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서로 모든 걸 쏟아 내자 (2)
7번 무한서고는 공략하기 어려운 요새 필드였지만, 보스 퀘스트를 클리어한 이후 여러 곳들이 개방되었다.
예전에는 네 방향에서 동시에 진입해야 했지만 이제는 그런 제한도 없어졌다.
“남쪽 루트를 통해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작전의 총지휘를 맡은 제갈환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실력 있는 베테랑들이시니, 일일이 지시를 내릴 필요는 없겠죠. 각자 자유롭게 움직이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김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민혁 헌터도 그 편이 낫겠지요?”
“네, 그러죠.”
서민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공략 작전의 참가 멤버는 딱 다섯 명.
크루세이더 길드의 김진우, 김태호, 윤혜원.
서고관리국의 제갈환.
그리고 서민혁이었다.
전원 S급 헌터로, 한국의 주요 헌터 중 절반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번 목표는 상위 데몬들의 숫자를 줄여놓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새로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놈을 잡는 게 중요합니다.”
“…….”
“나중에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하면 일반 헌터들도 투입해야 합니다. 그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들이 최대한 상위 데몬들의 머릿수를 줄여놓아야 합니다.”
제갈환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 *
다섯 명의 S급 헌터들은 각자 사냥을 시작했다.
다들 S급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역시 김진우가 독보적이었다.
아주 여유롭게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 칼을 휘두를 때마다 데몬들이 픽픽 쓰러져 갔다.
‘땀 한 방울 안 흘리겠어.’
김진우가 사용하는 SS랭크 무기 ‘아론다이트’의 위력도 막강했다.
아메노하바키리는 물론이고 간장 및 막야의 풀파워조차 능가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저건 결코 김진우의 진짜 실력이 아니다.
서민혁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슬슬 중앙 구역에 도달합니다.”
뒤에서 따라오던 제갈환이 말했다.
“본격적으로 상위 데몬들이 나타날 겁니다. 다들 조심합시다.”
“알겠습니다.”
중앙 구역에 도달하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적들이 출현했다.
데몬 어쌔신, 데몬 엑시큐셔너 등의 상위 데몬들.
하지만 성장한 서민혁 앞에서는 더 이상 어려운 적이 아니었다.
‘신속 구현.’
예전에 애를 먹었던 데몬 어쌔신의 스피드도 이제는 완전히 압도할 수 있었다.
“캬아아아악!”
간장과 막야를 휘둘러 데몬 어쌔신을 처치하니, 옆에서 김진우가 데몬 엑시큐셔너의 목을 베어 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김 팀장, 윤 팀장, 콜로세움으로 진입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김태호와 윤혜원을 이끌고 김진우가 한발 먼저 콜로세움 형태의 건물로 들어갔다.
뒤처진 서민혁은 제갈환과 눈빛을 교환했다.
“슬슬 새로운 우두머리가 나타나겠군요.”
“그렇겠죠.”
서민혁도 제갈환과 함께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거대한 데몬이 포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새로운 우두머리군요.”
“데몬 해리어인 듯합니다.”
데몬 해리어.
흉악한 외모를 지닌 거구의 데몬으로, 다른 데몬들보다 체력이 뛰어나고 끈질기다.
동시에 매우 흉폭하고 공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제가 상대하지요.”
김진우가 김태호, 윤혜원을 내버려 두고 혼자 나섰다.
아론다이트를 휘두르면서 자기보다 몇 배는 큰 몸집을 지닌 데몬 해리어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기어를 한 단계 올렸군.’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움직임이다.
하지만 저것도 전력은 아닐 것이다.
“가세하겠습니다.”
서민혁은 잔챙이 데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데몬 해리어에게 달려들었다.
김진우와 연계하면서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면 오른쪽을 맡기겠습니다.”
“네, 길드장님.”
생각보다 김진우하고 호흡이 잘 맞았다.
김진우가 잘 맞춰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상성이 좋은 걸까.
“나약한 인간들이 어떻게 이런……!”
데몬 해리어가 판데모니움 혼돈어로 떠들어 댔지만, 서민혁은 대꾸해 주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간장과 막야를 휘둘렀다.
“크아아악!”
마침내 데몬 해리어가 체액을 뿜으며 무릎을 꿇었다.
막타를 친 서민혁에게 데몬 해리어를 쓰러뜨렸다는 윈도우가 뜨면서 보상이 주어졌다.
“그래도 20억 넘게 들어오는군요. 나중에 분배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굳이 나눌 필요가 없겠죠. 그냥 서민혁 헌터가 다 가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는 없죠.”
그사이 김태호와 윤혜원, 제갈환이 주위에 있던 데몬들을 웬만큼 정리했다.
지난번에 비해 데몬들의 숫자가 적은 편이기도 해서, 적은 인원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부국장님, 어떻게 할까요.”
서민혁은 제갈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요새 다른 곳에도 데몬들이 많이 남아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이동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군요. 크루세이더 길드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제갈환이 묻자 김진우는 김태호 등과 눈빛을 교환했다.
“이제는 따로따로 움직이죠. 저희는 서쪽 루트로 가 볼 테니, 두 분은 다른 루트를 맡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저희는 동쪽 루트로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북쪽 루트에서 합류하면 좋겠군요.”
“그게 좋겠네요.”
서로의 방침이 정해졌다.
크루세이더의 세 사람을 뒤로하고, 서민혁은 제갈환과 함께 동쪽으로 향했다.
* * *
“우리 뜻대로 움직여 주는군요.”
서민혁과 제갈환이 떠나는 걸 확인한 뒤, 윤혜원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면 대표님, 슬슬 준비를 시작할까요?”
“그래야겠죠.”
김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 팀장과 윤 팀장은 저기 있는 데몬 해리어의 시체를 이용해 의식을 진행해 주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잘 될지 모르겠네요.”
의식.
그것은 최근 김진우가 해석학자를 통해 알게 된 ‘암흑마법을 터득하기 위한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지닌 상위 데몬의 시체가 필요했다.
“이미 연습도 해 보지 않았습니까. 잘 될 겁니다.”
“혹시 몰라서 마법진을 프린트해 왔습니다. 그걸 보고 하면 되겠죠.”
“문양이 워낙 어려워서…….”
김태호와 윤혜원이 살짝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진우가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이 두 사람의 능력은 김진우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대표님, 조심하세요.”
“상대는 서민혁과 제갈환입니다. 제갈환은 그렇다 쳐도 서민혁은 위험합니다.”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조건.
그건 강한 힘을 지닌 인간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되어야 제물로서 가치가 있죠.”
해석학자가 전달해 준 자세한 번역문을 읽으면서, 김진우는 뛰어난 헌터를 제물로 바치면 되는 거라고 해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혁을 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대표님, 제갈환 쪽은…….”
“만약 서민혁을 생포하여 제물로 바치는 게 어려울 경우, 제갈환을 대용으로 사용해야겠죠.”
어쨌든 제갈환도 죽게 될 것이다.
이건 김진우의 장기 계획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제갈환은 여기서 죽는 거군요.”
“그렇지요.”
지난번에도 김진우는 이 7번 무한서고에서 제갈환을 제거하려 했다.
그때는 서민혁이 제갈환을 도와줘서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김진우가 직접 나선다.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김 팀장, 윤 팀장…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맡겨 주십시오.”
“성공을 빌겠습니다!”
김태호와 윤혜원을 뒤로하고 김진우는 동쪽으로 향했다.
‘굳이 은신용 장비를 사용할 필요는 없겠지.’
원래 김진우는 기습 같은 걸 선호하는 성격이 아니다.
애초에 직접적으로 손을 써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함정에 빠뜨려 자멸시키는 걸 가장 선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직접 나서고 있다.
이건 마법을 습득할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직접 나서서 확실히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도 굳이 은신까지 하면서 접근하여 기습하는 건 너무 구차하기 때문에 당당하게 걸어가기로 했다.
“흠…….”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니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민혁과 제갈환에 의해 쓰러진 데몬의 시체가 수두룩했다.
이윽고… 시체들 사이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는 서민혁과 제갈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진우 길드장님? 왜 여기에?”
제갈환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편 서민혁은 그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부국장님.”
“무슨 일이시죠?”
“이건 전부 이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이 나라?”
“네, 부국장님.”
김진우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세상이 바뀌게 될 겁니다.”
“길드장님…….”
“몬스터들이 무한서고 바깥에 뛰쳐나와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겁니다. 새로운 질서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겠죠.”
새로운 질서.
미국의 도노반이 구상하고 있는 건, 헌터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다.
“약육강식의 시대가 될 겁니다.”
“…….”
“저는 크루세이더 길드를 이끌고 한국을 지킬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필요하지요.”
다른 헌터들을 능가하는 힘.
마법의 힘이 필요하다.
그동안 김진우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입수한… +80의 마력 스탯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러니 죄송합니다, 부국장님.”
김진우는 다시 한번 제갈환에게 사과했다.
제물이 되든 안 되든, 오늘 제갈환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김진우는 제갈환의 빈자리에 김태호를 집어넣어, 서고관리국을 장악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서민혁 헌터.”
이어서 김진우는 서민혁에게 사과했다.
“당신을 동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군요.”
“…….”
서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서민혁은 오늘 이 상황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신 몫까지 이 나라를 지키겠습니다.”
그 순간.
김진우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솟구쳤다.
“기, 김진우 길드장?!”
제갈환이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해했다.
대체 그게 뭐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파앗!
김진우의 아론다이트가 번뜩였고… 서민혁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 * *
“지금쯤 대표님이 서민혁을 해치웠겠지?”
“벌써요? 아무리 그래도…….”
“너는 대표님의 진짜 힘을 몰라서 그래.”
“그러면 김 팀장님은 알고 계신 거예요?”
데몬의 체액을 이용해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면서 김태호와 윤혜원은 대화를 나눴다.
“대표님이 뭔가 특별한 힘을 갖고 있는 건 알고 있어요. 근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단 말이죠.”
“자기 힘을 감추고 계시니까 말이야. 그래도 미국의 미스터 도노반은 알고 있겠지.”
“아, 미스터 도노반하고 같이 브레이크 퀘스트 들어갈 때는 그 힘을 쓰겠죠.”
“세계 최강의 헌터인 미스터 도노반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 있을 정도의 힘이야. 서민혁 정도는 충분히 꺾을 수 있겠지.”
“그러면 좋겠지만요…….”
윤혜원은 데몬 체액이 다리에 묻은 걸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어쨌든 대표님의 그 힘에다가 마법까지 더해지면… 정말로 대표님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헌터가 되겠네요.”
“그렇지. 미스터 도노반을 뛰어넘는 세계 최강의 헌터가 될 거야.”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김태호는 자부심을 담아 말했다.
“전 세계를 장악하게 되는 거지.”
“…스케일이 너무 커져 버리네요. 그게 가능할까요?”
“나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마법의 힘은 무한하다고 하니까.”
“흠… 그 해석학자가 빨리 다른 마도서들도 해석해 내면 좋겠네요. 암흑마법은 대표님한테 안 어울리니까.”
“그렇지. 대표님한테는 신성마법 같은 게 어울려.”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나는 김진우의 시커먼 속내를 생각하면 암흑마법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김태호와 윤혜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서민혁의 모습이 스르르 나타나고 있었다.
“서, 서민혁?!”
“어, 어떻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갈환과 함께 동쪽 루트로 갔을 텐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한가 보지?”
서민혁은 당황해하는 김태호와 윤혜원 앞에서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곧 알게 될 거야.”
간장과 막야를 뽑아 든 채 서민혁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