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 (1)
일본 정부는 사태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무한서고의 상태를 점검하는 건 법무성 산하의 정보기관인 공안조사청에서 담당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타케미카즈치 길드에 외주를 주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타케미카즈치 길드는 1인자의 실종과 2인자의 사망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새로운 길드장을 뽑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내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길드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이크의 전조 현상을 감지하지 못했고… 실제로 브레이크가 발생한 이후에나 사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동시에 다섯 곳에서나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하다니, 이건 전대미문이야!
공안조사청 본부의 회의실에서는 관계자들이 모여 긴급 대책 회의가 열렸다.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적이 없었어! 그런데 왜 우리 일본에서만…….”
“이번에 브레이크가 발생한 무한서고 중에는 출현한 지 2년밖에 안 된 무한서고도 있습니다. 이건 이상한 일입니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히로시마… 하필이면 대도시에 있는 무한서고들에서 문제가 생겼군.”
“몇 시간 간격으로 브레이크가 발생했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게 과연 자연적인 현상일까요?”
“그러면 어쨌다는 건가? 이게 인위적인 현상이라는 건가?”
온갖 얘기가 나왔지만, 생산적인 의견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그때 회의실 구석에서 손을 치켜든 사람이 있었다.
다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공안조사청 관료들과는 달리 비교적 젊은…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스즈무라 길드장 대리,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그녀의 이름은 스즈무라 마츠리.
칸자키가 실종된 타케미카즈치 길드에서 길드장 대리를 맡고 있는 S급 헌터였다.
“지금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부터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잠시 회의실 안에서 침묵이 흘렀다.
나이도 어리고, 길드장 ‘대리’에 불과한 스즈무라의 발언에 다들 언짢아하는 것 같았다.
“스즈무라 길드장 대리, 원인을 파악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발언하는 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원인을 파악하면, 브레이크 퀘스트 다섯 개를 동시에 클리어할 방법이 도출됩니까?”
회의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러분, 현장에서 싸우는 헌터로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즈무라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일본에는 다섯 개에 달하는 브레이크 퀘스트를 동시에 클리어할 전력이 없습니다.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할 겁니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SS급 헌터였던 칸자키와 하야마가 있었던 시절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7일, 아니 이제는 6일이라 해야겠죠. 6일 안에 클리어할 수 있는 건 세 군데 정도가 한계일 겁니다.”
회의실 안이 시끄러워졌다.
“무책임한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이런 사태에 대비해 타케미카즈치 길드를 지원해 주고 있었던 거 아닌가!”
“특공을 해서라도 전부 해결하겠다고 선언하지는 못할망정, 세 군데 정도가 한계일 거라고?! 이런……!”
“저는 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삿대질을 하는 관료들 앞에서도 스즈무라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히로시마… 다섯 중 둘은 포기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섯 곳 전부 브레이크다운을 막아야 해!”
“그러면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다.
그 소리를 듣고 관료들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이 험악해졌다.
“외국에서 원군을 부르면 됩니다.”
“……!”
그들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소리였다.
“원군? 원군이라고?”
“외국 헌터를 불러들인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시아 최고의 헌터 선진국인 일본에 외국 헌터를 불러들인다고?!”
예전부터 일본인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타케미카즈치 길드라는 세계적 길드를 보유하고 있으며, SS급 헌터를 두 명이나 배출한 일본은 아시아 최고의 헌터 선진국이라고 말이다.
특히, 이웃나라인 한국에 SS급 헌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채워 주기 딱 좋았다.
“언제까지 착각에 빠져 계실 건가요?”
“뭐, 뭐라고?”
“칸자키도 하야마도 이제는 없습니다. 지금 일본은 옆나라 한국이나 큰 차이 없는 상태란 말입니다.”
“아니 무슨……!”
“감히 한국하고 비교를 해? 중국이라면 몰라도!”
관료들은 더더욱 화를 냈지만, 스즈무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장 담당자로서 말씀드립니다. 외국에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다들 진정 좀 하게.”
그때 회의실에서 목이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공안조사청 장관… 사토야마 준이치였다.
“그래서, 스즈무라 군.”
“네, 장관님.”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인 사토야마는 마치 손녀를 대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라는 외국 헌터를 원군으로 부르려면 절차가 매우 복잡해. 알고 있겠지?”
“네…….”
“아무리 긴급 사태라고는 해도 최소 3일은 걸리지. 이건 어쩔 수 없어.”
“…단축할 수 없는 겁니까?”
머뭇거리면서 스즈무라가 묻자 사토야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절차를 단축하기 위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러면 3일보다 더 걸리겠지. 이 나라는 원래 그런 나라야.”
“…….”
“그렇게 되면… 외국에 원군을 요청하더라도 시간이 3일밖에 없다는 거지. 아니, 이동 시간을 생각하면 2일 정도라고 해야 할까.”
사토야마가 책상을 손끝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그리고… 원군을 부른다고 해서 즉각 날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다른 나라 헌터들도 스케줄이 있을 테니까.”
“…….”
“어쩌면 브레이크다운이 벌어지게 내버려 두고, 자위대를 출동시키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미리 필드 주변에 자위대를 전개해 놓으면 브레이크다운에 대처할 수 있겠지.”
사토야마의 발언에 주위가 웅성거렸다.
“확실히… 그게 더 나을지도.”
“작년에 만들어진 그 법을 적용하면 자위대를 사전에 전개하는 것도 가능해져.”
“하지만 분명 좌익 세력들이…….”
“이번 기회에 자위대를 더욱더…….”
“자, 잠시만요!”
스즈무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2년 전의 도쿄 결전을 잊으신 건가요? 그때도 자위대를 투입했지만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
2년 전.
도쿄 한가운데에서 아시아 최초의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했고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특히,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 이무기 몬스터 때문에 큰 피해가 발생했는데, 마침 일본에 와 있던 외국 헌터들의 도움으로 토벌할 수 있었다.
“장관님.”
그때 문이 열리면서 공안조사청의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방금 이런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자네, 지금 우리는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
“한국의 조성조라는 분의 연락입니다.”
“조성조라고?”
그 이름을 듣고 다들 놀랐다.
조성조야말로 2년 전의 도쿄 결전에서 거대 이무기 몬스터를 해치운 주역 중 한 명이었다.
그때 조성조는 휴가 때문에 일본에 와 있는 상태였다.
“서민혁이라는 헌터가 지금… 일본에 와 있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일본에서도 서민혁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
김진우를 쓰러뜨린 것도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에서 동시다발적인 브레이크 현상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서민혁이 협력해 줄 의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안조사청과 상담하고 싶다고…….”
“아……!”
스즈무라가 탄성을 질렀다.
“그, 그렇죠. 이미 일본에 관광 목적으로 들어와 있는 헌터가 긴급 사태에 협력해 준다는 형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절차를 단축시킬 수 있어요! 2년 전의 조성조 씨처럼!”
“……!”
이건 일종의 꼼수였다.
헌터로서 활동하기 위해 일본에 입국하는 것은 절차가 복잡하다.
하지만 관광 목적으로 입국한 헌터가 긴급 사태에 협력한다는 목적으로 전투에 참가하는 건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다.
“스즈무라 군,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돼.”
“네?”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한 다음이라면 몰라도, 브레이크 단계에서는 긴급 사태로 인정될 수 없어.”
“그, 그러면…….”
“그리고, 무엇보다.”
사토야마가 힘주어 말했다.
“한국 헌터에게 협력을 요청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2년 전에 조성조가 거대 이무기를 해치웠을 때도 국내에서 말이 많이 나왔지. 부끄럽지도 않냐면서 많은 질타가 있었어. 정부 지지율에도 악영향을 끼쳤고.”
사토야마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다른 관료들도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로지 스즈무라만이 입술을 깨물며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게, 스즈무라 군.”
* * *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
“그렇지?”
일본 규슈 오이타현.
온천으로 유명한 유후인의 료칸에서 서민혁은 조성조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도 비슷한 입장이 되면 싫다고 할 거야. 하지만 일본은 우리랑 좀 다른 의미란 말이지.”
“감히 한국 따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거겠지.”
“내가 2년 전에 도쿄에서 이무기 잡았을 때도 별로 고맙다는 소리 못 들었어. 칸자키는 별도로 나한테 찾아와서 감사해했지만.”
일본 공안조사청은 조성조의 협력 제안을 거부했다.
이렇게 된 이상 서민혁은 그냥 대기할 수밖에 없다.
“근데 정말로… 브레이크가 다섯 개 동시에 발생한 거구나.”
“그래, 모하메드 하산의 정보가 맞았어.”
서민혁이 미리 일본에 와 있을 수 있었던 건 모하메드가 알려 준 정보 덕분이다.
모하메드는 도노반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도노반 일당이 브레이크를 발생시키려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이웃나라에 있는 서민혁에게 알려 준 것이다.
“결국, 그놈들은 인위적으로 브레이크 현상을 발생시킬 수 있는 거야?”
“그렇다고 봐야겠지.”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쓰는 거지? 무한서고 기둥에 폭탄이라도 설치해서 폭파하는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가만 있자.”
어쩌면 그게 진실일지도 모른다.
물론 평범한 폭탄을 터뜨려 봤자 무한서고는 꿈쩍도 안 하겠지만… 에테르 코어 같은 걸 가져다 박으면 어떨까.
현대 문명의 힘으로는 무한서고를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무한서고 내부의 물질을 사용한다면?
“어쨌든… 이렇게 되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겠네.”
“그렇지.”
서민혁이 일본에 온 건 일본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도노반 일당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서다.
일본인들이 정치적 이유로 서민혁의 도움을 거절해 피해가 커진다면… 그건 일본인들의 자업자득이다.
“에이, 난 그냥 목욕이나 해야겠다. 너는 어떻게 할래?”
“잠깐만.”
“왜 그래?”
조성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야? 종업원인가?”
“들여보내 줘.”
의아해하면서 조성조가 방문을 열어 줬다.
그러자 단정하게 생긴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조성조 씨.”
“어? 너는…….”
복도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조성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즈무라 마츠리였나? 예전에 칸자키하고 같이 있던…….”
“기억해 주고 계셨군요.”
서투른 한국말로 대답하던 그녀의 시선이 서민혁에게 향했다.
“서민혁 씨 맞으시죠?”
“맞습니다.”
서민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그녀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조성조 옆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서민혁 씨!”
“우앗!”
깜짝 놀라는 조성조 앞에서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몸을 숙인 채 이마를 다다미 바닥에 박았다.
일본에서 최대로 몸을 낮추며 성의를 표하는 자세, 도게자였다.
“부탁드립니다! 일본을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