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서로 모든 걸 쏟아 내자 (6)
“으윽!”
양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걸 느끼며 김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어깨 삼각근이 손상을 입었다. 이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드레스티아, 도와다오……!’
김진우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한국어로 소리친 것이 아니다.
기초 마도어로 소리친 것이었다.
‘□□□□□□□□□□□.’
그 순간, 머릿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나라 말도 아닌, 마치 외계어 같은 말.
아마 마도 언어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까지 김진우는 이 목소리를 계속 들어왔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이 아드레스티아라는 절대적 존재이며, 자신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해 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당신이 나한테 무엇을 바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싸워 나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바라는 거라면… 나에게 더 강한 힘을!’
‘□□□□□□□□□□□□□.’
김진우의 절규에 반응한 것일까.
아니면 슬슬 도와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일까.
김진우는 전신에서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뭐지?”
서민혁이 흠칫하면서 거리를 벌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오오오!”
김진우는 포효했다.
어깨의 부상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아론다이트를 마치 몽둥이 휘두르듯이 휘둘렀다.
쿠쿠쿠쿵!
엄청난 충격파가 발생하며 콜로세움이 흔들렸다.
그리고 김진우는 깨달았다.
자신의 육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강해졌어!’
온몸의 근육이 울퉁불퉁해지면서 부풀어 올랐다.
키도 커졌다. 심지어 머리도 커진 것 같았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게 있다면, 자신이 더욱 강한 존재로 진화했다는 것이었다.
“이건… 칠악?”
칠악.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분명 마도서에 적혀 있는 개념일 것이다.
‘또 자기만 아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군!’
김진우는 서민혁에게 분노를 느꼈다.
전력을 다해 아론다이트를 집어 던졌다.
서민혁은 아론다이트를 막으려 했지만, 완전히 막아 내지 못하고 후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시체더미에 파묻혀서 일어나지 못했다.
“오오오오!”
다시 한번 포효하면서 김진우는 땅을 박찼다.
서민혁을 쫓아가 막강한 근력을 획득한 두 팔로 찢어발기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휘리릭!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김진우의 목덜미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크아아아아!”
이성을 잃고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아까 서민혁이 튕겨 나가면서 떨어뜨린 막야가, 저절로 날아올라 김진우의 목을 노렸다.
그리고 그 직후, 시체더미에 파묻혀서 쓰러져 있던 서민혁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
환영마법.
분명히 서민혁은 아까 그렇게 말했었다.
“으으으윽!”
목에서 피를 뿜으면서 김진우는 다급히 뒤돌아봤다.
그리고 간장을 손에 쥐고서 튀어 오르는 서민혁를 목격했다.
“서, 민, 혁……!”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는 목소리로 숙적의 이름을 불렀다.
진정한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남자를 반드시 쓰러뜨려야 한다.
거대해진 두 손을 치켜들어 김진우는 서민혁을 찢어 죽이려 했다.
“이걸로 끝이다, 김진우.”
그 순간, 아까 김진우의 목덜미를 찢고 지나갔던 막야가 다시 날아올라 서민혁의 손으로 돌아왔다.
전광석화처럼 휘두른 간장이 김진우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고.
그 틈새로 뻗어온 막야가 김진우의 목 한가운데에 꽂혔다.
* * *
쿵 소리를 내면서 김진우가 뒤로 쓰러졌다.
이제는 완전히 무력화된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서민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김진우를 응시했다.
분명 김진우는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갑자기 푸른색 기운을 뿜더니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견이 변화했다.
‘이건 마치…….’
김진우는 원래 수려한 외모를 지닌 미남자였다.
하지만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온몸이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올랐다. 피부도 칙칙한 색으로 변화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데몬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칠악과 비슷한데.’
칠악.
영미권에서는 ‘Seven sins’라 불리던 헌터들.
그들은 헌터들이 지배하던 미래 세계에서 악명을 떨쳤던 일곱 명의 SS급 헌터다.
그들이 악(惡)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육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일반 헌터들과 비슷했지만, 궁지에 몰리면 방금 전의 김진우처럼 흉악한 형상으로 변화하곤 했다.
‘데이모스 님.’
서민혁은 데이모스를 불렀다.
‘저게 뭡니까.’
데이모스에게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서민혁은 그 침묵이야말로 데이모스의 대답이라고 느꼈다.
‘시스템적인 부분이라 대답할 수 없다는 소리는 안 하시는군요.’
데이모스의 태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서민혁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직면하게 될 일도.
“서민혁…….”
그때 쓰러진 김진우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김진우는 평소와 같은 미남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저를 쓰러뜨려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뭘 어떻게 해.”
서민혁은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크루세이더 길드를 해체해야지.”
“…어리석은 짓입니다.”
김진우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퇴장하면… 한국은 무력해집니다.”
“…….”
“김진우가 없는 한국을, 미스터 도노반과 그 일당들이 가만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김진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한국을 자기 식민지로 삼으려 하겠죠…….”
식민지.
지금 말하는 건 과거 제국시대 시절하고는 다른 개념이다.
앞으로 펼쳐질 헌터의 시대에서는, 자기 나라 헌터들의 힘이 약해 타국의 헌터들에게 장악당한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미 일본은… 칸자키와 하야마가 퇴장하면서 그런 수순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일본이?”
“만약 제가 건재했다면… 한국은 훗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되었겠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칸자키와 하야마가 사망하면서 일본은 SS급 헌터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구심점을 잃은 타케미카즈치 길드도 흔들리고 있는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 각지에서 브레이크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일본 정부 및 헌터들은 대처하기 어렵다.
그럴 경우 구해 주러 올 수 있는 나라는 두 군데뿐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한국 그리고 예전부터 일본이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있던 미국.
“미국의 미스터 도노반은 저에게 일본을 양보할 생각이었습니다.”
“양보라…….”
“하지만 제가 퇴장하면 그럴 필요가 없겠죠. 미스터 도노반이 나서서 일본을 장악할 겁니다.”
“…….”
“그리고 일본 다음은 한국이 될 것입니다.”
그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맹우였던 김진우가 퇴장해 버리면, 도노반이 한국에 배려해 줄 필요가 없어진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을 것이다.
“어쩌면 중국 헌터들이 쳐들어와서 미국 헌터들과 싸움을 벌일 수도 있겠군요.”
“…….”
“이 땅에서 미중전쟁이 발생하는 겁니다. 재미있게 되겠죠.”
서민혁은 회귀하기 전의 기억을 되새겼다.
서민혁의 기억 속에서 한국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건 김진우의 크루세이더 길드가 한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진우가 사라지고 크루세이더 길드가 해체된다면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저를 쓰러뜨린다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서민혁.”
“…….”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김진우가 물었다.
“저를 대신해서… 이 나라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김진우는 서민혁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쓰러뜨린 남자에게, 앞으로 한국을 대표하게 될 헌터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한국의 자주성을 지켜 낼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다.
“걱정하지 마, 김진우.”
서민혁은 담담히 대답했다.
“네가 해야 했던 역할… 내가 다 맡아 줄 테니까.”
김진우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지,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서민혁이다.
김진우를 쓰러뜨린 이상 서민혁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잠들어, 김진우.”
묘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계속 김진우를 처단하는 걸 목표로 활동해 왔는데, 막상 김진우를 쓰러뜨리니 일종의 연민이 느껴졌다.
그동안 마도서를 해석해 마법을 배우려고 발버둥 치던 김진우를 보면서… 회귀하기 전의 자신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알겠습니다, 서민혁…….”
김진우는 이미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어째서일까.
헌터로서의 체력 스탯 때문일까, 아니면… 아드레스티아 때문일까.
“아아, 그래도…….”
마지막으로 김진우는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한번만이라도… 마법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김진우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국을 대표하던 크루세이더 길드의 길드장 김진우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 * *
미국, 워싱턴 DC.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사무실을 오벌 오피스라 부른다.
그 오벌 오피스에서 평소 대통령이 쓰는 책상에 엉덩이를 올려놓고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흠, 그런가. 알겠네.”
남자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한테 수화기를 건네줬다.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어, 어떻게 되었나, 미스터 도노반.”
미스터 도노반.
미국을 대표하는 SS급 헌터.
그가 대통령을 앞에 둔 채 어깨를 으쓱했다.
“일본의 칸자키에 이어서, 한국의 김진우도 퇴장했습니다.”
“맙소사… 그러면 위험한 거 아닌가?”
“네, 바로 손을 써야겠죠.”
그렇게 말하며 도노반은 책상 위에서 내려왔다.
“계획을 앞당겨야 하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뭐? 무슨 계획?”
“우리들 계획 말입니다.”
“설마……!”
대통령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했던 것하고 다르잖아?! 그렇게 되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계바늘을 조금 앞당기게 되겠지만, 대통령 각하의 임기는 보장해 드릴 겁니다. 물론, 각하의 노후도 말이죠.”
도노반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각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야당 및 언론들하고 평소처럼 말싸움만 하고 계십시오.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으, 으음… 그럼 대체 어떻게 움직일 생각인가?”
“지금 같은 상황이면 첫 수는 정해져 있죠.”
도노반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국이나 일본, 둘 중 하나에서 인위적으로 브레이크 현상을 발생시킬 겁니다. 아주 성대하게 말이죠.”
“……!”
인위적인 브레이크.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어느 나라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대통령 각하?”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도노반은 밝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