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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헌터가 된 해석학자-105화 (105/200)

105화 드래곤 사냥이 어려운 세 가지 이유 (1)

러시아에 가기 전에 서민혁은 김민철 교수를 만나 보기로 했다.

지난번에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우연히 마주치긴 했지만, 그때는 인사만 나눴을 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마땅한 계기가 없어 만나 보지 못했다.

‘윤혜원도 퇴원했고, 크루세이더에서 새로운 일을 꾸밀지도 몰라. 더 이상 뒤로 미룰 수는 없지.’

김진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김민철과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 결론을 내린 서민혁은 러시아 측과의 조율이 진행되는 동안 김민철을 만나러 갔다.

‘오랜만에 와 보네.’

대학교 캠퍼스 안에 들어온 서민혁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서민혁은 이곳에서 김민철 교수와 함께 마도해석학을 연구했다. 헌터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서민혁은 이 대학교로 출퇴근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억하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가을 캠퍼스를 걸으면서 김민철의 연구실로 향했다.

‘이때는 규모가 컸었지.’

회귀하기 직전, 서민혁의 연구실은 임대료가 싼 사무실 단지 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마도해석학의 전망이 밝았던 시기다. 여기저기서 투자가 들어왔고, 김민철도 대학교 연구동에 큰 규모의 연구실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 헌터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초 마도어 번역 어플도 이곳에서 개발되었다.

“연락드렸던 서민혁입니다.”

“앗, 오셨군요. 여기 잠깐만 앉아 계세요.”

서민혁을 맞이한 건 20대 초반 정도의 여자애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1년 정도 연구실에 있다가 헌터로 전향했던 걸로 기억한다.

“교수님, 서민혁 씨 오셨어요.”

“그래요?”

이윽고 안쪽 방에서 사람이 나왔다.

누가 봐도 대학 교수 같은 인상의 남자.

마도해석학의 최고 권위자인 김민철이 서민혁 앞에 나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서민혁 씨.”

“안녕하세요, 교수님.”

“자,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서민혁은 김민철이 권유하는 대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책이 쌓여 있는 비좁은 방이었다.

‘그래, 이게 교수님 방이었지.’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이렇게 마도해석학 연구에 매달렸던 김민철이지만, 말년에는 온갖 음해에 시달리면서 이 교수실에서도 쫓겨났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요새 대단한 활약을 하고 계시더군요. 저희 연구실에서도 다들 서민혁 씨 얘기를 한답니다.”

김민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한 가지 봐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서민혁은 가방에서 공책 하나를 꺼냈다.

“그동안 제가 개인적으로 정리한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데아 보편어의 숫자 표기법에 대해 제 추측을 적어 봤는데, 한번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데아 보편어의 숫자 표기법이요?”

김민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공책을 폈다.

처음에는 그냥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곧바로 얼굴색이 바뀌었다.

“자, 잠시만요.”

김민철은 눈에 힘을 주고 공책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서민혁은 김민철이 공책 내용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디까지나 힌트만 적어 놓은 거지만… 김민철 교수라면 이걸로도 충분하겠지.’

서민혁이 공책에 적어 놓은 건, 아이템 설명 등에 사용되는 이데아 보편어의 ‘숫자’ 표기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기초 마도어를 제외한 마도 언어들은 숫자조차 해석하기 어렵다. 숫자 표기법 자체가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것하고는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진법도 다르고 자릿수를 나타내는 방법도 다르고 모든 게 다 독자적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숫자’인 이상 규칙만 찾으면 읽어 낼 수 있다. 서민혁은 그 규칙을 알아내기 위한 힌트를 김민철에게 던져 준 것이다.

“혹시 수학 전공이셨습니까? 아니면 암호학을 공부하셨다든가…….”

“아니요. 대학은 어문계열이었습니다. 교수님처럼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공책을 다 읽은 김민철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민혁 씨, 이건 정말 엄청납니다.”

“그렇습니까? 제대로 검증도 못 한 추측인데요.”

“아니요. 확실히 검증이 필요한 건 맞습니다만, 이 가설을 바탕으로 하나하나씩 풀어 나가면 이데아 보편어에서 숫자를 어떻게 나타내는지 다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네, 가능할 겁니다. 인력이 좀 필요하겠지만, 금방 해독해 낼 수 있습니다.”

김민철은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이데아 보편어로 적혀 있는 각종 수치를 다 읽을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군요.”

“앗, 하지만…….”

“왜 그러시죠?”

“이거… 공표해도 되는 걸까요? 서민혁 씨가 독자적으로 연구하신 건데.”

“제 힘으로는 거기 적어 놓은 게 한계입니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서 확실히 밝혀낸 뒤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교수님에게 맡기는 겁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네, 이걸로 어떤 이득을 취할 생각은 없습니다.”

서민혁의 말을 듣고 김민철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템의 각종 수치가 세상에 알려진다고 해서 내 우위성이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 말이지.’

이미 전 세계의 헌터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여러 아이템의 효과를 검증해 왔다.

어떤 장비의 독 내성이 약 50%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65%였다는 게 밝혀진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변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서민혁이 초보 시절에 ‘고블린 대거(독액)’의 맹독 부여 확률을 제대로 파악하고 유용하게 써먹었듯이, 성능이 잘못 알려진 아이템들이 재평가되어 새로운 전략이 개발될 가능성은 있다.

“알겠습니다. 결과를 발표할 때는 서민혁 씨의 그런 뜻도 밝히는 게 좋겠군요.”

“죄송하지만 제 이름은 빼 주셨으면 합니다.”

“네?”

“어디까지나 김민철 교수님 개인의 연구 성과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게요.”

“아, 아니, 잠깐만요.”

김민철이 다급히 말했다.

“서민혁 씨가 알아낸 겁니다. 왜 그런…….”

“저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적인 가설을 전달해 드렸을 뿐입니다. 제가 알아낸 게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서민혁 씨의 발상이야말로…….”

“저는 헌터입니다, 교수님.”

서민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석학자의 영역을 침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민혁 씨…….”

이미 서민혁은 헌터로서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여기서 해석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너무 번잡스럽다.

나중에 헌터를 은퇴하고 해석학자로 산다면 몰라도, 지금은 서민혁 명의로 마도해석학 관련 활동을 할 생각은 없다.

“다른 헌터들한테서도 안 좋은 얘기를 들을 수도 있어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서민혁 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전부 제 이름으로 발표하겠습니다.”

김민철은 결국 서민혁의 바람을 받아들여 줬다.

“어쨌든 이렇게 귀중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말을 해야 하는 건 저입니다, 교수님.”

“네?”

“저희 헌터들은 교수님이 기초 마도어를 해독해 주신 덕분에 이렇게 헌터 활동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서민혁 씨…….”

“제가 제공해 드린 아이디어 정도는 그냥 소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저희 헌터들에게 해 주신 것에 비하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군요, 하하.”

“헌터들은 다들 교수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서민혁 씨처럼 말해 주시는 분은 드뭅니다.”

“그렇습니까?”

“네, 빨리 다른 언어도 해석해 내라고 재촉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죠.”

그건 서민혁도 알고 있다.

이번에 이데아 보편어의 숫자 표기법을 알아내기 위한 힌트를 전달해 준 것도 그런 부분을 고려한 것이다.

“크루세이더 길드 같은 곳도 그렇습니까?”

“아, 크루세이더 분들은 항상 좋은 말만 해 주십니다. 이러이러한 걸 우선해서 연구해 달라고 요청하실 때가 있긴 합니다만, 스폰서로서 그 정도 요구는 할 수 있지요.”

“요구가 있긴 있나 보군요.”

“하지만 제가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해서… 항상 죄송하지요.”

“요새는 어떤 걸 연구하고 계십니까? 저도 한번 살펴봤으면 좋겠군요.”

“아, 그러시다면…….”

김민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두 권 가져왔다.

하나는 갈색 표지의 마도서, 또 다른 하나는 녹색 표지의 마도서였다.

“사실 크루세이더 길드에서는 그동안 계속 이 갈색 책을 해석해 달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정령마법의 첫걸음… 이렇게 적혀 있는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서민혁이 갖고 있는 것처럼 정령마법을 처음 배울 때 쓰는 교재였다.

저자나 출판사가 다른 건지 제목은 똑같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며칠 전에는 이 녹색 책을 가져오더니 이걸 우선해서 해석해 달라고 하더군요.”

“이건… 마력학 개론이라고 해석하면 될까요?”

“네, 그렇게 해석해야겠죠.”

마력학 개론.

지금까지 접해 본 타입이 없는 마도서다.

김진우가 해외에서 구해 온 걸까.

“한번 보시죠.”

“네.”

서민혁은 마력학 개론을 잠시 훑어봤다.

마도서는 카발라 진리어가 아니라 위그드라실 세계어로 적혀 있었다.

이건 지난번에 러시아에 갔을 때 서리거인들이 쓰던 언어이기도 했다.

“교수님.”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아니요, 다만…….”

책을 덮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책, 복사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제가 소장하고 있는 마도서와 대조해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어쩌면 힌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시다면… 이미 복사본을 만들어 놓은 게 있으니 한 부 드리겠습니다.”

“아, 제가 가져가도 문제되지는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유출이 금지되어 있는 책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교수님, 죄송하지만…….”

“왜 그러시죠?”

“제가 복사해 갔다는 것도, 얘기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

이해한다는 듯이 김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크루세이더든 어디든 얘기하지 않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이미 김민철은 서민혁에게서 큰 선물을 받았다.

이 정도 부탁은 당연히 들어줄 것이다.

* * *

김민철과의 만남을 마친 뒤, 서민혁은 바로 연구동 건물을 빠져나왔다.

캠퍼스를 걷고 있자 데이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확정이군.’

‘네, 그렇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민혁은 대답했다.

‘김진우는 역시 마력 보너스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을 쓰는 법은 모르고 있군요.’

마력도 없으면서 ‘마력학 개론’ 같은 마도서를 빨리 해석해 달라고 압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진우의 스테이터스에는 서민혁처럼 마력 수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기초 마도어 외의 마도 언어를 읽지 못하지.’

‘네, 스테이터스는 기초 마도어로 표시되기 때문에 김진우도 자기한테 마력이 생긴 건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로 마법을 쓰지는 못하고 있는 거고.’

‘그렇죠.’

김진우는 서민혁과는 달리 마도 언어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김민철에게 마도서를 우선해서 해석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헛수고다.

앞으로 10년, 20년을 기다려도 김진우는 마도서를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거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회귀하기 전, 크루세이더 길드는 해석학자가 해석한 내용이라면서 가짜 정보를 퍼뜨려 댔다.

그걸로 국내외의 길드를 함정에 빠뜨리면서 세력을 키웠다.

최근에도 가짜 석판으로 대룡방과 아수라를 함정에 빠뜨린 적이 있다.

‘그대로 돌려줘야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잘해 봐라.’

김진우가 마법에 관한 정보를 원하고 있다면… 서민혁은 누구보다 쉽게 김진우를 농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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