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서로 모든 걸 쏟아 내자 (1)
“제갈환 부국장이 이번에는 무슨 의뢰를 할지 모르겠군요.”
김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여기로 왔을 때는 7번 무한서고 공략 때문이었죠.”
공략1팀의 김태호, 공략2팀의 윤혜원도 김진우와 함께였다.
7번 무한서고 공략 때는 길드장인 김진우만 미팅에 참석했었지만, 이번에는 팀장급 베테랑들도 같이 와 달라는 듯했다.
“어서 오시죠, 크루세이더 여러분.”
약속 장소인 스카이 라운지에 도착하자 제갈환이 맞이해 줬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다른 일반인 출입을 막은 듯했다.
“다른 분들도 오셨습니까?”
“먼저 와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김진우는 제갈환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을 확인했다.
“서민혁 헌터.”
“김진우 길드장님.”
서민혁이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계속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서민혁이 나타났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자, 앉으십시오.”
“혹시 저희 말고는 서민혁 씨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윤혜원의 질문에 제갈환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떻게 된 걸까요.”
“글쎄요.”
의아해하는 김태호에게 대꾸하면서 김진우는 자리에 앉았다.
결국 제갈환은 크루세이더 길드 말고는 서민혁만 부른 듯했다.
“서민혁 씨는 요새 활동이 뜸하시던 것 같던데, 혹시 무슨 일 있으셨던 건가요?”
윤혜원이 서민혁한테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서민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사실 제 동생이 며칠 뒤에 수능 시험을 봐서요.”
“네?”
“제가 자꾸 여기저기 나가면 동생이 신경 쓰여서 공부 집중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아… 그, 그래요?”
“인터넷에서 자꾸 제 얘기 찾아보고 그러더라고요.”
“그, 그런 것 때문에 외부 활동을 안 하셨다고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얘기였다.
한편 제갈환은 이미 서민혁한테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말씀하셨죠.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방 안에서 유튜브 보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혼낼 수도 없고, 참 난감하죠.”
그런 대화를 나눈 뒤, 서민혁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이유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저희 쪽 조성조 대표하고 해외 진출 관련으로 계획 세우는 게 있었거든요.”
“해외 진출이라면…….”
“아직 말씀드릴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만, 내년에는 해외에 많이 나가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아무래도 이게 진짜 이유였던 것 같다.
최근 서민혁은 해외에서 큰 성과를 냈다.
말레이시아의 브레이크 퀘스트에서는 일본의 타케미카즈치 길드를 들러리로 만들 정도로 맹활약했고, 러시아에서는 혼자서 화이트 드래곤을 잡았다.
여기저기서 서민혁을 초빙하려 할 것이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모신 건, 의뢰 드리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제갈환이 본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극비 사항입니다.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국장님, 대체 어떤 겁니까?”
“일단 자료부터 나눠 드리겠습니다.”
“이건…….”
제갈환이 나눠준 자료를 보고, 김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7번 무한서고군요.”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길드 연합군이 데몬들을 물리치고 에테르 코어를 입수했던 곳이다.
현재는 서고관리국에서 관리하면서 외부인 출입을 금하고 있다.
“조만간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보입니다.”
“브레이크가?”
“네,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무한서고의 수명이 다 되어 브레이크가 가까워지면 내부 곳곳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 전조 현상을 바탕으로 브레이크 발생을 예측할 수 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7번 무한서고에는 강력한 데몬 계열 몬스터가 많습니다.”
“네, 그랬었죠.”
“만약 브레이크다운이 발생한다면 피해가 심각할 겁니다. 그래서…….”
제갈환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레이크 현상이 시작되기 전에, 내부에 있는 데몬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흠…….”
그럴 듯한 얘기다.
브레이크가 발생하면 필드 안의 몬스터들을 7일 안에 섬멸해야 한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전에 몬스터를 해치워 놓으면 더 여유가 생긴다.
다만 몬스터가 리스폰될 수도 있기 때문에 너무 일찍 시작하면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
“저희들이 관찰한 결과, 7번 무한서고에서 새로운 상위 데몬이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새로운 상위 데몬?”
“네, 예전 아크데몬을 대신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보스였던 아크데몬은 서민혁이 제갈환 등과 함께 해치웠다.
그 아크데몬을 대신해 새로운 상위 데몬이 데몬들을 통솔하고 있다는 건가.
“이번에 여러분들께 그 상위 데몬의 토벌을 의뢰 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희와 서민혁 헌터만 부르신 거죠? 아수라나 대룡방, 북두성은?”
“지난번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동시에 진입해야했습니다. 그래서 4개 길드에 협력을 요청했던 것이죠. 하지만 보스 퀘스트가 클리어된 이후 그 기믹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소수 정예만 투입하는 작전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난번 작전에서 꽤 많은 희생자가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S급 헌터들만 투입하자는 것이 서고관리국의 결정입니다.”
“…….”
S급 헌터들만 들어가게 한다.
그러면 크루세이더 길드와 서민혁에게 의뢰하는 게 맞다.
아수라 길드에도 S급 헌터가 여러 명 있지만 지난번 사해방 관련 사건 때문에 자숙 중이다.
대룡방과 북두성은 길드장이 S급 헌터지만 지금 현장에 나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서민혁 헌터는 혼자서 도전하고 싶다고 하셨지만, 솔직히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혼자서?”
“네,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시선이 집중되자 서민혁이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혼자서 움직이는 게 편해서 말입니다.”
“서, 서민혁 씨, 지난번에도 들어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7번 무한서고는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혼자서 들어가면 너무 위험하다고요.”
“자신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윤 팀장님.”
윤혜원의 말을 듣고도 서민혁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 김진우 길드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일에 저희가 빠질 수 없죠. 서민혁 헌터만 보내는 것도 불안하니까 말입니다.”
김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도 소수 정예를 보내겠습니다. 상위 데몬을 해치우고, 하는 김에 나머지 잔챙이들도 처리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결국, 크루세이더 길드는 7번 무한서고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서민혁과 함께.
* * *
“김진우 길드장님.”
미팅이 끝난 뒤 서민혁은 김진우에게 말을 걸었다.
“함께 싸우는 건 오랜만이군요.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민혁 헌터.”
김진우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민혁 헌터의 활약, 저도 많은 관심 갖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헌터가 되셨군요.”
“그럴 리가요. 한국을 대표하는 헌터는 김진우 길드장님이십니다.”
“이제는 역전되었다고 봅니다. 앞으로 그 격차가 더 커질 거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사심이 없는 칭찬이었다.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김진우 길드장님.”
“아, 잠시만요.”
그때 김진우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눈동자를 빛내며 서민혁에게서 등을 돌렸다.
“…….”
서민혁은 자기를 내버려 둔 채 뭔가를 확인하는 김진우를 관찰했다.
김진우가 대화 도중에 서민혁을 방치한 상황이었지만, 서민혁은 딱히 언짢지 않았다.
지금 김진우가 확인하고 있는 게… 서민혁이 보낸 메일이기 때문이다.
‘예약한 시간에 잘 도착했나 보군.’
김진우는 그 자리에서 메일을 확인한 뒤, 곧바로 서민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될 것 같군요.”
“크루세이더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김진우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김태호와 윤혜원도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결국, 라운지에서는 서민혁과 제갈환만 남게 되었다.
“서민혁 헌터.”
“네, 부국장님.”
“계획대로 되고 있는 겁니까?”
“그렇지요.”
이번 작전은 서민혁의 설계였다.
여기에 제갈환, 조성조가 협력해 주고 있다.
물론, 목적은 하나다.
“김진우는 함정에 빠질 겁니다.”
7번 무한서고에 브레이크의 전조 같은 건 없었다.
모든 건 김진우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설계에 불과하다.
지금 김진우를 급하게 달려가게 만든 이메일까지도.
* * *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무슨 메일이 온 거죠?”
김태호와 윤혜원의 질문에도 대꾸하지 않고 김진우는 혼자서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장 7번 무한서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7번 무한서고…….’
현재 7번 무한서고는 서고관리국이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김진우도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7번 무한서고에 가 보고 싶었다.
“…….”
7번 무한서고 앞에서 내린 뒤, 김진우는 눈앞에 펼쳐진 건물을 올려다봤다.
이 안에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까 받은 메일…….’
김진우는 택시 안에서 여러 번 확인했던 메일을 다시 한번 열어 봤다.
익명의 해석학자하고는 그동안 여러 번 메일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가슴 뛰는 메일을 받은 적은 없었다.
[메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김진우 길드장님.
사실 카발라 진리어의 해석은 아직 성과가 없습니다.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 대신 다른 언어에서 진척이 있었습니다.
데몬들이 사용하는 판데모니움 혼돈어입니다.
김진우 길드장님이 해외에서 입수했다는 암흑마법 마도서를 일부분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참고해 주시면 됩니다.
문장이 장황한데 마도서 원문이 원래 그렇습니다.
일단 중요한 것만 요약해 드리자면, 암흑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먼저 강력한 힘을 지닌 데몬의 육체가 필요합니다. 그 육체 일부분을 사용해 의식을 진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이것도 평범한 인간이어서는 안 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인간이어야 된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크루세이더 길드에서 활용할 수는 없는 마법입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연구에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인 것 같아서 해석 결과를 공유해 드립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내용들을 참고해서 다른 마도서들을 연구하면 분명 성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김진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크루세이더 길드가, 이런 사악한 마법에 손을 댈 리가 없지.”
익명의 해석학자의 말대로,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쓰는 마법 같은 걸 시도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래, 절대로 말이야.”
김진우는 첨부파일을 열어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장황한 문장이었지만, 잘 살펴보면 요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로… 김진우가 원했던 마법의 힘이었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되지.”
어떤 희생을 치러도 상관없다.
마침 좋은 무대도 갖춰진 만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로 말이다.
“그러면 누구를 제물로 삼느냐가 중요한데…….”
김태호나 윤혜원을 제물로 삼을까.
아니면 서민혁을 제물로 삼을까.
김진우는 즐거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 * *
제갈환과 헤어진 뒤, 서민혁은 종로로 향했다.
받을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서민혁 헌터.”
“아닙니다, 길드장님.”
실버스미스 길드의 공방에서 만난 문태식은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조정을 위해 무리를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완성했습니다. S랭크이긴 하지만… SS랭크에도 뒤지지 않는 방어구가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문태식이 보여 준 건 전신 슈트였다.
컬러는 무기질적인 흑회색이었다. 이걸 화이트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었다고 눈치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합성 섬유로 만든 방호복 같지만, 실제로는 드래곤의 비늘을 절단하여 수천 개의 조각으로 나눠 만들어 낸 갑옷이다.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마음에 드십니까?”
“네.”
서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최후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김진우와 결전을 치르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