가수로서 활동하는 걸 더 중요시했다.
가창력이 떨어진 말년이 되어서도 무리하게 가수 활동을 하다가 성대 결절이 생겼고… 완전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자 결국 음독자살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혁은 화이트가 가수로서 활동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헌터는 사람들에게 욕먹으면서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가수는… 사람들의 지지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지.’
화이트의 심정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화이트를 회유하기 위해서는 이걸로 꼬드기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 같았다.
“화이트, 일단 우리는 너희가 어떻게 브레이크를 발생시켰는지 궁금해.”
화이트가 대답하는 걸 기다리지 않고 서민혁은 질문부터 던졌다.
“브래들리는 엔터프라이즈 길드 소속이면서 그 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 일본에서도 자기는 브레이크다운 뒤의 뒤처리만 담당했었다고 했지.”
“…….”
“하지만 이번은 달라. CCTV 등을 조사해 본 결과, 이번에 네가 데려온 스탭 중 몇 명이 콘서트와는 무관한 움직임을 보였어. 서울과 수원, 천안, 대전, 전주, 울산으로 흩어졌지.”
아직 확인이 완료되진 않았지만, 그들은 브레이크가 발생한 무한서고로 갔을 것이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브레이크를 발생시킨 거지?”
“너는 착각하고 있어.”
“뭐?”
“나는 브레이크 발생에 관여하지 않았어. 손도 대지 않았다고.”
그 말을 듣고 서민혁은 제갈환과 시선을 교환했다.
“시치미 떼지 마”
“시치미 떼는 게 아니야. 정말로 나는 브레이크 발생에 관여하지 않았어. 내가 데려온 부하들도 마찬가지지.”
“…….”
“우리가 한국에서 맡은 임무는 제대로 브레이크가 발생하는지 현지에서 확인하고 모니터링한 거였어.”
서민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화이트를 쳐다봤다.
“너희들이 브레이크를 발생시킨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러면 왜 브레이크가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지? 미국에서 도노반이 원격으로 발생시킨 건가?”
“뭐야, 잘 알고 있잖아?”
“…….”
이번에는 정말로 허를 찔렸다.
“브레이크를… 원격으로 발생시켰다고?”
“그래. 일본도 마찬가지였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브레이크는 수명이 다한 무한서고가 무너지면서 발생한다.
서민혁은 모종의 방법으로 무한서고의 내구도를 약화시켜 인위적으로 브레이크를 발생시키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건…….”
화이트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래도 이건 도노반 일당의 기밀사항인 것 같았다.
“좋아, 그러면 다른 질문부터 하지.”
“…….”
“한국에서 브레이크다운을 발생시키려 한 이유가 뭐지?”
일본에서 브레이크다운을 발생시키려 했던 건 엔터프라이즈 길드의 일본 장악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한국에 브레이크다운을 발생시킨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엔터프라이즈 길드에 대한 불신감이 극에 달한 상태니까.
“한국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뭐?”
“중요한 건 서민혁 당신이었지.”
“…나?”
이것도 의외였다.
“설마 나를 브레이크다운으로 죽이려던 건 아닐 테고…….”
“그럴 리가.”
“대체 뭐지?”
“당신 발을 묶는 게 목적이었어.”
“뭐?”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해서 한국에 몬스터들이 활보하게 되면, 당신이 한국을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을 듣고.
서민혁은 비로소 깨달았다.
“도노반이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그래, 이제야 감이 오나 보네.”
화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서민혁, 어떻게 보면 이건 전부 당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
“원래 미스터 도노반은 원만하게 세계를 장악할 생각이었어. 몇 년에 걸쳐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평화적으로 권력을 획득할 생각이었지.”
회귀하기 전에는 확실히 그랬다.
브레이크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몇 년 뒤의 일이다.
그때 도노반 일당이 이렇게 인위적으로 혼란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진행했고,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민혁 당신이 김진우를 쓰러뜨린 뒤… 우리들의 적대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미스터 도노반이 생각했던 스케줄이 틀어지게 되었어.”
“…….”
“결국, 기존 계획을 폐기하고 플랜B를 가동하게 되었지.”
플랜B.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당신 때문이야, 서민혁.”
“…….”
“당신이 미스터 도노반을 폭주하게 만든 거라고.”
그렇게 화이트가 내뱉었을 때, 옆에 있던 제갈환이 입을 열었다.
“책임을 전가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화이트 씨.”
“뭐?”
“모든 책임은 당신들 일당에게 있습니다. 서민혁 헌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헛소리는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
“당신들은 궁지에 몰려서 발악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갈환의 일침에 화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민혁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 브레이크다운을 발생시키려 한 건, 내가 그 플랜B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나?”
“맞아.”
“내가 한국에 발이 묶여서 미국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던 거군. 미국에 달려가서 도노반을 방해하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이건 지금 도노반이 진행하고 있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서민혁이 눈치채면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서 방해할 게 뻔한,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플랜B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래, 그거였나.”
답은 하나밖에 없다.
“너희 목적은 세계를 장악하는 거지.”
“…….”
“각국 정부에게서 평화적으로 권력을 넘겨받는 게 너희들의 원래 계획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그게 어려워졌으니… 강제로 뺏는 수밖에 없지.”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제갈환이 흠칫 놀랐다.
“서민혁 헌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헌터들이 쿠데타라도 일으킨다는 얘기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쿠데타를 일으켜 봤자 정규군에게 진압당할 겁니다.”
서민혁이나 도노반 수준의 헌터들이라면 몰라도, 일반 헌터들은 현대 병기로 무장한 정규군을 당해 낼 수 없다. 무한서고 바깥에서는 대부분의 헌터용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숫자가 많은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봤자 결국 헌터 측이 패배할 수밖에 없다.
물론, 도노반이 마음만 먹으면 SS랭크 무기를 들고 화이트 하우스를 점거할 수 있겠지만, 도노반의 무력만으로 미국 전체를 지배하는 건 어렵다.
“그들은 협박을 할 겁니다.”
“협박?”
“각국 정부에게 이렇게 협박하는 겁니다.”
서민혁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브레이크다운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권력을 자기들한테 넘기라고 말입니다.”
“……!”
숨을 삼키는 제갈환 옆에서, 서민혁은 화이트를 노려봤다.
“화이트, 지금 도노반이 준비하고 있는 건 ‘지구상의 그 어떤 무한서고도 강제로 브레이크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거야. 맞지?”
“그래, 정답이야, 서민혁.”
화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곧 미스터 도노반은 자유자재로 브레이크를 발생시킬 수 있게 돼.”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제갈환에게 화이트가 설명해 줬다.
“어떤 나라에 무한서고가 스무 개 정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스무 개 무한서고를 동시에 무너뜨리면 어떻게 될까? 물론 제한 시간은 24시간이야.”
“아……!”
“스무 개의 브레이크 퀘스트를 24시간 안에 모조리 클리어할 수 있는 나라는 없어. 적어도 그중 절반은 브레이크다운까지 갈 거야.”
“브레이크다운이… 열 개 이상…….”
브레이크다운의 피해를 잘 알고 있는 제갈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면 그 나라는 완전히 박살 나는 거야. 어떤 나라는 아예 몬스터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겠지.”
“세상에…….”
“20세기에는 핵폭탄이 떨어지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이었던 시기가 있었어. 하지만 이제는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하는 게 가장 무서운 시기가 되는 거야.”
어떤 측면에서는 핵폭탄보다 더 위험하다.
냉전시대에는 여러 나라가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폭탄을 쓰는 게 어려웠다. 핵폭탄을 사용하면 핵폭탄으로 보복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보복당할 염려가 없다. 핵폭탄을 발사하는 스위치는 여러 나라가 갖고 있었지만, 브레이크를 발생시키는 스위치는 오로지 도노반만이 갖고 있으니까.
“앞으로 미스터 도노반은 각국 정부를 협박할 거야. 브레이크다운으로 나라가 망하고 싶지 않으면, 자기들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라고 말이야.”
“그건… 완전히 테러리스트 아닙니까!”
제갈환 말대로,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되는 길을 택했다.
영웅으로서 권력을 손에 쥐는 게 어려워졌으니, 이제는 테러리스트로서 권력을 갈취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이트.”
서민혁은 화이트에게 물었다.
“놈들은 대체 어떻게 무한서고를 붕괴시키고 브레이크를 발생시키는 거지? 그리고 놈들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건…….”
화이트가 다시금 말꼬리를 흐린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나이 든 남자가 들어왔다.
서고관리국 국장인 정세경이었다.
“국장님? 갑자기 왜…….”
“부국장, 그리고 서민혁 헌터…….”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방금 국정원을 통해 들어온 소식이네. 미국 각지에서 브레이크의 전조현상이 관측되었다는군.”
“그게 정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니야. 엔터프라이즈 길드가… 화이트 하우스를 점거하고 대통령을 감금했어.”
“……!”
그들이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미국부터 장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