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위업을 달성하라 (1)
“…….”
브래들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브래들리…….”
“세계 정복이고 자시고, 내가 인간으로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그건 그렇지.”
어떻게 보면 브래들리가 일본으로 온 건 서민혁에게 행운이었다.
어쨌든 ‘말이 통하는’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니까.
‘브래들리가 효자여서 다행이야.’
껄렁껄렁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브래들리는 어머니를 끔직이 생각하는 남자다.
미국의 영웅이었던 자신이 괴물로 전락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서민혁, 내가 고차원 지성체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미스터 도노반 덕분이야.”
“뭐라고?”
“미스터 도노반이 나한테 그 힘을 얻는 방법을 알려 줬어. 내 동료들도 마찬가지야. 아마 김진우도 그렇겠지.”
“…….”
이건 서민혁도 모르던 정보였다.
“하지만 미스터 도노반은 그런 힘을 사용하지 않아. 김진우처럼 숨기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
“…….”
“어쩌면 미스터 도노반은 이 힘의 페널티를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나 같은 놈들만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시키고, 자기는 계약하지 않은 거지.”
서민혁이 알기로, 도노반은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헌터가 아니었다.
칠악의 일원으로 꼽힌 적도 없고, 괴물로 변신한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들리가 말하는 대로 도노반은 고차원 지성체와 계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미스터 도노반이 나를 이용하려 한 거면… 가만둘 수 없어.”
“그러면…….”
“서민혁, 너하고 손을 잡을게.”
브래들리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미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SS급 헌터가… 서민혁에게 넘어온 순간이었다.
* * *
‘두 사람 분량을 다 먹으려니 배가 터지겠네.’
조성조는 료칸 방에서 트림을 했다.
이 료칸에서는 하루 세 끼 다 방에다가 차려 주는데, 서민혁이 몰래 빠져나갔기 때문에 조성조가 두 사람 분량을 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 사람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렇게 엄청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끼마다 이렇게 먹고 있으니 힘들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다이어트 좀 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조성조는 다다미 바닥에 몸을 눕혔다.
“야, 민혁아.”
그리고 옆방에서 이불 깔고 누워있는 ‘가짜 서민혁’에게 말을 던졌다.
“남자 둘이서 온천 여관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있으면 좀 의심받지 않겠냐?”
한국에 소문이 전해지면 난리날 것이다.
서민혁과 조성조가 한국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본의 온천 료칸에서 은밀한 시간을 보냈다고 말이다.
“방 정리하는 것도 필요 없다고 하고, 식사만 두고 가라고 하고… 아까 직원도 좀 수상해하는 눈치던데 말이야.”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조성조는 하품을 했다.
아직 노트북으로 처리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식곤증 때문에 졸렸다.
“그냥 한숨 잘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은 순간.
옆방의 탁자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이 드드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어이쿠.”
조성조는 바로 일어나서 옆방으로 향했다.
서민혁한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
메시지를 확인한 뒤 조성조는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이불 속에 누워 있던 ‘가짜 서민혁’을 발로 걷어찼다.
“그럼 가자고.”
스르르 사라지기 시작한 서민혁의 환영을 뒤로하고 조성조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 분량의 짐을 챙겨 방에서 나왔다.
“죄송합니다. 바로 체크아웃하겠습니다.”
깜짝 놀라는 직원 앞에서 체크아웃 수속을 마친 뒤, 조성조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숙소를 나왔다.
료칸을 감시하던 공안조사청 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여행 좀 해 볼까!”
들으라는 듯이 소리치면서, 조성조는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향했다.
* * *
“조성조 혼자라고? 서민혁이 사라졌어?”
보고를 듣고 사토야마는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대체 감시를 어떻게 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숙소 직원들은? 서민혁이 나가는 모습을 못 봤다고 하나?”
“식사를 가져다준 직원이 안쪽 방에서 서민혁이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걸 얼핏 봤다고 합니다.”
“위장이었겠지! 어느새 숙소를 빠져나간 거야!”
사토야마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히로시마의 퀘스트 필드에 헌터 요원들을 투입해!”
“네? 타케미카즈치 길드를 도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니야! 서민혁이 있는지 확인하라는 거야!”
“서, 서민혁이요?”
“지금 상황에서 서민혁이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행방을 감췄어! 그럼 무슨 짓을 하고 있겠나!”
“아……!”
“타케미카즈치 길드 소속인 것처럼 위장해서 브레이크 퀘스트를 공략하고 있는 거야!”
일본에서 외국 헌터가 활동하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분을 위장하여 헌터 활동을 하고 있다면 심각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잡아! 절대로 놓치면 안 돼!”
“네, 알겠습니다!”
“아, 혹시 모르니까 오사카도! 오사카 퀘스트 필드에 있을지도 모르니 그쪽에도 요원을 들여보내!”
“네!”
“빨리 가 봐!”
서민혁을 현장에서 잡으면 큰 전과가 된다.
정치가들이 외교 전쟁에서 한국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로 쓸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사토야마의 입신 출세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엔터프라이즈 길드의 계획도 돕고, 여당의 높으신 분들에게도 선물을 건네줄 수 있고… 일석이조인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토야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브래들리에게 연락을 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브래들리는 아마 서민혁을 잡으러 규슈로 갔을 거야. 헛수고하지 않게 연락해 줘야지.’
하지만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핸드폰은 켜져 있는 것 같은데 전화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뭐지?’
사토야마는 일단 메시지만이라도 보내두기로 했다.
하지만… 브래들리의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바로 오사카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그래야죠…….”
히로시마의 브레이크 퀘스트를 클리어한 뒤, 스즈무라 마츠리는 바로 다음 목적지인 오사카로 향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헌터들이 너무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체력 소모가 심했다.
“공안조사청 놈들은 대체 왜 온 거야?”
“도와주러온 줄 알았는데 방해만 하고.”
“이런 상황에서 신원 확인을 왜 하는 건데? 미친 거 아냐?”
이번에 체력 소모가 심했던 건, 공안조사청의 헌터 요원들이 필드에 들어와서 헌터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신원 확인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몬스터 잡기도 바쁜데 나라에서 나온 공안조사관들이 현장을 들쑤시고 다니니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 서민혁 씨가 우리들 사이에 숨어 있지 않을까 의심한 거야.’
스즈무라는 절망감을 느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이런 일 때문에 인력을 낭비하다니, 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먹은 나라일까.
필드에 들어온 공안조사청의 헌터 요원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협조해 줬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만 했고, 결국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이런 상태로… 오사카의 브레이크 퀘스트를 제때 클리어하고 도쿄까지 갈 수 있을까?’
도쿄의 브레이크다운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
빨리 오사카의 브레이크 퀘스트를 해결하고 도쿄로 가야 한다.
‘아무리 빨라도 여유가 없어. 브레이크다운을 원천 봉쇄하는 건 불가능해.’
지금 헌터들이 해야 할 건 빨리 도쿄에 도착해 필드 내부의 몬스터들을 최대한 사냥해 놓는 것이다.
그러면 브레이크다운 이후 도쿄 시내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의 숫자를 줄일 수 있다.
자위대를 출동시키고, 나고야에서 돌아온 다른 길드들과 합세해서 싸운다면 승산이 있다.
‘피해는 발생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어쩌면 공안조사청이 비장의 수단을 숨겨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민혁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원군을 불렀을 수도 있다.
‘일단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즈무라는 지친 동료들을 이끌고 오사카로 향했다.
* * *
날짜가 바뀔 때마다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졌다.
“크음…….”
사토야마는 장관실에 앉아 신음 소리를 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신문 1면에는 도쿄에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었다.
이 기사의 영향으로 닛케이평균주가는 장초부터 크게 하락했고, TV나 인터넷 등도 시끌시끌했다.
사토야마한테도 정치권 등 각 방면에서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최대한 사회 혼란이 없도록 여론 조작을 할 거라 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사실 위험한 상황이긴 했다.
스즈무라가 타케미카즈치 길드를 이끌고 오사카의 퀘스트 필드로 들어간 지 벌써 48시간이 경과했지만 아직까지 클리어를 못 했다.
현재 타임리미트까지 12시간이 남았다. 지금 당장 스즈무라가 신칸센을 타고 달려와도 브레이크다운을 막을 수는 없다.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브래들리가 나서 줄 거라고 알고 있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빗발치는 항의 전화에도 불구하고 사토야마가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 건, 브래들리가 나서 주기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브래들리가 나서면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해도 걱정 없다.
“신속한 처리를 위해서는 미리 준비를 진행해야 하는데, 왜 연락을 안 받지?”
서민혁에 대한 자료를 받아 들고 공안조사청을 나간 뒤, 브래들리하고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공안조사관들도 그 행방을 찾아내지 못했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사토야마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만약 브래들리가 나서주지 않는다면 도쿄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브레이크다운으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에 대처하려면 자위대만으로는 부족하다.
헌터들도 다른 지역에서 브레이크 퀘스트를 클리어하느라 체력이 고갈되어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저으면서 사토야마는 애써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려 했다.
분명 뭔가 사정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변덕일지도 모른다.
아직 브레이크다운까지는 12시간이나 남았다.
분명 그 전에 연락이 있을 것이다.
“빨리 좀…….”
사토야마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브래들리의 연락을 기다렸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등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지만…….
“제발 좀…….”
시계 바늘은 무정하게 움직였다.
이제 남은 시간은 11시간, 10시간, 9시간, 8시간, 7시간…….
“이 빌어먹을 미국 놈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브레이크다운까지 6시간 남은 시점에서, 사토야마는 이성을 잃었다.
“이 애송이가 진짜…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지려고! 죽고 싶냐?!”
그렇게 소리치며 책상을 주먹으로 두들긴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관님, 지금 바깥에 장관님을 만나러 오셨다는 분이…….”
“헉……!”
사토야마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섣불리 큰 소리를 낸 걸 후회했다.
“브, 브래들리 님인가? 어서 들어오시라고…….”
“아닙니다.”
“뭐라고?”
다시금 사토야마는 이성을 잃어버릴 뻔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대체 뭐란 말이냐.
“한국의 조성조 님, 그리고 서민혁 님이 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남자들의 방문에 사토야마는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