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위업을 달성하라 (3)
조성조의 박력 있는 일갈에 사토야마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사토야마는 이중의 의미를 담아 바닥에 머리를 박고 도게자를 했다.
처절한 굴복이었다.
* * *
“스즈무라 씨, 괜찮을까요?”
하라주쿠.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 중 하나로, 특히 개성적인 패션을 선보이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는 지역.
울창한 숲이 우거진 메이지 신궁(神宮) 경내를 침범하는 형태로 출현한 퀘스트 필드 앞에서, 스즈무라 마츠리는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브레이크다운까지 이제 다섯 시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네요.”
“우리들 힘으로는… 브레이크다운을 절대로 못 막아요.”
지금 퀘스트 필드 앞에서는 타케미카즈치 길드뿐만 아니라 여러 중소 길드의 헌터들도 모여 있었다.
타케미카즈치 길드가 후쿠오카, 히로시마, 오사카의 브레이크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동안, 중소 길드 연합은 나고야의 브레이크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도쿄로 달려온 것이다.
“공안조사청에서 뭔가 방법을 마련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요.”
“우리가 다섯 시간 동안 몬스터를 사냥해 봤자 얼마나 처리할 수 있을까요?”
“결국, 헛수고만 하는 거예요.”
“그냥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머지는 자위대에게 맡기고…….”
“안 됩니다.”
부정적인 의견을 입에 담는 헌터들 앞에서, 스즈무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스즈무라 씨…….”
“그게 우리들의 의무니까요.”
그 말을 듣고 헌터들이 입을 다물었다.
원래 스즈무라는 칸자키, 하야마에 비하면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헌터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건 그녀의 진정성에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부탁드릴게요. 마지막까지… 일본의 헌터로서 후회 없는 싸움을 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해 보죠.”
하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은 연속된 싸움 때문에 지친 상태였다.
그걸 알면서도, 스즈무라에게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그러면 필드로 진입하겠습니다. 제가 선두에 설 테니…….”
“실례합니다.”
바로 그때.
한 남자가 다가오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선두에 나서면 안 되겠습니까?”
“당신은……!”
그 모습을 보고 스즈무라는 숨을 삼켰다.
주위에 있던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민혁 씨?!”
“서민혁이라고?”
“어떻게 여기에?!”
서민혁은 조성조와 함께였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조성조에게 건네주자, 그 안에 입고 있던 헌터용 슈츠가 드러났다.
소문에 의하면 드래곤 비늘을 가공해서 만든 방어구라고 한다.
“공안조사청의 요청을 받아, 하라주쿠에 발생한 퀘스트 필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
스즈무라는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고의 원군이 와 주었다.
“여러분들은 체력이 많이 고갈된 상태입니다. 제가 앞으로 나서서 위험한 몬스터들을 먼저 처리할 테니, 여러분들은 조심하면서 따라오십시오.”
“네,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민혁의 차분한 목소리는 스즈무라뿐만 아니라 주위 헌터들에게도 안심감을 주었다.
이 남자가 나서준다면 희망이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희야말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즈무라가 고개를 숙이며 소리치자, 주위의 다른 헌터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도쿄의 운명은 이제 서민혁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여러분, 한국의 서민혁 헌터가 나타났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서민혁이 과연 일본의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요?”
“일본의 운명은 한국의 신성(新星)의 활약에 의해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주위에 깔려 있던 방송국 캐스터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으며, 서민혁은 필드 입구로 다가갔다.
“민혁아.”
함께 따라온 조성조가 말을 걸었다.
“아까 너도 들었지만, 안에는 거대 이무기가 있다고 하더라.”
“그래.”
“2년 전에 내가 잡았던 놈이야.”
2년 전, 도쿄 신주쿠에서 발생한 브레이크다운에서 조성조는 거대 이무기를 사냥했다.
그때와 똑같은 놈이 이 퀘스트 필드 안에 있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놈이야.”
“그런 것 같더라.”
“하지만 너라면 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
서민혁의 대답을 듣고 조성조는 미소를 지었다.
“해치워 버려.”
“알겠어.”
물러서는 조성조와 눈빛을 교환한 뒤, 서민혁은 퀘스트 필드 안으로 진입했다.
‘숲이 우거진 삼림 필드였겠지.’
넓은 내부 공간에는 나무가 가득했다.
하지만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나무가 다 쓰러진 상태였다.
그 위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스즈무라 씨.”
“앗, 네!”
다른 헌터들을 이끌고 뒤따라온 스즈무라에게, 서민혁은 간단히 설명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 혼자 앞으로 나갈 겁니다. 굳이 도와줄 생각은 하지 마시고, 따라올 생각도 마세요.”
“그, 그래도 최대한 도와드리는 게…….”
“제 말 못 들었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다급히 고개를 숙이는 스즈무라를 뒤로 하고 서민혁은 앞으로 나섰다.
“크르르!”
“구어어어!”
평소보다 흉포해진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서민혁은 간장과 막야를 뽑아 든 채 심호흡을 했다.
‘신속 구현.’
생체마법을 사용하면서 서민혁은 몬스터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본능적으로 양손의 칼을 휘두르자 몬스터들이 차례차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대, 대단해!”
“저게 한국의 서민혁!”
“칸자키 씨나 하야마 씨보다 더 뛰어나잖아!”
“저게 아직 SS급이 아니라고?!”
탄성을 지르는 일본 헌터들을 뒤로하고 질주했다.
완전히 몬스터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서민혁은 마력을 끌어 올렸다.
‘한 단계 기어를 올려 볼까.’
간장과 막야에 검기가 실렸다.
예전처럼 샐러맨더의 화염 등의 기운을 깃들게 한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서민혁의 마력 자체를 검기로 전환하여 부여한 것이다.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서민혁은 본래 소드마스터들만 할 수 있었던 정석적인 방식의 검기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크르르르?!”
“캬아아아!”
쉬익! 파앗!
검기가 깃든 간장과 막야를 휘두를 때마다, 주위의 몬스터가 한꺼번에 대여섯 마리씩 목숨을 잃었다.
칼날이 스치지도 않았는데, 그냥 근처에 있기만 해도 충격파에 휩쓸려 육체가 파괴되었다.
“샤아아아아아!”
그때 커다란 거미 형태 몬스터가 달려들었다.
호랑이 같은 무늬를 지닌 걸 보니 일본의 요괴 ‘츠치구모’인 것 같았다.
다리가 많아서 그런지 다른 몬스터들보다 움직임도 빠르고 힘도 강해 보였다.
‘전자마법, 전자기장 제어 2단계.’
파직 소리와 함께 사출된 간장이 츠치구모의 이마를 꿰뚫었다.
일격에 침묵해버린 츠치구모를 보면서 서민혁은 손을 치켜들었다.
‘시체병 생성.’
사령마법을 사용한 순간, 츠치구모가 좀비가 되어 몸을 일으켰다.
예전에는 인간형 몬스터만 시체병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인간과 거리가 먼 몬스터들도 시체병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성능도 더 좋아졌다.
“크르르르?!”
“캬아아아!”
츠치구모가 다리를 움직이면서 근처의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당황해하는 몬스터들을 뒤로하고 서민혁은 계속해서 돌격했다.
‘역시 안쪽으로 들어가야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군.’
나무를 짓밟으면서 거인형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예전 서리거인들과 싸울 때처럼 나무를 발판으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
서민혁은 자신의 근력만으로 도약하면서 간장과 막야를 휘둘렀다.
“크어어!”
촤악!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거인의 모습을 확인한 뒤, 서민혁은 다시 한번 시체병 생성 마법을 사용했다.
좀비 거인은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거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서민혁은 공격의 속도를 더 높였다.
‘계속해서 간다.’
차례차례 쓰러지는 거인들.
그들은 모조리 시체병이 되어 다시 일어섰다.
[사령마법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현재 8레벨입니다.]
마침 사령마법의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시체병들을 보다 세밀하게 조종할 수 있게 된 걸 깨닫고, 서민혁은 일일이 명령을 내렸다.
“닥치는 대로 몬스터들을 해치워. 하지만 인간들에게는 절대로 피해가 가지 않게 해.”
본래 시체병 생성으로 만든 좀비들은 구체적인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정도 명령은 알아들을 것이다.
서민혁은 좀비 거인들에게 잔챙이들을 맡긴 뒤 계속해서 전진했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나무… 신목(神木)을 향해.
“저건가?”
신목으로 접근할수록 몬스터의 저항은 더 거세졌다.
하지만 서민혁은 온갖 마법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돌파했다.
에테르 그레일을 획득한 이후에는 마력 고갈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고오오오오!”
마침내 신목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던 거대한 몬스터를 포착했다.
전체적인 크기는 지난번 화이트 드래곤보다 더 크다.
머리와 꼬리가 여덟 개 있는 이무기였기 때문이다.
‘저게 바로 거대 이무기… 야마타노오로치!’
일본 신화에 나오는 괴물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몬스터.
드래곤처럼 브레스를 쓰지도 않고, 공격력과 방어력도 드래곤보다 떨어지는 편이지만… 한 가지 골치 아픈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 개라는 점.
이론적으로는 열여섯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머리가 여덟 개이기 때문에 목을 한번 벤다고 죽지 않는다.
‘제법 대단한 괴물이구나.’
데이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히드라처럼 목을 베어도 다시 돋아나는 괴물은 아닐 터, 네 실력이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해치워 봐라.’
그 순간, 서민혁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데이모스가 부여해 주는 흑강의 기운을 컨트롤하면서 서민혁은 야마타노오로치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오오오오!”
여덟 개의 머리를 치켜들고 포효하는 야마타노오로치.
정면에서 접근하면 저 여덟 개의 머리로 동시에 공격한다.
측면이나 후면을 노리려고 하면 여덟 개의 꼬리로 후려칠 것이다.
한두 개라면 신속 구현의 스피드로 피하면 되지만, 여덟 개씩 있으니 그렇게는 안 된다.
‘전자마법, 전자기장 제어 1단계.’
서민혁은 간장과 막야를 동시에 날렸다.
스피드보다는 컨트롤을 우선하여, 공중에서 복잡한 궤도로 날아다니며 야마타노오로치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사이 서민혁은 새로운 무기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아메노하바키리… 본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군.’
타케미카즈치 길드를 상징하는 보물이었던 SS랭크 무기.
984의 공격력 수치를 지닌 이 무기에는 ‘용종 및 유사 용종 공격 시 추가 대미지’라는 효과가 있다.
신화에서 야마타노오로치를 죽인 검이 바로 이 아메노하바리키다.
서민혁은 이 아메노하바리키를 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자마법, 전자기장 제어 제2단계.’
파직!
전자기장에 의해 아메노하바키리가 레일건처럼 사출되었다.
낮게 깔리며 초고속으로 날아간 아메노하바키리가 야마타노오로치의 정중앙… 몸통 부위로 파고든다.
“고오오오오!”
머리가 여덟 개, 꼬리가 여덟 개라고 해도 몸통은 하나다.
그 몸통에 용종 특화 무기인 아메나하바키리가 꽂혔으니 야마타노오로치도 견디기 어려웠다.
‘숨통을 끊기에는 부족하군. 어떻게 할 건가?’
‘다음 무기를 꺼내야죠.’
서민혁은 인벤토리에서 다음 무기를 꺼냈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현재 서민혁이 갖고 있는 무기 중에서 가장 높은 공격력 수치를 지닌 무기를.
‘김진우의 무기로군.’
‘네.’
아론다이트.
아서 왕 전설의 기사 랜슬롯이 사용했다는 명검과 같은 이름을 지닌 SS랭크 무기.
그 공격력 수치는… 무려 1,221.
1,000을 넘어가는 공격력을 지닌 무기를 손에 쥐는 건 처음이었다.
‘해치워 봐라, 계약자여.’
칠흑의 기운이 깃들기 시작한 아론다이트를 들고, 서민혁은 야마타노오로치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